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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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항 성찬례에 대한 우리의 믿음

제7항 성찬례에 대한 우리의 믿음

 

성찬례는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주의 살과 피에 동참하여 주와 연합하고 영생을 받으며 마지막 날에 부활하는 성례임을 믿는다. 이 성례는 필요할 때마다 거행하며 반드시 한 개의 누룩 없는 떡과 포도즙으로 거행한다.

성찬례는 구약 출애굽 시대에 시작된 유월절 절기에 유대인들이 가지는 특별한 식사가 신약 시대에 개혁되어 나타난 기독교의 성례입니다. 이 성례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1)성찬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지키기 시작한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기 위해서 그 나라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열 개의 재앙 가운데 마지막으로 내려진 재앙은 바로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초태생은 죽음을 당하는 끔직한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모든 사람과 짐승에게는 그 재앙이 임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재앙이 닥치기 전에 미리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도록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대로 실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백성들과는 달리 그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열 번째 재앙은 유대인들이 애굽을 나올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하나님은 애굽 사람에게는 심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이 임한 이 재앙을 기념하여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절기에는 무교병과 양고기와 같은 특별한 의미의 음식을 먹으며 기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2:22)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구약 시대 장자 죽음의 재앙을 통해 시작된 유월절 절기는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을 예표합니다. 즉, 애굽과 같은 죄악 세상에서 사망의 노예처럼 매여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흘려 그 값으로 죽음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의 우리는 예수님께서 새롭게 설립하신 새로운 유월절로서 성찬례를 시행해야 합니다. 성찬례는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친히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지시면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명령에 근거하여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찬례를 일컬어‘유월절 먹기를 원하였노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성찬례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 즉 신약 시대 성도들이 지켜야 하는 새로운 유월절 식사입니다.

 

(22:19-20)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2: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성찬례는 예수님과 열 두 제자들 사이에서만 명령하시고 준행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세워진 초대교회는 그것을 하나의 성례로 받아들여서 시행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관련된 문헌에서도 발견되지만 성경의 내적 증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저술인 고린도 전서에서 예수께서 설립하신 성찬례의 정확한 절차와 그 의미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직계 제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만찬에 참여한 인물이 아닙니다. 마지막 만찬에 참여하지 않은 그가 그 때의 대화와 성찬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고린도 교회를 포함한 초대 교회가 성찬례를 하나의 예전으로 받아들였다는 증거입니다.

(고전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2)주님의 살과 피에 참예하여 주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성찬례는 교파와 교단에 따라 그 교리에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천주교의 견해로 ‘화체설’(化體說)이 있습니다. 떡과 포도즙을 축사하면 실제로 예수님의 피와 몸으로 변한다는 견해입니다. 둘째는 일반 개신교의 견해로 ‘상징설’(象徵說)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할 뿐 축사 기도를 하더라도 떡과 포도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견해입니다. 마지막으로 참예수교회의 ‘영화설’(靈化說)이 있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성령을 받은 성도의 축사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피와 살로 ‘영적인 변화’(영화)가 일어난다고 믿는 견해입니다. 마치 세례받을 때 물이 실제 피로 변하지는 않지만 성령 받은 자가 예수 이름으로 선언하고 시행했을 때 ‘물’이 ‘피’로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듯이 성령 받은 자의 축사 기도를 통해 성찬례의 떡과 포도즙이 영적인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딤전 4:4-5)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3)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영생하는 약속이 있습니다.

성찬례에 참예할 수 있는 자들은 이미 세례를 받고 구원의 길을 시작하여 부활의 소망을 가진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은 성찬례를 통해 거듭난 성도에게 부활과 영생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성찬례에 참예하는 성도는 이 예식에 참예함으로 장래에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참예해야 합니다.

(6:53-5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4)힘을 합해서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성찬례는 개인적 신앙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적 차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한 떡과 한 포도즙에 참예하는 것은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한 지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육신의 피를 나눈 혈육의 가족 관계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영적인 가족 관계도 있습니다. 육신의 가족은 죽음을 통해서 그 관계가 끝나지만 영적인 가족은 죽음 이후에도 천국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가족은 육신의 가족보다 더 중요하며 육신의 친족보다 더 친밀한 관계입니다. 성도는 성찬에 참예할 때 이처럼 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눈 영적인 가족들과 함께 한 떡과 한 잔에 참예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적인 가족으로 맺어진 공동체는 서로 협력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고전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5)성찬례는 성경적 절차와 방법으로 시행되어야 합니다.

