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홈으로/Tag: 성령

제9항 구원에 대한 우리의 믿음

제9항 구원에 대한 우리의 믿음

 

구원은 본래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성령을 힘입어 성결을 이루도록 추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성경교훈의 실천에 힘쓴다.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 초월적인 세계를 ‘위’로 표현합니다. 반면 인간이 거하는 현실 세계를 ‘아래’(땅)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이 ‘아래’에서 ‘위’로 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시작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방향성은 여느 종교와 기독교를 비교할 때 다른 종교는‘자력종교’(자기의 의와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종교)인 반면 기독교는‘타력종교’(절대자의 섭리로 은혜로 구원을 얻는 종교)라고 일컫는 근거가 됩니다.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는 사망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인간은 질병, 장애, 소외, 가난 등 다양한 고통과 슬픔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과연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구약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그 가능성에 대해서 시험하신 기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내려주십니다. 과연 인간이 스스로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실험하신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고 자신있게 ‘다 지키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나중의 결론이었습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기능만 할 뿐 인간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무능했습니다. 비유컨대 율법은 엠.알.아이(MRI)라는 의료 장비와 같습니다. 이 장비는 인간의 몸을 단층 촬영하여 병의 환부나 암세포가 어디에 분포했는지 자세히 보여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암세포를 죽이고 치료하는 기능은 전혀 없는 것과 같습니다.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위에 계신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이 스스로 육신이 되셔서 아래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거합니다. 만약 율법을 지켜서 하늘에 오를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내려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이런 사실들에는 하나의 방향성이 발견됩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구원에 이르려는 시도는 ‘아래에서 위로’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위에서 아래로’ 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위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시도된 것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시도된 것들은 인간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인간은 그 과정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고 하나님이 모두 이루신 것들입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은 인간이 관연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신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십자가 공로를 믿고 물세례와 성령세례로 거듭나는 제도를 세우신 것도 하나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인류 구원의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의지대로 계획하시고 성취하신 일입니다. 여기까지는 위에서 아래로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면 이제 인간이 시도해야할 일은 단지 그분이 은혜로 내려주신 것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다 이루시고 인간의 공로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의 구원을 ‘은혜’라고 합니다. 또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표현은 우리 구원의 성격이 공로와 노력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구원은 인간의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은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해 피흘려 주셨지만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둘로 나뉘는 기준이 될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서 그 길이 나뉩니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하나님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절대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그 절대의지를 닮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유의지는 양날의 검입니다. 이는 인간이 로봇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자율적 존재라는 축복의 의미도 있지만 혹시 잘못 선택할 경우 그것에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저주의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느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느냐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믿고 세례를 받을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반응하여 불신하고 세례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이 바로 구원과 저주의 길을 가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유의지를 발휘한 인간 자신의 책임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구원에 대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7:29-30)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위의 두 구절은 믿고 세례를 받는 여부가 구원과 저주의 분기점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느냐 저버리느냐의 분기점이 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모든 인간이 자신의 십자가 ‘은혜’를 부어주신데 대해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아담은 자기의 자유의지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마귀의 음성을 따르는 불신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불신’으로 깨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믿음’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구원이란 예수님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인간이 ‘믿음’으로 반응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믿음이 있으면 마땅히 세례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이요, 천국까지의 구원의 경주로에서 그 출발선에 서는 것입니다.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3)하나님의 약속은 은혜로 주신 것이며 믿음은 약속에 대한 응답 입니다.

‘약속’이란 단어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주시는 주체이십니다. ‘믿음’이란 단어는 인간에게 속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는 주체입니다. 또 약속과 믿음의 선후 관계를 따지면 무엇이 먼저 있을까요? 먼저 약속이 있고 믿음이 나중에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존재해야 인간의 믿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약속도 주지 않으셨는데 인간의 믿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믿음을 겨냥한 것이고 믿음은 약속에 구속됩니다. 이렇게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하나님은 ‘믿음’이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류 시조 아담처럼 ‘불신’으로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천년 전 예루살렘에 그리스도를 십자가 달리게 하심으로써 인류에게 임한 저주를 대신 감당하시는 충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어떤 불신의 핑계도 늘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 희생의 은혜에 대해서 믿음으로 응답해야 마땅합니다.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4)성도는 성령을 의지해 성결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이미’ 구원은 받았다고 선언하기도 하지만 ‘아직 아니’라고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이미 임했지만 천국은 앞으로 임할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모순되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특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유컨대 두 나라가 전쟁을 치를 때 한 나라가 승리해서 다른 나라가 항복하고 종전을 선언했지만 아직까지 각 전투 지역에까지는 승전보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승전보가 전달되고 정전 통보가 전달되기까지 아직도 부분적으로 총알이 날아가고 포사격이 계속되듯이 우리의 구원도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불완전한 상황 때문에 성도의 삶 속에 고난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성도는 삶 속에서 때때로 여러 가지 사건과 상황을 통해 죄의 세력에게 고통당합니다. 그러나 낙심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아시고 하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그분께 위로받고 힘을 얻고 고난을 이기게 해주십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모르더라도 우리 안에 부어주신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해 주십니다.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도는 이렇게 자신 안에 부어진 하나님의 영을 의지하여 육신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순종하며 이 땅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죄의 권세를 이기고 죄의 유혹을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성도는 하나님 경외,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천국 백성인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최고의 법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도 크게 둘로 양분하면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십계명도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라는 두 가지 큰 주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법이요,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 사랑에 대한 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가장 큰 계명, 가장 상위의 법이 바로 이 법임을 천명하셨습니다.

