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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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하나님을 찾은 서순애 모매님

발걸음을 인도하심

저는 1954년 김제에서 태어난 서순애입니다. 30여년동안 천안 구성동에서 살고 있으며 현재 참예수교회 천안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 교회에 다니게된 동기와 하나님께서 제 병을 고쳐주신 것을 증거하고자합니다. 저를 이 자리에 있도록 이끄신 주님의 인도와 능력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14살정도부터 부모님을 따라 장로교회를 다녔습니다. 어머님부터 가진 처음 신앙을 버리고 새로운 교회로 옮길줄은 한번도 생각한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던 중 집안에 큰 시련이 찾아와 너무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 있을 때 오귀은 사모님을 통해 참예수교회를 알게되었습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영은회를 한다기에 자리만 채워달라는 사모님의 권유로 당시 5살짜리 손자인 성찬이를 데리고 구경을 갔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참예수교회에 갔을 때 그곳 교인들의 따뜻한 인사와 관심에 알 수 없는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스스로 다짐하기를 참예수교회는 영은회 할때만 가고 절대로 교회는 옮길 수 없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끌렸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손자 성찬이가 갑자기 이제는 참예수교회가 아니면 안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택시를 타고 다니던 교회를 가는데 성찬이가 기사님에게 참예수교회 쪽으로 가달라고 길까지 알려주며 소리질러 재촉했습니다. 그런 손자의 모습을 보고 제 마음이 많이 복잡하였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이 우리 주님이 제 마음을 움직이게 하신 놀라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을 받고 거듭남

성찬이 때문에 참예수교회를 계속다니면서 마음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적은 성도들의 찬양이지만 듣고 있노라면 왠지모를 마음의 감동이 밀려들어 스스로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되었습니다. 특히 저는 이전에 성경말씀도 나름대로 많이 통독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참예수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공부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부족한 저와 저희 가족을 받아주신다면 이곳에서 몸을 담고 열심히 헌신하며 살겠노라고 진심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지 오래지않아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들도 방언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간절한 마음으로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을 때 마음에 큰 성령의 감동과 뜨거움이 느껴지며 하염없는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지 모르겠지만 주님 속이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살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성경말씀대로 세례를 받고 온전히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심장 혈관이 막힘

성령을 받고 약 1년이 되었을 2012년 10월말쯤이었습니다. 심장에 부정맥 증세가 있어서 순청향 병원에 가서 검사해보니 심장 한 곳이 완전히 심하게 막혀서 급하게 시술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의사가 말했습니다. 12월을 넘겨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런상황에서 저는 하나님께 계속 기도하며 날짜를 미루어 왔습니다. 이제 나는 죽어도 주님의 자녀, 살아도 주님의 자녀이니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겠지 생각하며 주님께 맡기고 자주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목자님의 말씀을 듣고 안수기도를 받고나면 늘 마음의 평안함이 찾아왔습니다.
미루고 미루다 계속적인 증상과 가족들의 독촉등으로 시술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2013년 3월 27일 입원을 하여 다음날 시술하기로 했습니다. 막상 입원을 하니 저도 사람인지라 불안한 마음과 복잡한 생각이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는 모든 성도님들이 합심해서 기도해주시고 또 목자님이 저녁 시간에 병문안을 오셔서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서 안수기도를 해주실 때 온 몸이 사정없이 떨리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느끼며 감동 또 감동했습니다. 그때 그 느낌은 어떻게 표현할 수없는 벅찬 감격이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남

다음날 오후 1시에 수술에 들어가는데 간호사가 곁에 있던 제 아들에게 하는 말이 이 시술은 위험하니 어머님께 잘 격려해주시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 또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앞두고 하나님께 기도가 나왔습니다. ‘주님, 저 두렵지 않아요. 저의 생명이 다 되었다면 어쩔수없겠지만 조금더 넉넉하게 배려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님, 그동안 저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해요’ 하며 울며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다시 점검을 하신다는 말씀을 하시고 시작되었습니다. 잠시동안 요란한 소리가 나고 마취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잠시후 담당 교수님이 급히 저를 깨웠습니다. “서순애 환자 눈을 떠보세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네요. 막혔던 혈관도 뚤렸고 예전보다 더 깨끗하고 강심장이 되었네요” 의사도 믿기지 않는듯 놀라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보다고, 당신의 하나님이 고쳐주셨다고 말하며 축하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며 부모님께 잘 해드리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큰 기적을 체험함으로 제가 찾은 하나님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우주를 주관하시고 섬세하게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신다는 믿음을 굳세게 했습니다. 저의 믿음을 정금처럼 연단하신 하나님.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실천하는 좋은 자녀로 남은 삶을 살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지금은 성찬이 뿐만아니라 제 며느리도 함께 참예수교회에 다니며 날마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며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아멘

현재 며느님 이원선자매, 손자 성찬이와 보미, 모두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서순애 자매님과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의 사랑의 관심과 기도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심한 알콜중독에서 치유되다(Healed from Excessive Alcoholism)

안효상 역

약 7년전, 내가 하는 사업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은 술을 마셨고 도박을 즐겨 했다. 한번은 도시로 출장을 갔다. 한 친구가 나를 그의 집에 초대하였고 카드놀이를 함께 하자는 제안을 했다. 도매 상품을 구매하는 일 대신 난 그와 함께 카드 놀이를 했다.

그런데 결국 그것이 7일 낮 7일 밤 동안 그의 집에서 머무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이 때 우리는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 우리는 오로지 와인을 마시며 갈증을 풀었다.

7일째 되던 날, 나는 집에 가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는 카드 놀이에 참가할 또 한 사람이 올 것이라며 날보고 더 있다 가라며 설득했다. 그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한 시간 가량 수영을 하러 밖에 나갔다. 수영을 하고 난 후 지치고 배가 고파 물에서 나와 새우를 와인에 담구어 먹었다.

그런데 약 20분 후 먹었던 모든 것을 다 토해버렸다. 기다렸던 사람은 도착했고 우리는 다시 카드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약 두 판 정도가 진행된 후 난 너무 힘이없어 과일과 함께 와인을 몇 잔 더 마셨다.

그런데 갑자기 졸음이 왔고 식은땀이 흘렀다. 털이불을 5개나 덥었는데도 몸이 벌벌벌 떨렸다.

친구는 걱정이 되어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의사는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곧 영안실로 데리고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백혈구 수치가 너무 높아 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다행히 회복이 되었지만 의사의 경고를 들으니 술을 마시는 것이 두려워졌다.

하루는 결혼식에 참석해서 맥주를 마셨다. 그러나 신부 아버지집에 도착할 때 쯤 쓰러졌다. 그리고 응급차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 날 결혼식은 처제의 결혼식이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결혼식에 가려고 했다. 도착했을 때 물 한잔을 마셨지만 몸이 다시 힘이 없어짐을 느꼈다.

