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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항 성찬례에 대한 우리의 믿음

제7항 성찬례에 대한 우리의 믿음

 

성찬례는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주의 살과 피에 동참하여 주와 연합하고 영생을 받으며 마지막 날에 부활하는 성례임을 믿는다. 이 성례는 필요할 때마다 거행하며 반드시 한 개의 누룩 없는 떡과 포도즙으로 거행한다.

성찬례는 구약 출애굽 시대에 시작된 유월절 절기에 유대인들이 가지는 특별한 식사가 신약 시대에 개혁되어 나타난 기독교의 성례입니다. 이 성례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1)성찬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지키기 시작한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기 위해서 그 나라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열 개의 재앙 가운데 마지막으로 내려진 재앙은 바로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초태생은 죽음을 당하는 끔직한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모든 사람과 짐승에게는 그 재앙이 임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재앙이 닥치기 전에 미리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도록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대로 실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백성들과는 달리 그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열 번째 재앙은 유대인들이 애굽을 나올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하나님은 애굽 사람에게는 심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이 임한 이 재앙을 기념하여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절기에는 무교병과 양고기와 같은 특별한 의미의 음식을 먹으며 기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2:22)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구약 시대 장자 죽음의 재앙을 통해 시작된 유월절 절기는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을 예표합니다. 즉, 애굽과 같은 죄악 세상에서 사망의 노예처럼 매여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흘려 그 값으로 죽음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의 우리는 예수님께서 새롭게 설립하신 새로운 유월절로서 성찬례를 시행해야 합니다. 성찬례는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친히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지시면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명령에 근거하여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찬례를 일컬어‘유월절 먹기를 원하였노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성찬례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 즉 신약 시대 성도들이 지켜야 하는 새로운 유월절 식사입니다.

 

(22:19-20)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22: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성찬례는 예수님과 열 두 제자들 사이에서만 명령하시고 준행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세워진 초대교회는 그것을 하나의 성례로 받아들여서 시행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관련된 문헌에서도 발견되지만 성경의 내적 증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저술인 고린도 전서에서 예수께서 설립하신 성찬례의 정확한 절차와 그 의미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직계 제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만찬에 참여한 인물이 아닙니다. 마지막 만찬에 참여하지 않은 그가 그 때의 대화와 성찬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고린도 교회를 포함한 초대 교회가 성찬례를 하나의 예전으로 받아들였다는 증거입니다.

(고전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2)주님의 살과 피에 참예하여 주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성찬례는 교파와 교단에 따라 그 교리에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천주교의 견해로 ‘화체설’(化體說)이 있습니다. 떡과 포도즙을 축사하면 실제로 예수님의 피와 몸으로 변한다는 견해입니다. 둘째는 일반 개신교의 견해로 ‘상징설’(象徵說)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할 뿐 축사 기도를 하더라도 떡과 포도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견해입니다. 마지막으로 참예수교회의 ‘영화설’(靈化說)이 있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성령을 받은 성도의 축사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피와 살로 ‘영적인 변화’(영화)가 일어난다고 믿는 견해입니다. 마치 세례받을 때 물이 실제 피로 변하지는 않지만 성령 받은 자가 예수 이름으로 선언하고 시행했을 때 ‘물’이 ‘피’로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듯이 성령 받은 자의 축사 기도를 통해 성찬례의 떡과 포도즙이 영적인 변화가 일어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딤전 4:4-5)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3)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영생하는 약속이 있습니다.

성찬례에 참예할 수 있는 자들은 이미 세례를 받고 구원의 길을 시작하여 부활의 소망을 가진 성도들입니다. 예수님은 성찬례를 통해 거듭난 성도에게 부활과 영생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성찬례에 참예하는 성도는 이 예식에 참예함으로 장래에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참예해야 합니다.

(6:53-5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4)힘을 합해서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성찬례는 개인적 신앙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적 차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한 떡과 한 포도즙에 참예하는 것은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한 지체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육신의 피를 나눈 혈육의 가족 관계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영적인 가족 관계도 있습니다. 육신의 가족은 죽음을 통해서 그 관계가 끝나지만 영적인 가족은 죽음 이후에도 천국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가족은 육신의 가족보다 더 중요하며 육신의 친족보다 더 친밀한 관계입니다. 성도는 성찬에 참예할 때 이처럼 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눈 영적인 가족들과 함께 한 떡과 한 잔에 참예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적인 가족으로 맺어진 공동체는 서로 협력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고전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5)성찬례는 성경적 절차와 방법으로 시행되어야 합니다.