(22:37-39)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6)성도는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범해서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들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처럼 성도의 신앙 생활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사랑의 완성이며 사랑은 천국 백성이 갖추어야 하는 최고의 덕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13장에서 성도가 품어야 할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결같이 우리의 내적인 형상, 인격, 성품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최고의 계명을 인식하고 나의 내적 형상, 인격,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경주할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천국을 이루시고 비록 이 땅에 살더라도 하늘의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마음 속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천국에 대한 소망, 그리스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이렇게 신앙이란 탁자의 상판을 떠받치는 세 개의 견고한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제5항 성령에 대한 우리의 믿음

제5항 성령에 대한 우리의 믿음

성령을 받는 것은 천국의 기업을 얻는 보증이며 방언(영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증거가 됨을 믿는다.

성령이란 ‘거룩하신 영’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존재했습니다. 천지 창조 때 하나님의 신(영靈)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고 사사 삼손의 몸에 임하셔서 괴력을 발휘하게도 하시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적을 행하는데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성령이 역사하시던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예레미야, 에스겔, 요엘 등의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장차 말세에 나의 신(영)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신약 시대에 오순절이라는 유대인의 절기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영혼 안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이미 성령이 존재했고 성령의 역사도 있었는데 왜 신약 시대에 와서 굳이 성령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그러면 오순절에 내린 그 성령은 구약 시대의 그것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는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까요? 이런 의문점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성령의 가치, 역할,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함께 살펴봅시다.

구약 시대 선지자가 예언한 성령, 사람의 마음 속에 부어주시겠다는 그 성령은 유대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세 절기 중 하나인 오순절이라는 절기에 인류 역사 최초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2:1-2) [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오순절에 내린 성령은 구약 시대에도 존재한 성령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구별됩니다.

첫째, 이 성령은 구약 시대의 것과 구별되는 약속의 성령입니다.

성령이 이미 존재하셨던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은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이 특별한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이 성령에 대해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예언했고 예수님 자신도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성령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 세례요한, 그리고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 성령을 일컬어 ‘약속의 성령’이라고 표현합니다.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둘째, 이 성령은 십자가 사건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오순절날 주어진 ‘약속의 성령’은 구약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은 존재하셨지만 ‘약속의 성령’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시대의 ‘성령’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여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역사에 머물렀지만 신약 시대 오순절 이후 내린 ‘약속의 성령’은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서(혹은 부어져서)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맺게 만드는 성령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이 ‘약속의 성령’을 부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야 ‘약속의 성령’이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약속의 성령’도 인간에게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만약 구약 시대의 성령만으로 사람이 구원받기에 충분했다면 신약 시대에 ‘약속의 성령’이 주어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구약의 선지자들도 이에 대해서 예언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신약 시대 성도의 구원을 위해 ‘약속의 성령’이 꼭 필요했고 주님은 그것을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오시리니

 

셋째, 이 성령은 거듭남의 한 요소인 성령세례입니다.

요한복음 3장을 살펴보면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인물에게 예수님은 거듭남(중생)의 중요함에 대해서 밝히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하는데 그 의미는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물은 ‘물세례’를 가리키고 성령이란 ‘성령세례’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인 반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일이라고 대조시켜 말했습니다. 따라서 잠시 뒤에 이어지는 니고데모와의 대화 본문에서 물과 성령의 의미는 곧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오순절에 내린 ‘약속의 성령’ 즉 ‘성령세례’는 매우 중요한 구원의 요소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받아야 천국,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신앙인이 ‘성령세례’ 또는 ‘약속의 성령’을 받는 것은 어떤 가치가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1)성령을 받는 것은 천국 기업을 상속하는 증거가 됩니다.

성경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재산 상속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가치의 유산을 영원히 상속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 약속을 확실히 지키겠다는 뜻으로 인(印 도장)을 찍어 보증해 주셨습니다. 그 인을 찍어 보증하신 일이 바로 ‘약속의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이 일에 대해 ‘성령으로 인쳤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했고 계시록 7장에는 한 천사가 해돋는 데서부터 올라와서 인을 가지고 선민의 이마에 인치려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성령세례를 통해 하나님이 성도에게 구원을 보증하신 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13-14)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후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신실(믿을만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주셨다면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분이 내게 어떤 약속을 주셨다면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때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원인은 성품이 거짓된 사람이기 때문이거나 혹은 지킬 능력이 없거나 할 처지에 있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과 동시에 전능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성품적으로나 능력면으로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실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침을 통해 구원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6:17-18)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2)성령은 성도의 신앙생활의  보혜사가 되십니다.

성령은 천국 기업의 보증으로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천국을 소망하며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성도에게 여러 가지 실제적인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비록 성도는 천국의 약속은 받은 존재지만 이 땅에서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있는 것처럼 거듭난 성도에게도 역시 고난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불신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을 통해‘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었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부모는 타인의 자녀가 아니라 내 자녀에게 온갖 관심을 쏟고 필요를 공급하며 보살피듯이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한 보살핌을 받습니다. 그래서 비록 이 땅에서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우리 안에 성령께서 위로하시고 상담해주시며 감당하는 능력과 은혜를 주십니다. 이러한 성령을 일컬어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보혜사란 상담자, 조력자라는 뜻입니다.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물세례와 성령세례(성령의 내주)로 거듭난 성도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죄의 유혹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육체의 소욕에 이끌리지 않고 성령의 소욕에 이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단이 주는 생각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생각에 순종해서 선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의지와 결단을 동원해서 성령께서 주시는 선한 소욕에 순종하면 됩니다. 성령께서는 혹시 죄를 범했을 때 그 죄를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의지해서 그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때 우리 죄를 소멸시키시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성령의 풍성한 열매들을 맺게 하십니다.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 세례 즉 약속의 성령은 성도 개인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이 이룬 공동체, 즉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성령이 이끌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은사는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고침의 은사, 능력의 은사, 예언의 은사, 각종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은사를 내려주시는 목적은 성도 개인이 자랑하고, 자기 만족하게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4:11-12)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고전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3)방언이 성령을 받은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내주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승천 직후 오순절 절기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성령이 내리실 때처럼 방언(또는 영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방언을 성령 받은 증거로 삼아야 할까요?