의사는 아내에게 내가 간경화가 너무 심하여 회복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잘 하면 3년 정도 살 것이라고 했다. 이후 나는 알콜중독자 보호치료소에서 41일간 지내야했다.

그곳에서 나온 뒤 약 4개월간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한번은 이웃과 사냥을 갔는데 술을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의 술 중독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나는 와인 6병을 단 2시간만에 마셔버렸다.

밤에 나를 문 모기들이 내 피속에 있는 알콜에 취하여 기절한 것 까지도 보았다. 난 가정생활과 일도 게을리 하였고 오직 술을 위하여 살았다.

결국 아내는 아무말도 없이 나를 떠났다. 매일 난 너무나 취해 있었고 나중엔 가족들이 모두 다 집을 나갔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만일 내가 이 집에서 갑자기 죽어도 아무도 내가 죽었다는 것 조차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너무나 불안해졌다. 그래서 나는 집을 팔고 다른 도시로 사업을 하러 이사를 갔다.

그러나 나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약 6개월 뒤엔 몸을 벌벌 떨지않고서는 단 몇 걸음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그 도시에는 참예수교회에 다니는 형제 한 명이 살고 있었다. 그는 나의 상태를 보고서 함께 교회에 가자고 청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병을 치유해주시기 바라며 … 참예수교회에 정기적으로 나가면서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다. 세례를 받기 약 4~5일 전 나는 성령을 받았다.

내가 참예수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날은 1981년 11월 1일이었다. 그런데 세례식 전 한 친구가 와인을 마시자며 나를 유혹했다. 난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 술 이라고 생각했다. 난 두 병의 술을 마셨지만 단 다섯 걸음을 걷기도 전 마신 모든 술을 다 토해버렸다. 얼굴이 온통 빨개졌고 사람들은 내 몸에서 술 냄새를 맡았다.

그래도 하나님은 날 불쌍히 여기셨다. 내가 세례를 받던 날, 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았다. 세례를 받은 후에도 난 나의 죄를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으로 이후 나는 완전히 치유되었고 축복 받았다.

지금 나의 삶은 안정되었다. 나는 교회 일에 열심인 사람이 되었다. 날 떠났던 아내도 돌아왔다. 아내는 나에게 참예수교회의 신학 교육 과정에 참가하라며 성경말씀 중 이해가 잘 안가는 부분도 나에게 가르쳐주곤 한다.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구해주시고 나에게 또 한 번의 삶의 기회를 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린다.

할렐루야! 아멘.

나를 회복시켜주신 하나님

간증자 Esther Chiew 자매 (참예수교회 캐나다 밴쿠버 교회)

현실감각의 상실

지난 해는 나의 인생에 가장 힘들고 거친 한 해였다. 그렇지만 또한 가장 축복받고 기쁜 한 해 이기도 했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건강과 온전한 정신에 진정으로 감사드린다. 난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서 있다면 어떠한 일이 우리앞에 닥쳐도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2009년 여름 나는 불면증으로 고생하기 시작했다. 난 병원에 갔고 의사는 나에게 아주 강한 수면제를 지어주었다. 그러나 몇 달 뒤 나는 다시 의사를 찾아가 새로운 약을 처방 받아야 했다. 수면제 복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약에 내성이 생겨 다시 불면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8월말 몇 일간 잠을 자지 못하고 나면서 내게 수면 부족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의 현실에 대한 감각은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나는 밤이나 낮에 대한 대한 감각, 시간이나 날짜에 대한 감각마저 없었고 심지어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상상인지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엄마와 여동생은 내게 뭔가 분명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를 계속 감시하며 내가 괜찮은지를 확인하려 했다. 난 점점 더 나 자신이 나 같지 않았고 내 몸이 마치 빈껍데기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들 말고도 나는 먹지도 못했다. 엄마와 여동생은 나를 앉혀놓고 강제로 음식을 먹였다. 나는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내가 하는 행동이라고는 오직 어떤 곳을 반복해서 치우고 또 치우는 것이었다. 마치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난 대학의 마지막 학기 수업을 신청해 놓았고 수업에 필요한 책도 다 사놓은 상태였다. 9월이 다가오고 있을때는 학교로 돌아가야 할 시간 이었다. 그러나 수업 첫째날 엄마는 내가 혼자 학교에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엄마는 나를 학교까지 차로 태워다 주었고, 수업에 들어가는 대신 나를 학교의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많은 간호사들과 의사들, 그리고 심리학자들이 나를 검사했다. 그들은 내가 시간·장소·관계에 대한 인지능력을 잃었고 그래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이 몇 일 인지도 모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누구도 나에게 정말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저 내가 지금 심각하게 치료가 필요하다고만 말했다.

자아의 상실

얼마 후 나는 내가 모르는 어떤 방에서 일어났다. 엄마는 나를 밴쿠버 종합병원에 데려 갔고 나는 환자로 등록이 되었다. 나는 굉장히 피해망상적이었다. 내가 어디 있는지 몰랐고 그저 병원 사람들이 나를 가족으로부터 떼어놓아 데려가려고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난 나를 잡아놓을까봐 내 이름을 말하는 것도 거부했고 내 친구가 누구인지 내 가족이 누구인지 인정하는 것조차도 거부했다.

나는 약을 먹는 것도 거부했기 때문에 간호원들은 강제로 내가 약을 삼키도록 해야 했다. 난 먹는 것도 거부하며 엄마가 직접 나에게 강제로 밥을 먹일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음식에 독이 들었거나 약을 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먹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면회 허용시간마다 나를 보러 왔다. 난 엄마의 고통과 피곤함을 볼 수 있었지만 엄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를 보러 오셨다. 매일 밤 엄마는 내가 잠들었다고 생각될 때까지 찬송을 부르시며 흐느끼셨다. 이것은 참으로 큰 어머니의 사랑이었고 이러한 사랑을 나에게 보여주신 엄마께 나는 영원히 감사한다.

병원에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었으므로 나는 어느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나의 삶은 그저 먹고, 복도를 아래 위로 걸어 다니고, 부모님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에 한정되어 버렸다. 난 아무런 도움도 바랄 수 없다고 느껴졌다. 난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나 혼자 목욕을 하지도 못했다. 엄마가 매일 나를 먹여줘야 했고 씻겨줘야 했다.

병원에 있는 어떤 사람도 나 같지는 않았다. 나의 얼굴 외에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나의 성격과 인격도 사라졌고 믿음도 사라졌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은 마치 먼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유령이 된 기분이었다. 마치 존재만 하고 있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힘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난 나의 삶, 현실, 믿음,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졌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이 때쯤 나는 다른 병동으로 옮겨졌고 그 병동은 내가 전에 있던 병동보다 좋지 않았다. 더 오래된 병실에 더 추운 온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주변의 환자들로 나의 피해망상증은 더욱 심해졌다. 나의 삶을 이제 그만 끝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고통이 너무 심해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내 몸에 자해를 시도했다. 내 몸을 피가 나도록 할퀴었고 목에 고무 밴드나 수건을 묶기도 했다. 심지어 보도에서 뛰어나가 지나가는 차에 몸을 던지려고도 했다.