세례라는 성례와 마찬가지로 성찬례도 그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도록 성경적 절차와 방법대로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 절차와 방법이 성경의 기록과 일치해야만 그 성찬례에 담긴 온전한 정신과 영적인 의미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한 개의 누룩없는 떡을 사용합니다.

떡은 축사하기 전에 한 개여야 합니다. 그리고 축사 이후에 작은 조각으로 찢어 나눕니다. 이 한 개의 떡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한 공동체임을 의미합니다. 참교회의 성도들은 천국까지 항해하는 구원의 방주에 함께 올라탄 한 공동체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떡에 누룩을 넣지 않은 것은 순결한 예수님의 몸에 참예함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누룩을 멀리하듯이 생활 속에서 죄악과 부정함을 멀리하고 예수님처럼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할 것을 성찬에 참예하는 시간에 깊이 다짐해야 합니다.

(고전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고전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둘째, 한 병의 누룩 없는 포도즙을 사용합니다.

한 병의 포도즙은 우리가 한 피를 나눈 공동체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발효된 포도주가 아니라 누룩을 넣지 않은 순수한 포도즙은 역시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예수님의 정결한 피에 참예함을 의미합니다. 그 피에 참예함으로 예수님을 본받아 피흘리기까지 죄의 세력과 싸우며 세상 사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며 복음을 전할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셋째, 세례를 받은 자가 성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유월절은 할례를 받고 유대인으로 귀화한 자만이 참예할 수 있는 것처럼 신약 시대의 새로운 유월절인 성찬례도 세례를 받고 거듭난 성도만이 참예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지 않아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지도 않은 자가 장차 부활할 미래를 위해서 예수님의 몸과 피에 참예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인 세례로 주님과 관계를 맺은 자,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후 성찬에 참예할 자격이 있습니다.

(12:48)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넷째, 성찬거행의 회수는 제한이 없고 수시로 거행할 수 있습니다.

여러 문헌이나 자료를 조사하면 초대교회에서는 성찬례를 집회시마다 애찬과 병행하여 시행한 것으로 발견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특별히 시행의 회수나 시행할 때를 지정하신 일은 없으므로 각 교회가 처한 형편대로 스스로 정해서 거행하면 됩니다. 싱가폴에 있는 참예수교회의 경우 월 1 회 성찬례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참예수교회 대만교회에서는 한국 교회처럼 영은회와 같은 특별한 행사 때에 시행하고 있습니다.

제6항 세족례에 대한 우리의 믿음

제6항 세족례에 대한 우리의 믿음

 

세족례는 주님과 상관을 맺고 서로 사랑하고 성결, 겸손, 봉사, 용서의 교훈을 가르치는 성례이며 세례(침례)를 받은 모든 신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족례를 일차 행하며 신자들 상호간의 세족례는 필요시에 시행할 수 있음을 믿는다.

교회가 담고 있는 교리에는 공통된 지향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관계를 맺어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완전한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들입니다. 참예수교회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세 가지 성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물세례, 성찬례, 세족례입니다. 그 가운데 세족례는 발을 씻기는 성례로 십자가 사건 직전 유월절 만찬에서 주님이 설립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본회에서는 이를 하나의 성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족례가 하나의 성례로 인정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며 우리를 그 안에 담고 있는 구원으로 인도할 귀중한 교훈들은 무엇일까요?

 

1)세족례는 예수님과 상관을 맺게 만듭니다.

세족례가 교회에서 하나의 성례로 성립되는 근거 중에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중에 나타난 ‘상관’이란 단어 때문입니다.