 

첫째, 믿는 것이 곧 성령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믿으면 곧 성령 받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내용들을 살펴 볼 때 믿는다고 곧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성령의 내주는 별개의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9장 2절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만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 질문을 받은 제자들은 대답하기를 아직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 후 안수하자 성령을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19:6-7)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둘째, 세례를 받은 것이 곧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에서 빌립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다시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서 성령받기 위해 안수 기도했습니다. 만약 예수를 믿었거나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충분했다면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성령을 구하며 안수한 것은 너무도 이상한 행동이 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마리아의 제자들이 세례 받은 것으로 불충분하고 성령을 받게 하기 위해서 안수받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본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8: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셋째, 선행을 한다고 성령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이 그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실 만큼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령은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시고 그를 지시하셔서 베드로를 만난 후에야 비로소 그 가족들이 성령세례와 물세례를 받게 됩니다. 고넬료가 그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기억되는 신앙으로 구원받기에 충분했다면 굳이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 지시하시고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셔서 두 사람이 만나도록 주선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넬료 가정 방문한 일의 결말은 그 가정이 성령세례를 받고 이어서 물세례까지 받은 것으로 일단락되고 있습니다.

(10: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 가정의 전도는 오순절 사건 이후 대략 10년 정도 세월이 흐른 뒤에 나타난 사건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는 오순절 제자들에게만 임한 대표적 사건이거나 일시적 사건도 아닙니다.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여러 장로들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베드로는 고넬료 가정에 내린 성령세례가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라고 증거했습니다. 고넬료 가정도 오순절 제자들이 체험한 것과 똑같은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오순절과 똑같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사도 시대와 같은 현상은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넷째,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다고 성령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언젠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은 성령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고전 12:3). 그러나 베드로가 그 때 약속의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 절기에야 비로소 성령을 받았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성령 세례’로서의 성령이며 구원의 보증이 되는‘약속의 성령’입니다. 오순절 이전에 구약 시대부터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역사는 존재하듯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것은 감동의 역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것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면 오순절에 다시 ‘성령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오순절과 같은 동일한 체험으로 받는 것입니다.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4)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을 때는 방언을 말했습니다.

위와 같은 내용을 살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물세례나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불완전한 단계의 신앙인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그런 신앙인들에 대해서 세례와 성령을 받게 한 사도들의 노력을 보면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선행하는 믿음으로 구원이 충분히 보장된다면 사도들은 굳이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베풀려고 사람을 만나고 안수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는 것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신약 성경에서 유일한 역사서로 분류되는 사도행전에만 성령 받는 순간 나타나는 구체적 현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오순절 날의 사도들의 체험에서(행 2:1-4), 둘째, 고넬료 가정에서의 체험에서(행 10:44-48), 셋째, 에베소 교인들의 체험에서(행 19:1-5) 그 현상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성령세례의 공통적 현상은 방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2:3-4)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10:45-46)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19:5-7)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빌립이 사마리아 선교한 사도행전 8장의 기사에는 성령이 내려오실 때 방언을 말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그 정황상 방언을 말했을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때로는 생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들은 사마리아를 선교할 때 백성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안수했습니다. 그런데 마술사 시몬이 사도들에게 돈을 드려 자신도 그런 능력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 물세례만 받고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신도들에게 마술사란 직업인이 탐낼만한 어떤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추론하게 합니다.

(8:18-20)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위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보아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임했던 성령 강림은 구약의 성령의 역사와는 뚜렷이 구별됩니다. 그리고 성령세례의 구체적인 증거는 방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을 때 방언을 말하는 현상은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 사도교회를 계승하는 본 교회 안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제3항 교회에 대한 우리의 믿음

제3항 교회에 대한 우리의 믿음

 

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늦은 비 성령으로 세우신 교회로서 사도교회의 부흥된 참교회임을 믿는다.

 

헬라어 ‘에클레시아’(ekklēsia)로 발음하는 교회라는 단어의 의미는 ‘부르심을 받아 나온 회중’이란 뜻입니다. 이 어휘적 의미를 살펴볼 때 교회는 유형의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무형의 모임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교회는 예수님(하나님)이 세우신 믿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이기 때문에 예수님(하나님)이 주인이시오 자신의 뜻대로 치리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결코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할 수 없으며 사람이 세우고 사람의 뜻대로 치리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 것이고 따라서 그분의 뜻대로 치리되어야 하는 신령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장차 자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로 고백한 베드로에게 당신이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오순절 이후 성령 강림을 기점으로 초대교회가 서게 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교회를 세우신 목적도 바로 그것을 위해서였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더 이상 이 땅에서 사역을 지속하실 수 없으시지만 그 동안 가르쳐 온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로 인해 세워진 교회를 통해 영혼 구원의 사역이 지속되도록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본 교회는 예수님께서 늦은비 성령으로 세우신 교회입니다.