나는 내가 무슨짓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 자신을 육체적으로 학대하고 있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난 이미 고통에 무감각해져 있었고 내 마음은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엔 이젠 너무 힘들 것 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난 왜 내가 병원에서 삶을 끝내려고 하는지 이해하려고 해봤다. 이러한 벌을 받게 만든 나의 죄와 실수들을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난 처절했고 희망이 없었으며 죄의식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무 가치 없다고 생각되었다.

난 21년간 내가 믿었던 하나님이라는 분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지 못했고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마저 의심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어떻게 기도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자해하여 나의 삶을 끝내려는 생각만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나 이런 나의 심리상태에서도 이 모든 것은 결국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셨기에 나는 그러한 위험의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 구도자였던 아버지께서 하루는 나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말해주셨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내게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사랑하시니 나는 포기하면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는 그것을 생각하기에 너무나 길을 잃은 상태여서 이해되지 않았지만 뒤돌아보면 구도자였던 아버지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알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감사 드린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많은 검사를 통해 의사들은 내가 갑상선 기능 항진장애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병은 갑상선에 문제가 생겨 일어나는 병인데 실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병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증상들은 불면증, 불안증, 과대망상과 같은 것들이었는데 이유는 갑상선이 너무 많은 호르몬을 생성해서 그렇다고 한다.

기도와 약으로 내 상태가 호전되면서 나는 조금씩 병동을 나가 있어도 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나의 행동에 따라서 내가 한 시간, 두 시간, 또는 네 시간 정도를 부모님과 함께 밖으로 나가도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병원에서는 내가 밤에 밖에서 잠을 잘 수 있게 허락해 주었고 나는 집안의 내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증상의 호전과 치료에도 회복은 더디고 어려웠다. 내가 집에 있을 때 칼이나 가위를 목에 대었던 것도 기억한다. 또한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갑자기 공황발작이 시작되면서 밀폐된 공간에 두려움을 느끼는 증상도 나타났다.

난 부모님께 차를 세워달라고 하면서 나를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자동차가 주행중 인데도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했다. 증상이 너무 심해져 아버지나 어머니 한 분은 내 바로 옆에 앉아 나의 손을 잡고 있고 다른 한 분은 운전을 해야했다.

이것은 우리 가족에게 시험의 시간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고 믿는 것 뿐이었다.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나는 부모님 외에 그 누구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거나 나의 상태를 아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병원에 있는 나는 결코 진짜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참예수교회 형제 자매들은 나를 정기적으로 찾아와 주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있던 병실의 환자들은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나를 질투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날 보러 온 형제자매들은 내게 관심을 쏟으며 걱정해주었다. 그들을 보고 있으니 내가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 생각났다.

참예수교회 형제 자매들은 병문안을 마치고 떠날 때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 처음에는 난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지도 못했다. 나는 피해망상이 너무 심해 눈을 감지도 못했고 한 곳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 앞에 내가 나아가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고 난 그럴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 나를 방문해 줄 때마다 나는 조금씩 눈을 감고 그들과 함께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었다. 그들의 방문은 나에게 사랑하는 참예수교회 형제자매들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간증이 되었다.

매일 부모님은 나와 함께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셨다. 또한 내 방의 작은 오디오로 조용히 찬송가를 틀어놓기도 하셨다. 난 부모님께 찬송가를 꺼달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틀어놓으셨다. 결국 나는 찬송가를 들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다.

나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화가 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내가 얼마나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정말 부끄럽다. 참예수교회 성도들의 지속적인 방문과 부모님의 사랑으로 나는 다시 희망과 믿음을 갖게 되었다. 병원에서 한달이 지난 후 감사하게도 퇴원해 집에 가도 좋다는 결과를 받았다.

하나님 의지하기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금식까지 하며 기도해 주었는지 알게 되었다. 나를 위하여 중보 기도해 준 모든 사람들, 하나님께 나를 향한 사랑과 기도들을 잊지 말라 간구한 그 모든 기도들에 나는 너무나 감사드린다.

너무나 무서운 시간이었지만 이 시간을 통해 모두 하나님은 진실로 좋은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지 않았다면 난 분명 이 싸움에서 지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면 난 계속해 싸워나갈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안에 남아있는 믿음을 계속 붙잡았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안전히 돌보아 주셨다.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곳에 계셨다는 것을 나는 본다. 내가 혼자라 생각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돌보시며 나 대신 전쟁에서 싸워주신 것이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라 하고 (신명기 31:6)

나는 이제 아주 잘 지내고 있다. 나는 나의 삶과 학교, 내 주위 모든 사람들을 사랑한다. 난 잘 자고 잘 먹고 예전보다 더욱 기쁘게 교회에 다닌다. 찬송하며 기도하고, 설겆이 할 때에도 이런 모든 것들을 다 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내가 아프기 전 교회 안에서 내게 주어진 책임들을 감당하는 것이 나에겐 큰 부담이었고 그래서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예전에 하기 싫은 일처럼 느껴졌던 것들이 모두 나에게 기회와 축복 그리고 특권처럼 생각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정말 너무나 중요하다. 그리고 그분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정말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 나는 이번 경험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배우고 자라날 것이다. 난 이제 삶에는 행복, 슬픔, 시험, 환란, 승리, 축복, 징계, 평안, 문제들이 모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편 40:1~2)

만일 우리가 어두움에 빠지지 않고 넘어지지도 않고 어떤 문제도 겪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 빛의 아름다움과 놀라움을 볼 수 있을까? 어떻게 그가 우리를 들어올려 반석위에 서게 하실 수 있을까? 어떻게 그가 우리의 놀라우신 구세주가 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우리가 어떠한 문제도 겪지 않고 삶이 늘 순탄하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당신이 고난 중에 있을 때, 그래도 기댈 수 있는 반석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그 구덩이에서 다시 나올 수 있도록 당신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바로 당신 옆에 있다는 것 일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출처: 참예수교회 미국총회 발행 Manna 63호

남편의 백혈병이 나았다

간증자 강경화

남편이 32세 때 일입니다. 교회에 앉아 예배를 보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습니다. 바로 옆에서 삼촌이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남편이 졸다가 그런 줄 알고 깨웠습니다. 그때 남편은 바로 일어났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어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청진기를 들이대는 순간 기절을 했습니다. 의사는 놀라서 급히 혈액 검사를 했고 그 결과 피에 균이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남편이 백혈병에…

바로 남원의료원 응급실로 갔고, 일주일만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때 백혈병이라는 말은 영화나 책으로만 접했고, 백혈병이 혈액암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치료하면 낫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일주일 후에 대학병원에 후송되었는데, 그때 당시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27세였는데 의사나 인턴들이 다 저를 보고 안 됐다는 듯이 혀를 차고 갔습니다. 그러나 같이 온 목자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권면 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다시 재검사를 요구했지만 역시 백혈병으로 진단이 나왔습니다.