세례라는 성례와 마찬가지로 성찬례도 그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도록 성경적 절차와 방법대로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 절차와 방법이 성경의 기록과 일치해야만 그 성찬례에 담긴 온전한 정신과 영적인 의미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한 개의 누룩없는 떡을 사용합니다.

떡은 축사하기 전에 한 개여야 합니다. 그리고 축사 이후에 작은 조각으로 찢어 나눕니다. 이 한 개의 떡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한 공동체임을 의미합니다. 참교회의 성도들은 천국까지 항해하는 구원의 방주에 함께 올라탄 한 공동체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떡에 누룩을 넣지 않은 것은 순결한 예수님의 몸에 참예함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누룩을 멀리하듯이 생활 속에서 죄악과 부정함을 멀리하고 예수님처럼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할 것을 성찬에 참예하는 시간에 깊이 다짐해야 합니다.

(고전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고전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둘째, 한 병의 누룩 없는 포도즙을 사용합니다.

한 병의 포도즙은 우리가 한 피를 나눈 공동체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발효된 포도주가 아니라 누룩을 넣지 않은 순수한 포도즙은 역시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예수님의 정결한 피에 참예함을 의미합니다. 그 피에 참예함으로 예수님을 본받아 피흘리기까지 죄의 세력과 싸우며 세상 사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며 복음을 전할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셋째, 세례를 받은 자가 성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유월절은 할례를 받고 유대인으로 귀화한 자만이 참예할 수 있는 것처럼 신약 시대의 새로운 유월절인 성찬례도 세례를 받고 거듭난 성도만이 참예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지 않아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지도 않은 자가 장차 부활할 미래를 위해서 예수님의 몸과 피에 참예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인 세례로 주님과 관계를 맺은 자,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후 성찬에 참예할 자격이 있습니다.

(12:48)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넷째, 성찬거행의 회수는 제한이 없고 수시로 거행할 수 있습니다.

여러 문헌이나 자료를 조사하면 초대교회에서는 성찬례를 집회시마다 애찬과 병행하여 시행한 것으로 발견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특별히 시행의 회수나 시행할 때를 지정하신 일은 없으므로 각 교회가 처한 형편대로 스스로 정해서 거행하면 됩니다. 싱가폴에 있는 참예수교회의 경우 월 1 회 성찬례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참예수교회 대만교회에서는 한국 교회처럼 영은회와 같은 특별한 행사 때에 시행하고 있습니다.

제1항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 승천하신 것을 믿으며 그분은 인류의 유일하신 구주시며 천지의 주재시고 홀로 하나이신 참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초월해서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의 감각으로 그분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자신 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피조물(조물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로 만드셨습니다.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졌고 그로 인해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피조물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뿐만 아니라 만물에 대한 관리까지 맡기시고 에덴동산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금지하신 한 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명령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 자신이 창조주요,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이 땅에서 땀흘리며 수고하며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망의 굴레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해서 왜 사망에 이르는 무거운 징벌을 내리셨을까요? 이 일을 통해 아담과 하와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도록 맡기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마귀의 말을 더 신뢰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마귀가 스스로 교만해져서 하나님처럼 높아진 것처럼 아담과 하와도 피조물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은 결과로 빚어진 일입니다(참조. 사 14:12 롬5:12-14). 이처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결과로 주어진 결과는 인간이 사망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영향이 끼쳐졌습니다. 그 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피조물 사이에 분열과 파괴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조화와 질서 가운데 창조된 아름다운 만물은 모두 인간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 결과 만물에도 부조화와 무질서가 찾아왔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파괴되고 최후에는 결국 멸망이 예정된 것입니다.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피조물로 만들어진 인간은 결국 죽음 이후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비록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셔서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일찍이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을 대신하여 죄의 대가를 치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천 년 전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이셨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일 1:14)