신약 교회의 출발은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이라는 유대인의 절기 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오순절 절기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셨고 약속의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비로소 권능을 받고 예수님이 명하신대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늘날 한국에는 많은 교단 교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초대교회는 이렇게 분열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분열된 배경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 원인과 과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유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약 삼백년이 지날 무렵 순수한 초대교회의 신앙은 이교도의 우상숭배의 문화와 결합하면서 점점 변질되어갔습니다.

동양의 신비종교의 사상이 담긴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과 헬라의 철학 사상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온 것입니다. 더욱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A.D. 313년) 이후 교회는 잔혹한 핍박은 면하게 되었지만 로마의 정치 세력과 타협하면서 순수한 신앙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모습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세속 권력과 결탁한 종교 집단으로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 타락의 결과 교회는 교리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교회에 세워두셨던 온전한 교리들이 변질되고 제거되는 통탄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일신론은 이교에서 유래한 삼신론에 영향을 받아 삼위일체론으로 대치되었고, 세례는 본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성례로 온 몸이 물에 잠기는 침례였지만 그 중생의 실효성을 부정하며 상징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 실내에서 이마에 물을 찍어 주는 약식 세례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마치신 직후 세우신 제칠일 안식일(토요일)을 당시 로마 태양신 숭배일인 일요일로 대치시켰습니다. 그 결과 예수께서 인간 영혼의 구원을 위해 세우신 구원의 교리들은 교회 안에서 사라졌고 교회로서의 영적인 권세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바벨론 제국이 쳐들어와 솔로몬 성전을 훼파하고 그 안에 기물들을 다 약탈해 간 것처럼 초대 교회 안에 존재했던 영적 기물들(구원의 교리들)은 모두 이단 사상에 의해 약탈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타락하여 더 이상 교회라고 일컬을 수 없을만큼 부패하게 되자 성령 강림이 중단되게 됩니다. 로마 정부의 정치 세력과 타협한 교회는 더 이상 순수한 교회가 아니라 세속의 권력과 결탁한 타락한 집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로마 천주교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0: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로마의 세속 권력과 결탁한 천주교는 역사 속에서 많은 불의를 자행했습니다. 교황은 베드로의 사도권을 직접 계승한 존재로 여겨졌으며 그 세속적 권세가 매우 강했습니다. 과거 역사를 살펴볼 때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한 ‘카놋사의 굴욕’ 사건은 그 당시 교황의 권세가 얼마나 위세를 떨쳤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또 교황의 절대 권력 아래 천주교는 종교재판을 통해 선량한 신앙인들을 탄압하고, 십자군 전쟁을 통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역사 속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할 재원 마련을 위해 거짓된 교리까지 만듭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위해 ‘면죄부’를 구매하면 그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격상된다는 허황된 연옥교리였습니다. 독일의 한 천주교 사제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러한 천주교의 거짓 교리와 불의한 행태에 분개해서 1517년 10월 경 천주교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적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문에 내걸었고 이에 군중이 호응하고 연합하면서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비로소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의 처음 동기와 출발은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 개혁’의 본질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이는 ‘종교 분열’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 개혁이 시작된 때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개신교는 교리상의 이견, 교회 정치상의 이견 등으로 수백 수천개의 교단 교파로 분열을 거듭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많은 교단 교파가 난립하게 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바로 종교 개혁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일례로 종교 개혁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루터와 동료였던 쯔빙글리(Vlrich Zwingli)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성찬례’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루터와 결별합니다. 이미 개신교는 출발부터가 이러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즉 개혁교회는 ‘종교 개혁’이라고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 성격을 살펴볼 때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온전히 회복한 개혁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루터는 종교 개혁의 의도가 없었습니다. 타락한 천주교의 부조리만 바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출발이 이러하니 개신교는 천주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증거는 천주교에서 황제에 의해 변경된 성일, 즉 일요일 준수를 그대로 계승했고 천주교의 영세와 유사한 형태의 세례를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례가 상징에 불과하고 단지 교회 입교 절차로 필요한 과정으로만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 개신교의 종교 개혁 운동의 성격을 짚어보면 사실은 인류사에서 인문주의, 계몽운동이 싹트던 시대의 흐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은 인간이 과거보다 현명해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촉발된 인간으로부터의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에 의한 개혁인지라 불완전한 개혁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세우셨던 진리의 기둥들, 영적 성전에 있어야할 진리의 기둥들(세례, 성령, 안식일 등)은 회복하지 못하고 사람의 생각대로 사람들이 만들어낸 교리들로 교회의 내소를 치장한 것입니다.

(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불완전한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아래로부터의 개혁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완전한 교리로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완전하신 하나님이 위로부터 완전한 개혁을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세월이 흘러 19세기에 이르러서 그 전조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사도시대 오순절과 같은 성령이 내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당시 미국의 세속화된 교회를 한탄하며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던 일부의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게 되고 그 세력은 점점 확대되었습니다. 이윽고 자신들의 새로운 복음에 사명을 느낀 자들은 오순절과 같은 체험의 성령을 세계 곳곳에 전파하기 시작했고 그 물결이 중국에도 전달되었습니다. 이런 위로부터 시작된 신앙 개혁의 과정 속에서 초대 교회와 동일한 구원의 교리를 갖춘 교회가 나타납니다. 중국 산동성에서 사도 시대의 진리를 추구하는 가운데 성령이 강림하시고 초대교회를 계승한 참교회가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타락했던 교회가 하늘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개혁에 의해서 말세에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비와 늦은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34:26) 내가 그들에게 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이스라엘에서는 농사에 있어서 중요한 비가 두 차례 내리는데 그것은 이른비(가을비)와 봄비(늦은비)입니다. 밀이나 보리 파종 전에 반드시 이른비(가을비)가 내려야 파종할 수 있고 추수 전에는 반드시 늦은비(봄비)가 내려야 추수할 수 있습니다. 겨울은 우기로서 장마비가 오고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땅에서 농사에 중요한 비가 두 차례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적 농사, 즉 인류 구원의 밭인 지구상에 ‘영적인 비’가 두 차례 내릴 일에 대해서 성경은 상징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팔레스틴의 기후와 관련한 농사문화를 통해 인류사에서 두 차례 나뉘어 내릴 성령 강림의 사건을 비유하셨습니다. 즉 이른비란 사도교회의 오순절 성령을 상징하고, 늦은비는 말세에 다시 회복된 참교회에 내릴 성령 강림을 상징합니다. 이 말세에 내리신 늦은비 성령 강림으로 설립된 교회가 바로 참예수교회입니다.