2차 치료까지 끝나고 그 병실의 9명 환자가 똑같이 약물 치료에 들어갔는데 남편의 균만 잘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3차 치료까지 갔지만 3분의 1 정도의 균이 남았다고 하면서 좀 심각하다고 의사가 말했습니다. 2차 치료가 끝나자 포기하는 마음이 생겼는데. 그때 하나님이 꿈으로 보여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2-3차의 치료기간은 두달 정도였는데 5번 정도의 꿈을 꾸었고, 이때부터 하나님께만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입원한 6병동은 암치료 센타였기 때문에 죽어 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었고, 치료 중에 저도 5번 정도 충격을 받고 기절하기도 했습니다. 4차 치료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항암제가 받지 않고, 간호하는 동안에 열이 40도까지 올라가 사람을 얼음 바닥에 굴리기도 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균이 있기 때문에 과일까지도 삶아 먹여야 했습니다. 면회도 사절하고, 마스크를 네 달 동안 사용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 모두 토하고, 약물이 들어가면 10분도 안되어 다시 토했습니다.

저는 매일 기도를 했습니다. 치료 기간은 네 달이었는데, 외출하면 균이 붙을 염려가 있어서 외출할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남편 손부터 잡아 보았습니다. 손이 따뜻하면 살아 있는 것이고 차가우면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손이 좀 차가우면 살며시 코에 손을 대 보았습니다.

기도하자 하나님의 역사가

암 환자가 죽을 때는 몸이 새파래지면서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고통이 심하다고 했습니다. 신앙 생활도 열심히 하고 아직까지 하나님 앞에서 큰 죄 지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가혹한 형벌을 받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남편이 받은 형벌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나중에는 나 자신 때문에 받은 형벌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차츰 뒷정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밤에 병원밖에 나가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병원에 있으면 환자보다 보호자가 더 힘이 든다고 합니다. 환자를 보살펴야하고 환자가 낙심하지 않도록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야 했습니다. 잘못하면 둘 다 죽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 부분을 기도했습니다.

그 당시는 하나님만 붙잡고 있으면 낫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배실에서 기도하고 찬송을 했습니다. 약물 치료를 하고 꿈을 꾸었는데 신기하게 남편도 똑같은 내용의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남편이 죽고 상여가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흰옷을 입고 나타나 저를 툭 치면서 “울지마. 나 여기 있어. 살았잖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장로님 사모님이 면회를 오셨는데 “남편은 살 거야”라고 하셨습니다. 꿈을 꾸셨는데, 포도나무가 흐물흐물하게 껍질이 다 벗겨진 상태가 되었는데 다시 그 줄기에서 새 싹이 파릇하게 돋아났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틀림없이 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전국 교회에서 특별 기도를 해 주셨고, 특별히 남원교회 신도들이 여러 차례 금식하며 기도해 주셨는데, 이 금식 기도가 끝난 후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당시 10일에 120만원 정도의 병원비가 나왔는데 청구서가 나오면 바로 내야 했습니다. 계산을 하지 않으면 치료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집도 팔려고 내 놓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다른 환자들에는 “기적이 있으면 나을 것이다”는 말을 하면서도 우리에게는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열이 내려가지 않으면 영안실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빴습니다.

저는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을 치료도 안 해주고 영안실로 내려가라고 그럽니까? 죽어도 여기서 죽을 테니까 치료를 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의사는 “9명 중에서 가장 희망이 없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병원비는 다시 다 내줄 테니까 이 사람을 병원에 맡기고 의학 발전을 위해 쓰게 해주세요. 앞으로 부인이 살기도 곤란할 테니까 800만원 받고 넘기세요”라고 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신앙이 없었더라면 남편은 죽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아찔합니다. 간호를 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느낌이 없었다면 병원에 맡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 데려 간다해도 남편만은 데려가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에게 죄 지은 것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지금까지 하나님께 크게 죄악된 행동을 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니야, 분명히 죄를 지은 것이 있으니까 우리에게 이런 고통이 오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혹시 교회에 기적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셨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백혈병이 나음

남편은 병원에서 퇴원할 때 자신이 걸어서 나가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나오니까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병원에서 남편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고, 힘이 없어 휠체어를 타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퇴원해서 6개월 동안 음식을 삶아 먹는데, 이것은 영양가가 없는 것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분명히 느낀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힘은 전혀 소용이 없었고 오로지 하나님의 힘이 전부였습니다. 그 이유는 백혈병 환자가 있을 경우 2년 안에 모두 죽었기 때문입니다. 살 가망이 많다는 환자는 다 죽어서 근처의 상가 집을 세 군데 정도 다녔지만 가망이 없다던 남편은 나았습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남편은 퇴원해서 오히려 상태가 좋아졌는데, 항암제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회복이 빨라진 것 같습니다. 병원에서 준 약을 쓰지 않으면 열이 내려가는데 약만 사용하면 열이 났습니다. 병원에서도 놀라면서 이런 환자는 연구하고 싶은 환자라며 체질적으로 실험하고 싶어했습니다.

퇴원해서 새벽기도를 계속 했습니다. 처음에는 살려 달라고 매달렸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들면서부터는 살려 달라는 기도보다 하나님께 맡긴다고 기도했습니다. 남편을 데리고 가시려면 데리고 가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마음 편히 기도했습니다. 남편은 그 당시 40세까지만 살게 해 달라고 했는데, 현재 나이가 41세입니다. 지금은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TV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지만 남편은 그것이 무슨 자랑이냐고 하면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사진을 찍어 놓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 사진을 보여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서 퇴원한지 2년 후 균이 전혀 없다고 하면서 5년 정도는 더 살 정도라고 했지만 지금 햇수로 10년이 넘었습니다. 남편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입니다.

폐결핵이 나았다

간증자 김영생

군대 가기 전에는 믿음 생활하면서 농사를 짓고 집안을 도왔습니다. 1958년 군대에 갈 때는 하나님의 은혜로 남들이 들어갈 수 없었던 카투사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카투사에 가려면 든든한 빽이 필요했었습니다. 제가 간 부대는 카투사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이었는데, 시설이 좋아서 극장, 도서실, 오락실도 있었습니다. 카투사는 극장이 무료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일이 끝나면 극장에 갔지만 저는 성경책을 들고 도서실을 찾았습니다.