(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여기서 ‘상관’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메로스’(μέρος)로써 ‘부분’ ‘조각’ ‘몫’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상관을 맺는다’는 뜻은 예수께서 주시는 ‘몫을 받는다’ 또는 ‘분깃을 받는다’는 상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선언은 천국의 기업, 천국의 몫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말씀이 이렇게 엄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태도가 정반대로 돌변합니다. 조금 전까지 ‘절대로 발을 씻기지 못한다’고 거절하더니 이제는 ‘목욕까지 시켜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태도가 바뀐 이유가 예수님의 말씀이 구원과 관련된 엄중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13:10-11)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또 다른 근거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거절에 대해 답변하시는 내용 가운데 들어있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에서 ‘목욕하는 것’은 무엇이며 ‘발씻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석가들은 ‘목욕하는 것’이란 ‘물세례’를 가리킨다고 대체로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발 씻는 것’은 분명 ‘세족’을 가리킵니다. 주목할 점은 목욕하는 것이 발씻는 것과 병행하여 서술된 점입니다. 그런데 병렬 관계는 곧 성례와 성례의 관계여야 그러한 서술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물세례가 하나의 성례인 것처럼 세족례도 하나의 성례라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세 번째 근거는 요 13:15에서 예수님이 ‘내가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말씀하신 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긴 행위가 제자들도 장차 실천해야 하는 일이라고 밝히십니다.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이신 것처럼 제자들은 장래에 발씻기는 일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와 같은 여러 가지 근거로 최후 만찬이 있던 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행하신 사건은 일회적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 교회가 마땅히 성례로 수용해야 하는 것임을 반영합니다. 본회에서는 예수님이 세우신대로 세족례를 성례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 성례는 예수님과 ‘상관’을 맺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교훈은 무엇일까요?

 

2)세족례에는 사랑,성결, 겸손, 봉사, 용서의 교훈이 있습니다.

세족례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려는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오늘날 나는 그 교훈을 발견하고 세족례를 받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 그 뜻을 깊이 새기고 이웃들에게 주님을 닮은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그러면 구체적으로 세족례를 통해 실천해야 하는 주님을 닮은 신앙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예수님이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성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족례를 행하실 무렵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는 섬김의 왕이 되시고자 하셨지만 제자들은 주님이 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유대 민족을 독립시켜줄 정치적인 임금으로 즉위할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관심은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를 따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주님 곁에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에 모아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매우 가슴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며 배웠지만 예수님의 정신과 모범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 주님이 세 번이나 십자가 수난에 대해서 예언했건만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세배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주의 좌편과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이들의 요청에 대해 분노를 발했습니다. 분노를 느낀다는 것은 그들도 똑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서로 반목하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는 어리석고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둘째, 생활 속에서 자신의 성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땅에 발을 디디고 생활하므로 신체 가운데 가장 쉽게 오염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발입니다. 그래서 매일 씻고 관리하지 않으면 위생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성도가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삶 속에서 세속의 여러 가지 부정하고 불결한 것들에 유혹받을 수 있고 부정한 생각을 하고 불결한 행동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근원적으로 범죄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자신을 영적으로 깨끗하게 관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매일 자신의 발을 닦고 관리하듯이 성도는 매일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혹시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깨닫거나 범죄한 사실이 있다면 주님께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성결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우리의 영혼은 점점 하나님을 닮은 아름다운 형상의 성도로 점점 변화하게 됩니다. 이처럼 세족례는 이미 물세례는 받았으나 불완전한 성도가 어떻게 성결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셋째, 겸손하게 낮아져서 봉사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외출했던 어떤 사람이 귀가하면 그 발을 닦아주는 일은 그 가정의 종 가운데 가장 비천한 종이 담당하는 몫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만찬을 가지실 무렵 ‘누가 높으냐’하는 문제로 서로 반목하는 분위기 속에 있던 제자들은 결코 동료들의 발을 씻겨주는 섬김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먼저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이 자신들의 발을 씻기려고 하실 때 제자들은 얼마나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런 행위가 반목하는 분위기의 제자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을지 가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신분이 높은 자가 낮은 자의 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훈의 가르침대로 그분 자신이 세족례를 통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처럼 세족례 안에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내가 남보다 낮아져 겸손히 봉사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넷째, 용납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기신 열 두 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이 제자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패륜의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스승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음을 품은 유다를 돌이키시려고 간접적으로 수차례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스승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품었던 가룟 유다를 겨냥한 말씀입니다. 또 만찬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도 역시 가룟 유다를 겨냥한 지적입니다. 가룟 유다는 ‘어떻게 내 마음을 아고 계셨지? 아! 내가 죄를 지었구나! 스승님께 용서를 구하자’라고 깨닫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은 최후로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가룟 유다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겨냥하여 수차례 돌이키도록 수차례 말씀하시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그런 제자의 발을 씻기셨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평소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교훈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가르침대로 유다의 발을 씻기시는 행동을 통해서 원수의 죄를 용서하시는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세족례를 통해서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용서와 관용의 정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와의 관계 속에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모두 불완전하기 때문에 때로 성도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면서 해소될 수 있으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 세족례를 통해 주님의 정신을 되새기며 서로 화해와 용서를 도모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살전 5: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3)세족례 시행은 성경적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 즉, 물세례를 받은 제자들에게 세족례를 시행하셨듯이 오늘날에도 반드시 물세례를 먼저 받은 성도라야 세족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주님과의 관계를 맺는 의미에서 반드시 성령이 임재하시는 교회의 성직자로부터 한 차례 세족례를 받아야 하고 또 성도 상호간에 갈등과 불화의 경우 상호 합의가 이루어진 가운데 세족례를 시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족례를 통해서 불화와 갈등을 해소하는 것보다 먼저 대화와 상호 이해를 통해서 해소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때로는 세족례를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불화하고 분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세족례를 성례로 주신 주님께 오히려 매우 송구스러운 일이며 세족례 시행하여 화목을 시도한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족례를 시행하는 것보다 세족례의 정신을 더 높여서 평소 타인과 불화하지 않고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도 상호간에 세족례를 시행하는 것은 대화와 이해로도 해결되지 않고 상호간의 관계가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상호 발을 씻겨주는 기회를 갖는 것이 옳습니다.