16세기 마틴 루터에 의해 아래로부터의 불완전한 종교 개혁과는 달리 하나님은 20세기에 이르러서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위로부터의 온전한 개혁을 진행하셨습니다. 그 개혁의 결과 죄사함의 은혜를 주는 성경적 세례(거듭남의 물세례), 천국 기업의 보증이 되는 약속의 성령(거듭남의 성령세례), 천주교에서 변경한 일요일을 다시 토요일로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루터의 종교 개혁이 완전한 것이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20세기에 이르러 굳이 성령을 이 땅에 다시 내려주시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루터에 의해 시작된 개혁 교회도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오류가 많고 불완전했기 때문에 참교회를 회복시키시고 인류의 구원 사역을 지속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개혁하시고 회복시키신 본 교회는 다른 교회와 비교할 때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첫째, 교회에 성령이 계십니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 직후 탄생했습니다. 성령 강림을 체험한 사도들은 비로소 그 이후에야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했고 그 복음 전파 사역의 핵심은 바로 죄사함의 은혜를 주는 ‘물세례’와 천국 기업을 보증하는 ‘성령세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마땅히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두 가지 핵심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진리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죄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성령이 임재하시는 교회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20:22-23)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뒤이어 죄사함의 권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내주’가 ‘죄사함의 권세’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령의 내주가 없으면 사죄의 권세도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참 교회라면 초대 교회처럼 먼저 오순절과 같은 성령이 임재하셔야 합니다. 만약 오순절과 동일한 약속의 성령이 없으면 그 단체는 사죄의 권세가 나타날 수 없는 껍데기 단체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발달한 한국에는 대단히 많은 단체가 교회 간판을 걸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형 건물, 다수의 신도, 치밀한 교회 조직, 끈끈한 인간관계, 유익한 문화 프로그램, 유명한 신학자와 기관들, 신도들의 강한 연대의식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교회에 성령이 계시지 않고 또 죄사함의 권세가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조직이나 단체에 불과합니다. 사람을 구원하려면 예수께서 교회 안에 두셨던 초대교회의 성경적 교리를 구비해야 하는데 그 교리가 없다면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면 교회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므로 이미 교회라고 칭할 수 없습니다.

둘째, 성경적인 기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에 계십니다. 사람은 그 세계에 도달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때로는 천지만물에 부여하신 원리와 법칙을 넘어서는 특별한 현상을 보여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연법칙을 거스려 나타나는 이러한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컬어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칭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성령이 내려주시는 기적을 통해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에게 당신이 살아계신 분이며 큰 능력이 있는 분임을 증거하십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라고 성도에게 그런 기적이 따를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6:17-18)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병든 자가 치유되는 기적을 가장 많이 보여주셨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 가운데 가장 많은 기적은 바로 병든 사람이 치유받는 은혜의 기적입니다. 개인 기도를 통해서, 안수를 통해서, 교회의 합심 기도를 통해서 병세가 호전되고 병자가 완치되는 예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신앙인들은 이런 기적이 나타난다고 하면 ‘열광주의자’니 ‘신비주의자’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런 기적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은 성경적인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기적도 있지만 어떤 경우 마귀로부터 오는 거짓 기적도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가령 어떤 자가 병을 고칠 때 무당의 주술하는 방법을 동원하여 고치거나, 병자의 환부를 상해하는 방법으로 고치거나, 안찰이라고 명목으로 환자를 눕히고 신체의 일부를 구타하는 방법을 쓰거나하는 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해괴한 방법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런 방법과 과정으로 병자를 치료한 적이 없습니다. 또 치료를 명목으로 금전을 요구하거나, 병고친 후 특정한 사람을 숭배하게 하거나, 완치되었다고 선언했지만 이후 그와 달리 오히려 악화되었거나 하면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성경적인 기적이 아닙니다. 모두 마귀로부터 오는 거짓 기적이므로 이를 수행하는 사람을 거절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7:11-12) [11]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 [12]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13: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9:31)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성령으로부터 오는 참다운 기적은 성경의 기록과 그 현상이 일치해야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적은 조용히 기도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병고침의 은사를 받은 성도나 교회 공인된 지도자를 통해서 조용히 안수를 받거나, 본인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치유의 은혜는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온유하게 임하시듯이 조용한 가운데 주어집니다. 또 그런 은사를 발휘한 자가 특정한 사람을 우상화하고 추종하도록 강요하거나 무속신앙인들이 복채를 요구하듯이 헌금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주님의 교훈대로 오로지 하나님께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감사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적은 일어납니다. 본회에서는 종종 성령으로부터 오는 성경적인 기적을 체험하고 간증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본회가 성령이 임재하시는 참교회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셋째, 전하는 진리가 성경과 일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진리를 자신의 몸인 교회 안에 담아 두셨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교회를 통해 거듭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이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계획이 교회를 통해서 구현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했습니다.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오늘날 그 진리는 복음 안에 담겨 있으며 교회가 표방하는 복음은 ‘교리'(dogma)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리’가 다르다는 것은 복음이 다르다는 것이고 다른 복음이란 곧 진리를 변질시킨 거짓된 복음입니다. 심각한 점은 진리가 없으면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초대교회 시대에 이미 다른 복음이 존재했고 그릇된 사상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고 이에 대해 바울은 저주받을 일이라고 매우 강한 어조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 사도가 경계하고 우려했던대로 초대교회는 다른 복음에 미혹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정치 세력과 결탁한 후 진리의 기둥을 이루었던 교리의 항목들은 하나 둘씩 변질되고 제거되었으며 그 결과 구원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 아닌 교회로 전락했습니다. 또 천주교의 불법과 범죄에 분개하여 일어난 개혁교회도 오늘날 처음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동기와는 모순되게 타락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폐해졌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경우 구약의 율법 준수를 강요하듯 행위를 강요합니다. 또 천주교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했던 그들이 오히려 헌금 강요로 교회의 부를 축적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입니다. 힘있는 정치인과 관계를 맺기를 좋아하고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은 천주교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성도들이 말씀에 순종하고 그 결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복신앙에 빠지게 만들고 장로, 권사, 집사 같은 직분 제도를 통해서 사사로운 명예심을 자랑하도록 부추깁니다. 이런 모든 문제의 출발은 사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성경에서 멀어진 잘못된 교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교리가 잘못되면 윤리도 잘못됩니다.