군대에서 믿음이 떨어짐

그러나 그곳에 오래 있다 보니 극장에도 가게 되고 믿음도 약해졌습니다. 토요일 오후에는 대방교회의 전신인 신길동 교회에 예배를 보러 갔지만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 먹게 되고, 놀러도 나갔습니다. 저에게는 세상 친구들이 있고 젊음이 있고 돈이 있었습니다. 술집에도 많이 갔지만, 여자를 볼 때는 머리 속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성경 말씀이 생각나 멀리 했습니다. 나중에는 술을 주전자로 하나 시켜 혼자 먹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술이 받는 체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술을 먹도 돌아오는데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시간을 술 먹고 비틀거리며 쓸데없이 소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어 걸어 놓으려는데 성경 책이 보입니다. 스스로 “너는 누구냐?” “하나님의 자녀다” 하며 자문자답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들면서 여기 있으면 신앙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환경에 있었던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던 것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폐결핵이 나음

어느 날 금촌이라는 곳에 기동 훈련을 나갔는데 갑자기 기침이 심하게 나오고 힘이 빠졌습니다. 일주일 동안 산 속에 있었는데 밤에 차 엔진을 끄면 아침에 시동이 안 걸리기 때문에 시동을 끄지 못하게 해서 밤새 건조한 히터 바람을 쏘이고 커피를 마셔 가며 있다 보니 몸이 안 좋아졌습니다. 식사도 잘 못한 상태에서 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돌아왔습니다. 몹시 아프고 열도 많이 나서 밥도 못 먹고 누워 있다가 병원에 가 엑스레이를 찍어 보니 폐 반절이 거의 먹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폐결핵 전문 병원에 가서 10개월 정도 치료를 받았습니다. 제가 걸린 병은 폐결핵인데, 균이 강해서 이 균을 죽일 수 있는 약은 없고 다만 번지지 못하게 하는 약을 먹을 뿐이었습니다. 치료하던 의사는 더 이상 번지면 위험해 지니까 폐를 떼어내야 한다고 했고, 이 수술을 해도 25퍼센트만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있으면서 성경을 많이 읽었고, 신앙이 많이 회복되어서 그런지 집에 가서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하면 건강해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집에 가서 치료를 하겠으니 제대를 하겠다고 신청을 했습니다.

1960년 10월에 제대를 하고 집에 와서 약은 전혀  먹지 않고 저녁마다 30분씩 찬송을 했습니다. 곡도 잘 모르지만 나도 모르는 감격에 눈물을 흘리며 기쁨으로 찬송했습니다. 놀랍게도 그후로는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병에는 찬송이 특효약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대한 후에 누워 있지 않고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믿지 못했습니다. 제가 제대를 하고 집에 왔을 때 저를 본 사람들은 “살 수 없다”고 거의 장담을 했었는데 즉시 건강해져서 일까지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치는 것으로 인한 축복

병원 치료를 하면서 “하나님이 저를 살려 주시면 앞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서원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니 지식이 없어서 목회자로 나설 수는 없을 것 같아 돈을 벌어 간접적이라도 교회 일을 도와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당시는 농촌 경제가 어려워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저는 마음을 단단히 하여 생활비를 아꼈고, 고기가 먹고 싶어도 그 돈을 교회에 바치려는 생각으로 참았습니다.

전주교회 회당을 서학동에서 평화동 사거리로 옮겨 지을 때, 대충 계산해 보니 현금 4억만 있으면 건축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얼마를 바칠까 생각하며 기도하다가 논을 팔아 1억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당시 제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고, 이전에 남들 보증을 서준 관계로 집과 논 646평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독자 이삭도 아낌없이 바친 것과 신앙인으로서 본을 보여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결정했습니다.

팔려고 내놓았지만 그곳에 소방도로가 지나간다는 말이 있어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결국 전체가 팔리지 않고 우여곡절 끝에 3분의 1인 208평을 평당 50만원에 팔아서 건축  헌금을 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땅값이 올라 평당 90만원에 팔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어 소방도로가 필요 없어지자 땅값이 갑자기 오른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하나님이 왜 이렇게 어렵게 팔리게 하실까?’ 하며 의아스럽게 생각했지만 만약 처음부터 전체가 다 팔렸더라면 이런 시세는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계획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쁨으로 바쳤을 때 바친 사람에게도 형통함을 주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중에 팔린 것으로 일부 감사 헌금을 하고 목돈을 쥐게 되자 ‘이 돈을 가지고 다시 투자하면 큰돈을 벌 텐데’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이때 “탐욕은 우상숭배”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장로가 되어서 “어디에 투자해서 얼마를 벌었다”는 식으로 생활하고 얘기를 한다면 신도들이 어떻게 볼까 하는 자책감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난 농민으로서 농사짓고 살았기 때문에 세나 받아 먹게 논을 사 달라”고 부탁을 했고, 여지저기 대상지가 나왔지만 막상 성사가 되지 않아 최종적으로 죽산쪽의 논을 사게 되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엄청나게 잘한 것이었습니다. IMF가 올 줄은 몰랐지만 와 놓고 보니까 그 논의 시세가 배로 뛰었습니다. 그리고 1년에 쌀이 100가마 정도 나오기 때문에 세를 받아 충분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땅을 소개해 주신 분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아무런 경제적인 문제없이 교회를 도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을 찬송합니다.

병이 나은 은혜

간증자 한보덕

우리 집은 모두 불교를 믿어서 밤낮 불공드리고 칠성당에 가서 빌고 그랬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제가 대대로 칠성당에 다녔습니다. 남편은 6.25사변 당시 군대에 들어가 있었고 저는 시부모를 모시고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먹을 물이 없어 땅에 고인 물을 먹고 해서 많이 아팠고, 강원도에 배치되어서는 산에 굴을 파고 포장을 치고 거기서 근무를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군대에 가서 살아 나온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남편은 연기로 인한 기관지병이 심해서 제대를 했습니다.

믿은 후에 남편이 좋아지다

남편이 이렇게 아팠지만 지금과 달리 당시는 병원도 없어서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약이나 지어다 줄뿐이었습니다. 기침을 많이 하고 해소 증세가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병세가 심해져서 일도 못하고 그냥 집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남편이 이렇게 아파 일을 못했기 때문에 생활을 꾸려 가는 것은 제 몫이었습니다. 지게도 지고 나무도 하고 농사도 지었습니다. 시댁은 대대로 불교를 믿는 집안이었는데 아무리 불공드리고 칠성당에 가서 빌고 해도 남편이 계속 아프니까 종교를 바꾸자고 했습니다.