제4항 세례에 대한 우리의 믿음

제4항 세례에 대한 우리의 믿음

 

세례(침례)는 죄사함을 받는 중생의 성례이며 반드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흐르는 물에서 베풀며 세례를 받는 자는 머리를 숙이고 전신이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아야 함을 믿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도록 보내신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명대로 물로 세례를 주는 자기 사명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름 앞에 항상 세례라는 단어가 붙어서 세례 요한, 즉 ‘세례자’(Baptist 세례주는 사람) 요한이라고 구별하여 호칭하게 됩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세례는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기원했고 그분의 명령을 받은 세례 요한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세례(침례)받으면 죄사함을 받고 중생(거듭남)합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아담의 범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이후에 태어나는 후손들이 모두 ‘원죄’(죄를 짓는 그릇된 성향)를 가지고 태어나 일생동안 죄를 짓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 사망에 이르는 저주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5:12-14)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인간이 이 사망의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생명으로 죄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범죄함 때문에 사망이 찾아왔으므로 범죄의 대가를 치르고 죄사함을 받을 때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인간을 대속(대신 값을 치름)하려면 인간의 몸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소, 양, 염소, 비둘기 등 세상의 어떤 동물이라도, 또 아무리 많은 수 동물이라도 한 인간의 생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인간의 생명만이 그 가치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흠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흠없이 창조하신 것처럼 아무 흠이 없는 존재가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새 차를 파손했으면 피해자에게 새 차로 교환해 주어야지 중고차로 대신 보상하겠다고 말한다면 피해자는 이 제안을 당연히 거절할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인간의 대속을 위해서 두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이 조건을 만족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그러나 여느 인간과는 달리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서 원죄도 없고 아무런 흠결이 없는 인간입니다.

(벧전 1:18-19)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없고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는 없으시니라

 