(20:29-30)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교회 분파의 요인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주목할 것이 교리에 의한 분파입니다. 교회는 표방하는 교리에 따라 여러 교단과 교파로 분열되어 왔습니다. 그 실상은 이렇습니다. 세례를 받되 침례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교파가 침례교단, 일요일이 아닌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교파가 안식교단, 오순절과 같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교파가 오순절교단입니다. 모두 나름대로 성경에서 옳은 것을 추구하여 주장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는 완전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일부만 온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이 세우신 모든 요소들을 다 갖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라도 누락되면 그것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노아가 방주를 만들되 하나님이 지시하신 잣나무로 만들지 않았다면, 역청으로 안팎을 칠하지 않았다면, 가로 세로 높이를 하나님이 지시하신 치수대로 만들지 않았다면 아마도 거센 물살에 끝내 파선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 사건은 교리적인 차원에서 하나의 비유입니다. 구원의 방주로 비유되는 교회가 완전한 구원의 교리를 구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7: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모든 것이 구비된 온전한 교리를 세우지 않으면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온전한 교리는 모두 예수께서 세우신 것이며 인간이 개입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것, 그분이 동정녀에게서 나신 것,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부활하신 것, 승천하신 것, 약속의 성령을 내려주신 것, 거듭남의 물세례를 명령하신 것 등 모두 하나님 자신이 이루신 것입니다. 이들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불완전하다면 인간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구원을 위해서 그 완전한 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또 그렇게 온전한 교리에 순종할 때 우리는 온전한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따라서 위에서 살펴본대로 구원을 보장하는 참교회란 바로 인간 구원의 능력을 담은 온전한 교리를 소유한 교회여야 합니다. 성경적 죄사함의 ‘물세례’를 시행하고, 오순절과 같은 ‘약속의 성령’이 임재해야 하고, 성경적 기적 이사가 나타나야 하고, 창조 때부터 설립된 ‘은혜의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본회는 노아가 방주를 만들되 하나님이 명령하신 방주의 제도를 그대로 준행한 것처럼, 출애굽 광야시대에 모세가 하나님이 명하신 설계도대로 성막을 건축한 것처럼 온전한 구원의 교리를 순종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오늘날 사람의 생각대로 세워진 교리가 아니라 초대교회가 소유했던 바로 그 교리, 그래서 인간을 구원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교리를 실천하고 있는 교회가 바로 참예수교회입니다.

방언에 두 종류가 있음을 알고 계십니까?

1) 은사로 나타나는 방언

은사의 방언은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서 특정한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 12:10)

. 은사의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며 반드시 통역과 함께 나타납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 14:5)

 

2) 성령을 받은 증거의 방언

성령 받은 증거(표적,sign,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고전 14:22)로 개인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 14:4).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은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고 통역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성령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고전 14:2)

.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초로 성령을 받은 것을 포함해서 사람들은 성령을 받으면 공통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

,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10:46

,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6).

 

오늘날에도 성령을 받은 참예수교회 성도들은 기도할 때 방언으로 기도하며, 때로 방언 통역의 역사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경상의 두 종류의 방언이 실제로 나타나는 것을 통해 방언에 대한 말씀이 정확함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것만이 성령받은 증거인가요?