제 동생이 사는 옆 동네가 여우치였는데, 그곳에 허수진 목자님의 이모님이 사셨습니다. 그분이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 친정 어머니는  병이 있어 머리에서 냄새가 나고 고름이 흘러 수건으로 머리를 감고 다녀야 했습니다. 병원에 가도 안되고, 점을 치고 굿을 해도 안 되길래 교회에 가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장로교회에 갔는데도 낫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딸집에 들렀을 때 허수진 목자님이 전도를 한 모양입니다. “저희 교회에 나오시면 이런 것 문제없이 낫습니다. 나오시죠”

이렇게 전도를 받아서 그 집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그분 남편이 박명복씨였는데 박명복씨 부인은 성령과 세례를 받고 그 머리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아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제 동생 시어머니가 알고 우리를 권해서 제가 남편을 부축하고 간 것입니다. 남편은 내려 갈 때는 겨우 걸어 갈 수 있지만 올라 갈 때는 힘에 부쳐 제가 업고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배에 참석하고 저녁에 집으로 올라 올 때 남편이 혼자 걸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예배 때는 나보다 더 서둘러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집안 일과 바깥일을 다 보고 다녀야 하니까 힘이 들고 바빴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당신이 먼저 다니고 나는 뒤에 따라 다니겠다”고 말했습니다. 계속 집회를 하는데 남편이 언제부터인가 저녁 때 안 가고 다음 날 안식일 오전에 갔습니다. 안식일 날 갔더니 명복이 엄마와 딸이 같이 성령을 받아 방언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자 “저 사람들은 얼마나 믿음이 좋길래 하나님께 성령을 받아서 저런 기도를 할까?”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남편은 저보다 더 교회에 잘 나갔고, 몇 개월 되지 않아 같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성령이 바로 내렸고 그렇게 기쁠 수 없었습니다. 남편도 성령을 받았고 그후부터 몸이 점점 나아졌습니다. 몸이 전보다 안 좋을 것 같으면 목자님을 청해 안수 기도를 받으면 다시 괜찮아졌습니다. 하여튼 금방 죽을 것 같았던 사람이 15년은 더 살았습니다.

그래서 남편 때문에 여우치에서 전도가 많이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남편을 보고 “저 사람 예수 믿더니 서울도 가고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는 것 봐”라고 하면서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가까운 곳도 잘 못 다니던 사람이 멀리서 영은회를 한다고 해도 다 쫓아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도 좋아지고 은혜도 많이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 믿더니 완전히 나았다고 할 수 밖에 없었고 전도가 많이 되었습니다. 당시 그 작은 동네에서 교회 신도가 한 70명쯤 되었는데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영은회 때마다 오는 시험

교회에서 영은회를 하려면 전주에서 시장을 봐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밤낮 사흘을 하기 때문에 이 기간에는 집안 일을 전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영은회 기간이 돌아왔는데 용주의 형인 큰아들이 아파 몸이 불같이 뜨겁고 죽을 것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마 “네가 나를 더 섬기는가 네 아들을 더 섬기는가 보자” 하고 시험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들이 아파도 내버려뒀습니다. 시골은 약국도 없고 전주나 가야 있는데 60리나 되는 먼길이었고, 영은회에서 한 사람이라도 빠져나가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하나님 일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영은회 점심 시간이 끝나 집에 와 봤더니 믿지 않는 제 동생이 와서 이것을 보고 “언니는 아들이 죽어 가는데 교회에 미쳐서 그러고 있어?”하고 야단을 합니다. 저는 “나 미친 것 아니고, 아니는 안 죽어. 걱정하지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업고 교회에 와 오후 예배 때 안수를 받게 했더니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다 나아 뛰어다니며 놀았습니다. 그때 큰아들 나이가 열 서너 살 정도였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영은회를 할 때만 되면 큰아들이 다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저는 “네가 하나님을 더 섬기느냐, 아들을 더 섬기느냐”하고 하나님이 시험하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더 섬긴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고통을 면하게 해 주실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정말 아픈 것이 나았습니다. 안수 기도를 받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믿음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으로 진실로 믿었을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큰아들이 아프면 교회 가서 안수 받아 낫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것은 어려서부터 그런 체험이 아주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마귀를 섬겼던 집안이기 때문에 믿으면서도 고통이 많았습니다. 과거에 섬겼던 마귀가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녁 내내 남편과 함께 찬송가 한 권을 다 부르다시피 합니다. 기도하고 성경 읽고 찬송 부르고 또 기도하고 말씀 읽고 그러면 마귀가 다 물러가 버립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집안에 큰 은혜와 영광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무릎을 꿇게 되다

저는 다리가 아팠습니다. 산후 조리를 못해서 산후풍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쪼그리고 앉아서 밭일을 못했고, 조금 무거운 것을 들거나 많이 걸어도 다리가 저리고 아팠습니다. 그래서 무릎 꿇고 앉아서 예배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믿은 지 2년 정도 지났을 때인데 ‘내가 하나님 앞에 무릎도 꿇지 못하고 어떻게 은혜를 받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하나님 앞에 바쳐야겠다고 결심했는데, 무릎을 꿇으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점심 먹고 오후에 예배 보러 가서 무릎을 꿇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무릎이 아파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나 한번 결심한 것이니 계속 무릎을 꿇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예배를 드리러 가서 무릎을 꿇어 보니까 무릎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고 그 뒤부터 저는 계속 무릎을 꿇고 예배를 보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죽음

하나님을 믿고 남편의 건강이 많이 좋아져서 15년 정도 생명이 더 연장되었지만 결국 하나님이 데려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느 해 봄에 남편이 많이 아팠는데 저는 하나님께 남편이 건강하게 해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하나님이 안 받아 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면 충만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서웠습니다. 이렇게 며칠 기도하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서울에 있는 자녀들에게 다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실 것 같지 않았는지 저에게 “급하지도 않는데 내려오라고 했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녁에는 “남편의 영혼을 데려 가시려면 육신을 고생시키지 마시고 빨리 거두어 가십시오. 하나님이 필요하시니까 불러 가시려는 것 아닙니까!” 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하자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기도가 충만히 나오는 것이 하나님 뜻에 맞는 기도를 한 것 같았고, 아이들도 제가 기도하는 것을 보니까 하늘로 올라갈 것 같더라고 하면서 그렇게 충만하게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남편이 하늘 나라로 먼저 갔습니다. 이렇게 남편을 보낸 후에 제 믿음은 더 굳어졌습니다. 아픈 남편이었지만 집이라도 봐주고, 불이라도 켜주고 해서 힘이 됐는데 이제는 세상에 없으니 하나님만 더욱더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2남 7녀 가운데 큰아이들은 서울로 가고 어린아이들 넷을 데리고 살았는데 그후로는 기도를 참 열심히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마을에 마르개댁이라는 택호를 가진 여자가 있었는데 아픈 곳이 많았고 눈이 잘 안보였습니다. 이전에 교회에 나오라고 몇 차례 찾아갔었고, 교회에서 봄 영은회를 할 때는 목자님을 모시고 또 찾아갔습니다. 그 집에서는 이틀 후에 굿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이렇게 찾아가자 목자님을 대접하는 의미에서 한번 참석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교회로 가면서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교회로 가야하나, 굿을 해야하나?’ 그랬더니 교회 쪽에서 십자가가 번쩍 번쩍거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도착해 보니까 번쩍거리던 십자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 밑에서는 분명히 보였는데……

원래는 잠깐 참석했다가 집에 가서 굿을 하려고 했었는데 영은회 삼일을 꼬박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영은회 끝나는 날 세례식에 따라가더니 자기도 세례를 받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깨끗한 세례복을 입고 물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죽은 듯이 넘어져 혼수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례 받으려고 하니까 아마 사탄이 때려 친 모양입니다. 이것을 보고 목자님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사탄아 물러가라”고 기도하니까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고 난 후에 너무 좋아 펄펄 뛰었습니다. 몸이 가뿐하고, 이제까지는 눈이 어른어른하게 잘 안보였는데 환하게 보였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하고 전도를 많이 했고, 지금까지 믿음 생활 잘 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교회에 나오는 여신도 며느리가 유방암에 걸렸습니다. 이전부터 교회에 나가자고 권했던 터라 며느리에게 “교회에 나가 좋은 말씀도 듣고 세례 받고 성령 받으면 그런 병은 나아버린다. 교회 가자”고 했습니다. 며느리는 그래도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교인들이 찾아가 전도를 한 결과 영은회 기간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 다니면서 믿음이 생기자 세례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는 순간에 가슴에서 무언가 툭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유방암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할렐루야!