인간이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기 위해서 흠없는 생명을 대신 제물로 드려야 하는 상황은 마치 어떤 노인이 돈이 없어서 빵을 훔쳤는데 재판관이 벌금형을 선고받고 죄값을 치러야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벌금을 낼 수 있습니까? 그 돈이 있었다면 이미 빵을 훔치지 않고 사먹었겠지요. 그렇다면 절도죄로 체포되어 재판받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퇴양난의 상황, 딜레마에 빠진 것이 바로 인간의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빠진 인간들을 위해 대신 죄값을 치르신 분이 바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21:24-25)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흠없는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흠없는 인간의 몸으로 오셔야 제물로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입으려면 대속(대신 값을 치르고 구함)하신 분과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그 관계란 십자가의 죽음의 효력이 개인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이 개인에게 미치려면 먼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받으신 것과 같은 세례(침례. 물에 잠기는 성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 세례를 통해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다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면서 올바른 세례를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모순이요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2:41) 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믿음으로 순종하고 세례를 받은 그 사람은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세례 받는 행위가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이는 표현이며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을 의로운 분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로운 분으로 인정하는 자(세례 받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을 가리켜 ‘칭의’(의롭다고 선언해 줌)라고 합니다. 이는 마치 옷이 더럽혀진 사람이 새로운 ‘흰 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처럼, 야곱이 형 ‘에서’의 옷을 입고 대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받은 것처럼 세례를 받으면 자기 죄의 수치를 가릴 수 있고 하나님께 복받을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침례)는 물에 완전히 잠겼다가 올라와야 하는데 이것은 정확히 세례의 정의와 일치합니다. 우리가 물에 잠기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같이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우리가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과 같이 우리도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처럼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어 죽을 수 없지만 예수님이 대신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세례를 통해 그분과 연합하면 죽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성례입니다.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세례는 이미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 20:22-23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시면서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해지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22-23)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윽고 오순절날 성령을 받은 후에야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주님이 위임하신 죄사함의 권세를 행했습니다. 성령은 교회가 사죄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일종의 면허증입니다. 도로를 주행하는 운전자는 면허증을 취득한 사람이어야 하듯이 물로 세례를 베푸는 자는 바로 약속의 성령(성령의 내주)을 받은 자라야 자격이 주어집니다. 만약 ‘물세례’를 베풀되 전신이 잠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며, 고개를 숙이는 바른 형태로 시행한다 할지라도 만약 성령의 내주가 없는 사람이 베푼다면 그 세례는 사죄의 효력이 없습니다. 이는 먼허증이 없는데 운전을 한다면 그것은 불법을 행하는 자이듯이 성령세례로 거듭나지 않은 자가 세례를 베푼다면 그것은 불법입니다. 또 성령이 계신 교회의 파송을 받은 자가 베풀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내려주신 보혜사 성령이 있어야 하고 성령이 임재하시는 교회로부터 파송된 자가 베푼 세례에 사죄의 효력이 있습니다.

(22: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 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세례는 성경이 제시하는 방법대로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형식과 내용은 모두 중요합니다. 형식없이 내용이 보존될 수 없고 내용없는 형식은 공허할 뿐입니다. 올바른 형식에 올바른 내용이 보존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의 과정과 형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적 올바른 세례는

 

첫째,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야 합니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회는 세례의 방법과 대상에 대해 논쟁해 왔습니다. 대부분의 일반 개신교는 마 28:19에 근거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행전의 내용과 조화되지 않습니다. 즉 행 2:38, 8:16, 10:48, 19:5의 내용에는 모두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모순된 것일까요? 한쪽의 기록은 선택하고 다른 쪽의 기록은 버려야 할까요? 우리는 성경이 모순되지 않고 조화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마 28:19의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이란 사실 ‘예수’라는 하나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해야 옳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 곧 예수. 아들의 이름, 곧 예수. 성령의 이름, 곧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다른 사도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여러 곳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인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8: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10: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19: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둘째, 흐르는 물에서 전신이 물에 잠겨야 합니다.

본래 세례는 온몸이 물에 잠기는 침례였고, 세례의 문자적인 의미도 또한 ‘물에 잠기다’라는 헬라어 동사 ‘밥티조’에서 유래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이디오피아 내시가 세례 받을 때, ‘물에서 올라왔다’는 표현은 이런 침례가 시행된 사실을 반증합니다.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8: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세례의 정의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성례라는 사실을 근거로 볼 때 물에 잠겼다가 올라오는 침례의 형식은 롬 6:3~5에 기록하고 있는 세례의 정의와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죽음이고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부활입니다. 이와 같은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세례를 받은 이후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의 모습과도 일치합니다. 바울 사도는 세례받은 자는 자신을 죽었다가 산 자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자로 여길지어다

 

세례받은 성도는 예배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배는 세례의 연장입니다. 예배란 죄 있는 성도가 주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사함받으며 그 결과로 주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소유한 모습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만약 예배의 은혜가 그렇다면 이는 죽고 다시 사는 세례의 정의와 일치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의미의 세례를 받은 자는 예배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삶을 지속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날마다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고백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세례의 정의와 의미로 볼 때 세례는 반드시 물에 완전히 잠기는 형태여야 합니다.

(3:10-11)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셋째,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세례는 뒤로 눕는 모양이 아니라 앞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양으로 받아야 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것은 죄인의 마땅한 태도이며 그분의 죽음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마지막 운명하시는 장면에서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 19:30). 예수님의 마지막 죽음을 자세히 묘사한 것은 그 죽음과 연합한 세례의 구체적인 동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세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는 성례라면 마땅히 그분의 죽으심의 모양을 본받는 형태여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을 때 머리를 숙이고 받는 것입니다.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