네. 그렇습니다.성령 받은 현상에 대해서 성경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1) 오순절 성령 강림에 나타난 현상은 방언이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셨을 때 세계 각처에서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성령이 임한 순간, 초대교회 성도들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에 대해서 두 가지 태도를 보였습니다. 먼저 경건한 자들로 소개된 한 그룹은 방언이 자국 언어로 들리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다른 그룹은 ‘새 술이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반응이 이처럼 두 무리로 나뉘었다는 점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방언이 물리적으로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발음된 방언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한 종류의 방언이지만 이에 대해 들을 줄 아는 귀가 열리고 열리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한 직접적인 동기는 바로 이 조롱하는 무리들에게 이 사건을 납득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행2:13-14)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의 종결부에서 조롱하는 무리들에게 너희가 조롱한 이 현상은 새 술이 취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성령에 대해서 표현하기를 ‘보고 듣는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어주신 것은 성령인데 그것을 ‘보고 듣는 이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성령과 방언의 가시 가청의 현상을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3)

2) 사마리아 선교현장에서 마술사 시몬은 무엇을 보았는가?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파되었는데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빌립은 그 지역에서 사역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기적과 이사를 행하며 세례를 주었는데 마술사 시몬이라는 자도 이에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지역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지역에 방문합니다. 그런데 그 방문의 목적이 성령을 받게 하려는 목적으로 안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8:15-17)

이 말씀이 내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 받는 것과 성령 받는 것은 별개의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또 세례를 받았으면 당연히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술사 시몬은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는 재빨리 돈을 내밀며 요구합니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마술사 시몬의 요구에 베드로는 그의 은과 그가 함께 망할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행8:18-19)

마술사 시몬은 성령이 내리실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았기에 그 능력을 돈주고 사려고 했을까요? 성경은 그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러나 성령 강림이 단지 마음속에서 내적으로만 일어나는 사건이라면 마술사 시몬의 이런 요구는 너무 이상한 것입니다. 사람의 주목을 받는데 관심이 있었던 마술사 시몬이 관심을 둘만한 성령 강림의 구체적인 현상은 무엇이었을까요?

3) 고넬료 일가도 성령을 받고 방언을 했다.

고넬료는 이미 하나님을 믿는 자였습니다.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무엇이 더 필요했는지 욥바 피장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고 주의 사자를 보내서 명령하셨습니다. 한편, 베드로에게는 부정한 고기가 담긴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잡아 먹으라’는 상징적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곧 이방인인 고넬료를 부정하게 여기지 말고 그로부터 온 사람들을 따라가라는 의미의 계시였습니다. 이렇듯 고넬료에게 천사를,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두 사람의 만남은 전적인 성령의 중재로 이루어진 만남이었습니다. 그 만남을 주선한 하나님의 목적은 10장의 후반부에 나타납니다. 고넬료 일가와 그의 친구들은 함께 모여서 베드로로부터 설교를 듣던 중 갑자기 성령을 받게 되고 할례 받은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 때문에 놀랐는데 이는 방언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10:44-46)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의혹과 의심에 찬 장로들에게 설명할 때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라고 말했습니다. 즉 오순절 성령 강림 때와 같이 그런 현상으로 임했다는 것 입니다. 이처럼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은 방언을 말하는 것을 통해서 사도들에게 인지되었습니다. 이 성령세례를 꼭 받아야 거듭나는 것이고 거듭나야 천국의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미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 고넬료를 베드로와 만나게 하시고 그로 인해 성령을 받게 하셨던 것 입니다.

4) 에베소교회 제자들도 성령을 받고 방언을 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 이르렀을 때 어떤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돌연 바울은 성령세례에 대한 이야기에서 이제 물세례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립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이런 대화의 흐름은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대단히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뜻합니다. 바울의 질문에서 느낄 수 있는 의미는 ‘성령세례도 모른다니 그러면 물세례는 제대로 받았는가?’의 의문이 잠재합니다. 물세례를 받아야하고 성령의 세례도 받아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다. 이처럼 ‘에베소 어떤 제자들’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학자 아볼로처럼 요한의 세례만 아는 신앙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물세례를 주고 다시 안수하여 성령세례를 받게 합니더. 그런데 바로 이 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해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19:5-6)

이와같이 성경에 성령을 받고 방언 못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성경에 성령을 받는 기록은 네 곳밖에 없습니다. 즉,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행8:16-19)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행10:44-47)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행19:1-7) 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는 성령이 내리는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해 볼 수 없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7:37-39)

. 그리고 로마서부터 유다서까지는 성령을 받고 신도가 된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이고, 계시록은 요한이 받은 계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역사서이고 교회가 되는 기본 교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위의 네 곳 중에 성령을 받고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없는 곳은 8장입니다. 여기서는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라고 했는데, 시몬은 그 광경을 보고 돈을 드려 살려고 했음을 보아, 방언을 했다는 지극히 당연한 기록은 생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3:8)

여기서 예수님은 성령과 바람의 같은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⑴ 소리가 납니다. 성령을 받으면 방언의 소리가 납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4)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3)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10:45-4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19:6)

⑵ 움직입니다. 성령이 우리 몸을 격동시켜 몸이 진동합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3)

⑶ 성경에 성령이 내리신 광경이 네 곳밖에 없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행8:16-19)

베드로가 이 말 할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행10:44-47)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행19:1-7 이 네 곳의 공통점은 “방언”입니다.

방언에 대해 정확히 알고 계십니까?

1) 성령에 감동되어 말하는 혀의 소리입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4

,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6).

2) 일반적으로 방언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행2:13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고전14:2

,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14

,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6).

3)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닙니다(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고전14:10

,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11

,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13).

4) 성령이 성도를 대신하여 대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8:26-27

,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고전14:15).

5) 영언을 말하면 믿음의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14:4).

6) 영언은 원래 뜻이 있는 것으로서 필요시 하나님이 사람을 감동시켜 통역하게 하십니다(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10,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2:5-11).

7) 만약 영언을 통역하는 은사, 즉 각종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영언을 통역하는 은사가 발휘되면 이 때 방언(영언)은 모든 이가 이해할 수 있는 예언이 됩니다(

어떤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10

,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14:26-28).