지금 이적기사가 별로 없다고 하지만 기도가 부족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때는 병원도 없고, 그래서 의지할 것이 없어 하나님만 의지하니까 이적기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제 큰손자 선중이 이야기입니다. 지금 16살인데(1998년 현재), 그 아이는 인큐베이터 안에 15일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눈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입원시켜야 한다고 했는데, 큰아들이 며느리에게 “그 아이 데리고 어머니한테 데리고 가서 세례 바쳐. 그러면 저런 것 싹 없어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가 아이를 데리고 제가 있는 곳에 내려와 목자님에게 세례를 바쳤습니다. 그러니까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나아버렸습니다. 병원에는 한번도 안 갔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렇게 큽니다. 그때 며느리도 같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우치 교회는 이렇게 병 낫는 기적이 많이 있어서 전도가 되었습니다. 우리 손자는 지금도 배가 아프면 자기 배에 제 손을 대고 “할머니, 나 배 아파요. 낫게 기도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이제는 배 안 아프다”고 하면서 잠을 잡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가족은 모두 믿음 안에서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의 굴레에서 벗어나다

간증자 김옥분

1995년 3월 27일 경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하기 위해 화장실에 갔다가 갑자기 “아이고, 머리야”하는 비명과 함께 머리를 감싼 채 거실로 나왔습니다.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병도 잘 안 나고 설사 아프다고 해도 그렇게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급한 마음에 119 신고를 해 가까운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갑작스런 남편의 뇌출혈

그때가 아침 8시경이었는데 남편은 춥다고 했습니다. 병원에서 CT 촬영하는 것을 보고 집으로 잠깐 왔는데 시동생에게서 남편이 이상하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병원에 가 보니 “지금 빨리 다른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몸부림치는 남편을 구급차로 급히 옮겼는데, 도착한 병원 응급실에 즉시 입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병원이 생긴 이래 가장 환자가 많았다고 할 정도로 복도에도 환자가 꽉 차 있었고, 보증인이 없어서 아침 9시경에 갔지만 밤 1시경에야 입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아는 사람을 보고도 “자네 누구야?”하고 소리치고, 화장실에 계속 가야겠다고 하고, 회사 친구들이 와서 술 한잔해야겠다고 하는 등 좀 이상했습니다. 조금 자니까 저도 못 알아 볼 정도로 심해졌고 이런 상태가 계속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혈관이 터져 5분이면 죽는다는데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신기했는지 수술도 해주지 않고 내버려두었습니다. 남편은 링거 주사 5-6개를 맞고 있었는데 제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그것을 뽑아버려 온 방안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환자를 돌보았는데 정말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13일이 지나 병원에서도 수술을 하기로 하고 담당 의사가 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엑스레이 촬영 사진을 보여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런 중요한 결정을  하는 순간에 아주머니 혼자 들어도 될까 모르겠습니다. 아주 굵은 혈관이 터졌는데 살아도 목숨만 건지는 것이지 장애가 있어도 여러 가지가 올 테니까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수술을 빨리 하지 않은 것은 혈관이 응고되었다가 몸부림치면 다시 터지고 해서 그런 것입니다. 생사는 책임 못 지지만 아주머니가 원하시니 수술을 하겠습니다.”

남편은 수술 후에도 전과 같이 몸부림을 치면서 난리였습니다. CT 촬영을 해서 수술 결과가 어떤지도 봐야 하는데 가만히 못 있고, 머리에 붕대를 감아 놓으면 3분도 안되어 풀어버리는 바람에 물이 차서 얼음을 달고 다녀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남편 때문에 다른 환자들이 안정을 취할 수 없어서 아무도 같이 있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옮길 병실도 없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이제 치료할 것은 다 했으니까 퇴원하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병실 사람들에게 “몸조리 잘 하세요”하면서 친절히 인사를 했습니다. 이것을 보니 이제는 제 정신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아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택시를 타고 오는데 또 정신이 오락 가락하는 것입니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 무조건 서라고 우겼습니다. 기사 아저씨가 도저히 화가 나서 운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사정하고 달래서 겨우 집에 왔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을 보고는 “아이구 내 새끼 잘 있었냐?”며 끌어안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또 정신이 나갑니다. 이때는 완전히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과 같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와서 그 몸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향이나 집안 사람 중에서 죽은 사람들의 흉내를 냈습니다. 특히 시어머니의 행동을 할 때는 너무나 똑같았습니다. 식사할 때만은 할머니가 살아있는 것으로 생각되는지 아이들에게 “할머닌 식사하시라고 해라”고 하고, 아이들이 “할머니가 안 계시는데 아빠는 이상하다”고 하면 밥상을 엎어버리고 “버르장머리없다”고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계시던 방에서 할머니와 대화를 하면서 밥을 먹습니다. 그러나 그때뿐이고 수시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때는 모든 행동이 여자 같고, 어느 때는 행동이 갓난 아이 같고……

제가 “당신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누구누구다. 나는 군에서 죽었는데 여차여차 복수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그리고 병에 있는 것은 비누나 약품이나 무조건 먹었습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엄마가 춥다 하시니까 이불 덮어 드려야 한다고 하면서 이불을 가지고 가서 덮고 나옵니다.

그리고 남편은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 아파트가 아닌 농촌이라고 알고 이층에서 신을 밖에 던지고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툇마루에서 신을 놓고 내려가듯이 자연스레 내려가려고 하고, 떨어지면 죽는다고 해도 모릅니다. 제가 잠깐 눈만 감았다 하면 슬그머니 일어나 창을 열고 나가려고 해서 방범창을 하려고 했다가 병원비 때문에 취소한 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저는 남편을 지켜봐야 하니까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고, 무슨 일을 할지 몰라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시장 한번 가지 못했습니다. 창살만 없었지 감옥 생활이었습니다.