이처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을 ‘성육신’(Incarnation 하나님이 태어났다는 표현은 부적절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표현합니다. 구약 성경은 이 성육신 에 대해서 무려 40여 차례나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예언했다는 사실을 보면 성육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성육신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그가 구원받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가끔 호의를 베푸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을 위해서, 더욱이 내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희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귀에게 순종하여 반역의 길을 간 인간에게 최고의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그 호의란 사망의 그늘에 놓인 인간의 상황을 해결하시고자 ‘조물주’이신 그분이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기꺼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일은 인간이 비록 범죄했지만 여전히 그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둘째,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3:23) 모든 사람이 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사건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만약 인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자기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고 반드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으면 그 사람은 스스로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혹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고 해도 급류의 상황에서 헤엄쳐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외부로부터 구조대원이 구조 장비를 통해 도움을 주어야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어떤 노동자가 밖에서만 문을 열 수 있고 안에서는 문이 열리지 않는 냉동 창고에 갇혔다고 합시다. 냉동 창고 안에 들어갔다가 실수로 문이 닫히면 반드시 밖에서 열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망의 그늘에 놓인 인간이 그 굴레에서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성육신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셋째, 하나님이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일은 그분의 겸손과 사랑을 증거합니다. 2005년 일본의 아키히토(明仁) 일본왕의 장녀 노리노미야 공주는 평범한 공무원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본 왕족이 평민과 결혼하게 되면 왕족이라는 자기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어야 하는 규율이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하게 되면 과거 왕실에서 누렸던 모든 혜택도 상실하는 상황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랑하는 한 남자 때문에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때로 자신의 특권을 기꺼이 내려놓게 만듭니다. 그리고 낮아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의 몸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높고 높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아지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인간을 사랑하시되 조건없이 베풀어주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1)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출애굽 시대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율법을 다 준수하겠노라고 굳게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때로는 율법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율법만 주시지 않고 혹 범죄할 경우 죄책을 면하도록 소, 양, 염소, 비둘기, 곡식가루를 제물로 삼아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성막의 제도까지 주셨습니다. 만약 어떤 자가 율법을 범하게 되면 흠이 없는 가축을 성막으로 끌고 와서 그 가축에게 안수하고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불살라 드리고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리는 제사 의식을 행해야했습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범죄한 자는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고 사망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함이 없느니라

 

구약 시대 유대인들의 동물 제사 제도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그림자입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십자가 사건은 한 유대인 청년의 억울한 죽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바로 모든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일종의 제사였다고 말합니다. 또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셔서 인간이 처한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9:13-14) [13] 염소와 황소의 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벧전 1:18-19)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로 한 것이니라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언약의 피니라

 

2)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언대로 죽으실 뿐만 아니라 예언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구약 성경도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요나’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도망가다가 하나님의 섭리로 물고기 뱃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 후 그가 뉘우치고 회개하자 사흘 만에 물고기가 그를 토해내서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구약 시대의 이 사건을 인용하시면서 곧 자신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에 대한 예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시편 16편은 다윗이란 인물이 지은 노래입니다. 그 노래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10절에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내 영혼’이란 겉으로 보면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행 2:29-31)는 다윗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다윗은 이미 죽어서 그 무덤이 자신들의 곁에 있으니 다윗에게 적용될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2: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처럼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뿐만 아니라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많은 모순점들이 발생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다는 뜻이고, 우리의 부활이 없다면 신앙생활의 목적도 사라집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하는 복음도 거짓말이라는 뜻이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면 모든 것들을 부정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긍정하면 모든 것들을 긍정하게 됩니다.

(고전 15:17-19)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 병나음, 마음의 평안, 출세, 권세와 같은 모든 것들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표는 그런 것을 얻고 누리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에 힘쓰는 궁극적인 목적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최고의 복락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성도도 부활할 미래가 있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부활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때 나타날 현상과 부활의 과정에 대해서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세히 밝히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도 살리시리라

 

(살전 4:16-17)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3)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줄 수 있으려면 첫째,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고 둘째, 전 인류를 구원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이 있더라고 능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고 부활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능력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인류사에서 어떤 종교의 교주나 훌륭한 성현도 죽음을 경험했거나 죽음에서 부활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더욱이 그 죽음이 인류를 위한 것이고 부활이 또한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믿는 예수님만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증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은 기독교를 일컬어 독선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다른 길은 없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유일성에 대한 주장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은 언젠가 제자들에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 이 보다 독선적인 선언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은 다른 길은 모두 틀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배타성은 바로 이 선언에서 출발합니다. 이와 같은 유일성은 제자들도 분명히 깨닫고 고백한 내용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초대교회를 막 시작한 사도와 성도들은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이스라엘의 종교재판소) 앞에서 예수님의 유일성에 대해서 고백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은 큰 의문이 있습니다. ‘내가 만나보지도 않은 수천 년 전의 인물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왜 내가 죄인이 되어야하고 사망의 저주에 놓여야 하는가?’하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이 의문은 예수님을 믿으면 모두 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모든 문제를 예수 한 분으로 인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인류의 첫 번째 아담이 일으킨 문제를 인류의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책임지고 해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부당하게 처벌한 것도 아니고 아담의 불행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로 당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시려는 깊은 사랑과 관용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성경의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