8)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을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전12:10)

. 여기에서의 방언은 타인의 덕세움을 위해 말하는 영언으로서(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전14:26-28) 통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은사이며 성령 받아 방언 말하는 사람 모두에게 주어지는 은사는 아닙니다(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고전12:30

,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14:5

,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13

,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8).

9) 때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영가(靈歌)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고전14:15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3:16

,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5:19).

10) 자기의 덕을 세우든지 교회의 덕을 세우든지 영언 말함을 금하면 안 됩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고전14:39

,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40

, 참조,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5:19).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동일한 질문을 이미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했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명확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3:5) 

물로 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의미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3:5)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 3:21) 세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2:38)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행22:16)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갈 3:27)

그리고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천국의 기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8:16-17)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3-14)

거듭남(중생)은 천국에 들어가는 첫 걸음이자 필수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물과(물침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전까지의 삶의 모습을 버리고 성경 교훈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이 사실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구원을 향해 걸어가는 삶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 16:16)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참예수교회는 왜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나요?

1)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세 위격,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계시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신관(神觀)에 관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표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신관과 충돌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니 (신6: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 (막12:29)

삼위일체 사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세 분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경은 아버지, 아들,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어떤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지 본질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유일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속사(救贖史) 안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의 형태로 구속의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시에 여러 모습으로 존재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구속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 아들, 성령의 형태로 계시다가 그 사역을 마치셨을 때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15:22-28)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2:35)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3:21)

 

즉,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말씀하고 있는 반면 삼위일체 사상은 하나님께서 항상 세 위격의 형태로 계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2)한 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19-20)

이 구절에서 “이름”은 헬라어 원어(원어 기호와 발음 추가)로 보면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한 분이심을 의미하고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세례를 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음을 보게 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행2:2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행10:48)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행19:5)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증거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일5:20)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이것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 즉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1:15) 성경에 그와 관련된 구절은 너무나 많아 일일이 기록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사9:6)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은들 그들 중에 누가 능히 이 일을 고하며 이전 일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로 증인을 세워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어 듣는 자들로 옳다 말하게 하라 (사43: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사43:10)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4:12)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요8:25-27)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4:9)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행22:14)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딤전3:16)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1:8)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계22:13)

3)삼위일체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요?

바로 니케아 공의회(주전325년)에 기원을 둡니다. 이 회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 본질이라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니케아 신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니케아 신조는 사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함께 오늘날 카톨릭의 주요 신조 중 하나입니다.) 삼위일체 사상은 바로 이 니케아 신조를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니케아 신조에 보면 “아버지는 창조주시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나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다,” 라는 부분이 나오게 되는데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로부터 나셨다는 이 부분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영원하다는 부분과 모순이 됩니다.

또한 삼위일체 사상을 가장 잘 정리한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26항을 보면 삼위가 함께 영원하며 동등하다고 되어 있는데 33항에서는 성자에 대해서 신성으로는 성부와 동등 되나 그의 인성으로는 성부보다 낮으신 분이라 말하는 모순된 이론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삼위일체는 모순된 신학 사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4)삼위일체는 인간의 사상에서 나온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마지막 항에는 이 신앙이 참되며, 이 신앙을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개신교에서는 이 부분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삼위일체는 성경적인 교리가 아닌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사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본회는 삼위일체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을 가집니다.

 

오순절 날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닙니까?

오순절 날 방언은 외국 방언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120명이 모여 서로 외국말을 했을 때 밖에 있는 사람은 소리가 섞여서 태어난 곳 방언으로 들을 수 없습니다.
2)여러 다른 지방(15곳)의 언어로 알아들었습니다(행2:11)
3) 못 알아듣는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행2:13)

4) 본래 방언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함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이나(고전14:2), 하나님께서 각지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로 하여금 방언을 통역하게 하는 은사를 허락하셨던 것입니다(고전12:30)

마귀로부터 온 방언도 있습니까?

사람이 성령을 받게 되면 육체적인 진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영, 곧 악한 영을 받은 사람도 역시 진동할 수 있습니다.

1) 성령을 받아서 하는 진동은 질서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손뼉을 치며 영가를 부르기도 하지만 성령의 기도를 마치고 나면 평소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특징입니다. 한 사람의 영언이나 영가는 구별되고 힘이 있으며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 된 후에는 매우 평안하고 영적인 즐거움이 넘치게 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7:38)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14:17)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14:32-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전14:39-40)

 

2) 마귀의 영을 받아서 하는 진동은 질서가 없습니다.

울거나 웃는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고 거칩니다. 얼굴과 몸의 움직임이 괴상합니다. 악령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제지(制止)를 받지 않습니다. 거짓 영언을 말하는데, 그 소리는 짧고 빠르며, 모호하고 약합니다. 영언에 비해서 입술에서 나는 소리를 하며 오성(悟性)-인지할 수 있는 기도소리-이 많이 섞이기도 하고 외국어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때로 귀신들린 사람은 과격하고 지나치게 행동합니다. 그런 자는 거만하고 자랑하며 스스로를 예수 또는 성령이라고 하며, 구약의 위대한 성도로 자칭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11:14) 그 내용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왜곡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영가는 대부분 세상의 유행가풍에 속한 것입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마음의 자주성(自主性)을 잃고 의식불명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괴성을 지르거나 중얼거리게 됩니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사8:19) 사령에 사로잡힌 동안 몹시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으며 바닥을 구르기도 하고 입에 거품을 물기도 합니다. 몸에 경련이 일어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나 남에게 고통을 가하기도 합니다. 얼굴이 창백하고 손발이 찹니다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삼상18:10)

(사8:19)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막5:5)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막9:8)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요3:31)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일4:3)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요일4:5)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행16: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