게다가 남편에게 갑자기 힘이 들어오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목소리가 아닌 괴상한 목소리가 나고 눈빛이 변하고 힘줄이 꿈틀거리는데 살 안에서 혹 같은 것이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실랑이를 하며 움직이고 나면 몸에서 땀과 이상한 진액이 나왔습니다. 집안 형제들은 이런 속사정도 모르고 수술을 받았으니까 당분간은 어수선하고 발작도 하고 정신이 오락가락 할 것이라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도 우리 남편 같은 환자는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한번은 남편이 링거 주사 바늘 5-6개를 뽑아버린 채 나가는데 제가 엘리베이터로 간신히 쫓아 들어가 말렸습니다. 그런데 자기하고 싶은 대로 못 하게 한다고 제 목을 졸랐습니다. 사람이 없을 때 사정없이 조르다가 사람들이 타면 풀어 주었고, 철사 옷걸이를 가지고 있다가 못 나가게 하면 그것으로 목을 조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다가도 ‘세월이 지나면 제 정신이 돌아오겠지. 내일은 다른 방법을 써 봐야지’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보니까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독하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나가려고 하기에 따라 가면서 ‘만약 달려오는 차에 뛰어 들어가면 그냥 놔둬야겠다’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같이 갔습니다. 그리고 “어디 가요?”라고 물으니까 “할머니가 산 오두막집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목적지가 있는가 보다 했는데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안방을 차지하고 드러누워버리는 것입니다. 그 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불쑥 들어와 이상한 행동을 하니까 사람들이 당황하고 저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남편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집집마다 이랬습니다.

시고모님이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셨는데, 시어머니가 무속을 하다가 죽었다고 하시면서 종교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남편이 온전해지기만 한다면 예수를 믿으라면 믿겠고, 굿을 하라면 하겠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데리고 나갈 수도 없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시고모님은 며느리가 정신 질환이 있었는데 이것을 믿고 나았다고 하면서 며느리를 데려 왔습니다.

남편은 외부 사람이 오면 발작을 하고 난리인데 귀신을 쫓으려고 온 것을 아는지 무서워했습니다. 그분은 “동서, 사실은 나도 그랬는데 지금은 괜찮아” 하면서 방에 들어가 벽에 팔만대장경에서 뽑아놓은 글귀를 붙여놓고 무릎을 꿇고 주문을 계속 외우면서 저에게도 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남묘호랑교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남묘호랑교 사람들이 있는 동안에는 발작을 하지 않다가 가고 난 다음에는 오히려 그 발작의 강도가 심해져서 몇 갑절 더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후에 저는 그들을 불러 남편이 더 심해지니까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친정어머니는 교회에 데리고 가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던 차에 참예수교회의 송경희 자매가 이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이 자매는 1년 정도 같이 공장 다니면서 얼굴만 알았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접하게 되었고, 송 자매에게 “교회를 다니고 싶은데 우리가 가지는 못하니 교회에서 와주셨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송 자매는 그후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요일 어머니에게 “몇 가지 가져다 줄 테니까 마중 나오라”는 전화가 왔는데 저는 못 나간다고 말하고 이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5시 반쯤 남편이 발작을 하는데 큰애가 보다 못해 “아빠 모시고 바람 쐬고 올 테니까 엄마는 눈 좀 붙여요”라고 하면서 남편과 함께 나가려고 하기에 믿음직스럽지 못해 같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남편이 동네 시장으로 가는 골목을 기억하고 순순히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집 문 앞에 어머니가 앉아 계셨는데 우리가 못보고 지나치자 남편이 “어머니 여기 웬일이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좀 돌아오나 싶었는데 육교를 지나자 발작이 시작되어 다시 집으로 끌고 왔습니다. 어머니는 오면서 꼭 교회에 데리고 가서 기도를 받으라고 강권하셨습니다. 제가 힘들어서 중간에 쉬고 있는데 한 할머니를 만나서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토요일 예배를 드리고 일요일 오전에 집으로 가시던 길이었는데 교회 일을 말씀하시다가 어머니가 “내 사위 같은 병도 나을 수 있느냐?”고 하니까 나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점차 온전해 짐

알고 봤더니 송 자매가 다니는 참예수교회 신도였습니다. 송 자매는 당시 집안 일로 바빴고, 제가 불교를 좀 더 믿어보고 온다고 하니까 조심스러워 쉽게 전화를 못했지만 이 장로님과 같이 기도는 계속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화를 했더니 송 자매와 이 장로님, 목자님이 오셔서 예수를 믿자고 권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그렇지 않아도 나도 예수 믿으려고 했다”고 하면서 기도할 때 이전에 다쳐 불편한 무릎을 꿇으려고 애썼습니다.

찬송을 부르는데 너무나 우리 사정과 맞는 내용이어서 저도 아이들도 모두 울었습니다. 그리고 간단히 예배를 보면서 방언 기도와 안수를 한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안수는 이해가 가는데 방언 기도는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큰 주문이라도 다 받아들여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충만하게 방언 기도를 하고 안수를 하는데 남편은 굉장히 순종을 잘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하는 것은 강요해도 안하는 사람이었는데 비오듯이 땀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몇 차례 오시고 화요일 저녁 예배드리는 날 차를 가지고 우리를 데리러 오셨는데 남편은 순순히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번은 윤 형제님이 “모셔다 드리겠다”고 하는데 남편은 자기가 집을 찾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우리가 끌고 갔는데, 중간에 술과 담배를 사러 가야겠다고 해서 다시 억지로 끌었습니다. 남편은 자기를 놓으면 찾아가겠다고 하면서 아파트 주소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집을 모르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 자기가 누구고, 이것은 자기 집이고, 집에 오는 길은 어떻고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9월 17일 가족 모두 세례를 받았고, 남편은 그후 더 나아졌습니다. 그후 남편은 성령도 충만하게 받았고, 발작 증세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전보다 줄어들었습니다.

눈이 나음

그리고 기억이 돌아올 즈음에 눈이 안 보인다고 했습니다. 눈이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데 검은 보자기 같은 것이 눈에 가렸다 없어졌다 한다는 것입니다. 안경을 써도 소용없었습니다. 안과에 가서 검사를 하는데 진료 차트를 보시던 박사님이 놀라면서 “정말로 이 수술을 받았습니까? 이 수술을 받고도 이렇게 멀쩡합니까?”하며 놀라는 것입니다. 이 혈관이 터지면 미국에서도 두세 명 생명을 건질까 말까 하고 이렇게 정신이 온전하게 된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눈만 조금 안보이고 팔 다리 못 쓰는데는 없냐고 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또 한번 놀랐습니다. 혈관이 터질 당시 흘러나온 피를 약을 통해 몸 밖으로 계속 배출을 시키는데 이렇게 했어도 배출되지 못한 피가 좀 남아서 구름이 태양을 가리면 그늘이 생기듯이 이 피가 흘러가면서 시신경에 영향을 줘, 눈이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4개월  더 약물 치료를 하다가 호전되지 않으면 수술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수술을 반대하고 교회에서 안수 받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온 가족이 다 함께 구원의 진리를 알게 되어 세례 받고 성령 받아 중생하게 되었고, 수많은 육신의 시련과 마음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셨고, 남편의 병도 치료해 주셨으니 이보다 더 기쁘고 감사한 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