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제목 : 성령의 사역 (요16:5-11)

2023년 2월 14일 김용준 목자님 

 

(요 16: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요 16: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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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예언의 말씀을 생각해보았다. 주님께서는 핍박으로 인해 실족하는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셨다. 핍박을 하는 것도, 핍박으로 인해 실족하는 것도 모두 무지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핍박 가운데 실족하지 않도록 미리 말씀해주신 것이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매우 어려울 것이다. 내적으로는 신앙의 혼돈이 있고, 외적으로는 핍박이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이런 어려운 때에 어떻게 해야 바른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 미리 말씀해주셨다. 또한, 우리가 그런 상황 가운데서 실족하지 않으려면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야 함을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시다. 성령이 핍박을 이기기도 하고, 혼돈 가운데서 바른 신앙을 찾게 해주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핍박 가운데서도 보혜사 성령이 나와 함께하시고, 혼돈이 와도 내가 믿는 신앙이 바른 신앙이라는 것을 내 안에 거하는 성령이 증거해주신다는 것이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런 결정적인 시간에 바른 신앙을 지킬 수 없다. 성령이 용기와 지혜를 주셔야만 우리가 일어날 수 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다면, 구약 성경이나 바울 서신에서도 그런 내용을 볼 수 있으나, 핵심적으로는 복음서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요 16: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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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4절부터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셨다.

첫째로, 기억나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누가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는가?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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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말씀을 생각나게 도와주신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억난다는 것은 창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즉, 이미 들었던 말과 보고 듣고 깨달았던 일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생각나게 하신다는 뜻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미 듣고 본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셔서 죄를 이기게 하시고 핍박을 견디게 하시고 사랑을 실천하게 하시고 말씀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마치 농사와 같다. 종자를 심었다고 바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여건에서 일정한 때가 되어야 싹이 난다. 적당한 환경이 조성되어야만 싹이 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의 씨앗이 마음에 뿌려졌다고 해서 말씀이 바로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환경을 갖추어야 한다. 그때 은혜의 단비가 내리면 그 비로 인해 씨앗이 자라기 시작하는 것이다.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말씀의 싹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듣고 배워두는 것이다. 듣고 배운 말씀이 없다면 생각나는 말씀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지런히 듣고 배워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말씀이 생각나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은 창작이 아니다.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들은 말씀, 깨달은 말씀, 배웠던 말씀을 적절한 상황에서 생각나게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성령이 오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셨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건과 성령 강림을 직접적으로 연결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시지 않으시면 성령이 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성령이 임하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야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는 성령의 역사가 없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비둘기 같이 성령이 임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잉태되셨을 때에도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 받으실 때에도 성령에 이끌려 가셨다. 이는 모두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이다. 예수님의 중요한 순간마다 모두 성령이 함께하시고, 성령의 역사로 이 일이 일어났다. 또한, 성경의 중요한 일들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구약부터 신약까지 성령의 역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나 지금이나 역사하고 있다.
그러면 왜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가야만 성령이 온다고 말씀하셨는가? 이 성령은 무엇인가? 이 성령은 일반적인 의미의 성령이 아니라 약속의 성령이기 때문이다. 창조 시에도 성령의 역사는 있었고, 선지자들에게도 성령은 역사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복음적 기능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전에는 없었으나, 예수님으로 인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내주이다. 그리고 이렇게 임하는 성령을 약속의 성령이라고 부른다. 한 사람이 구원받는 복음의 역사로 나타나는 약속의 성령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임한다.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약속의 성령은 십자가 사건과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다음에야 약속의 성령의 역사는 시작된다. 주님께서 이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이 성령을 받아야 한다. 이 성령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이 약속의 성령의 유익이 무엇인가?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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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망하시리라’는 ‘엘렝크세이’로, ‘엘렝코’의 미래 시제이다. ‘엘렝코’는 ‘밝히 드러내다’, ‘폭로하다’, ‘죄를 깨닫게 하다’, ‘바로잡다’, ‘꾸짖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이를 ‘책망하다’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죄’와는 연결이 되나, ‘의’와 ‘심판’에 대해서는 연결이 부자연스러워보인다. 좀 더 자연스럽게 풀자면, ‘성령은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밝히 드러내주고, 이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주는 일을 우리 안에서 해주신다’는 것이다.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정죄함을 받는 이유를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죄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에 대한 불신앙을 죄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달아 알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세상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불신앙 가운데 거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께서 임하시면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규정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죄보다 심각한 죄라고 성경에서는 말씀하신다. 성령이 임하시면 이것이 죄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행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설교가 사도행전 2장이다. 베드로가 죄를 지적했을 때,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마음의 찔림을 받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말하며 변화되었다. 베드로의 설교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책망한 것은 그들의 방탕함이나 타락, 부패함 때문이 아니었다. 베드로가 지적한 것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일이었다.

(행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행 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베드로는 명확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그들에게 경고하고 깨닫게 하고 있다. 그 결과가 37절이다.

(행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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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것은 로마 군병들이었다. 그런데 베드로의 말을 듣고 회개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말했다. 로마 군병들이 찔러 죽였고,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여기에 이르러서는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가 예수님을 못박았다고 판정하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인 것이다. 십자가는 2000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내 죄 때문에,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고백하고 나를 책망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2000년 전의 사건이 오늘날 나를 위한 사건이라고 이해할 수 없다. 성령이 내게 역사하셔야만 받아들일 수 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은혜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다.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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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의에 대해 말씀하신다. 성령이 의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주시고 바로잡아주신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의를 사람들이 행하는 도덕적인 규범을 잘 지키는 것을 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의의 기준에 따라, 예수님께서 사회 질서를 교란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신성 모독죄를 저질러서 처형받아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또 사람들은 예수님을 새로운 종교 운동을 일으켰다가 유대인과의 힘겨루기에서 실패한 지도자 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 하나님께 올라가셨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무죄하시고 완전히 의로우신 분임을 증명한다. 죄 있는 자가 다시 살아 예수님께 올라갈 수 없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으시고 하나님께 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심을 증거한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죄의 문제에 대한 유일하고도 완전한 해답이라는 사실은 의에 대해 증거하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알 수 없다. 성령이 없는 사람에게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이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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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희생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멸망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었다.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면 세상은 이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의로우심이 밝히 드러난 것이다.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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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로, 성령께서는 심판에 대한 인간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으시고 바로잡아주신다. 그러면 그 그릇된 생각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심판받으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통 가운데 죽으셨으나, 실제로 심판받은 것은 사단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주님께서는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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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는 외침은, 죄인을 위한 대속 뿐 아니라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사단을 심판하시는 일도 완성되었다고 선포하신 외침이었다. 사단은 죄와 사망, 두 가지 권세로 세상을 지배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죄에 대해 승리하셨고, 부활하심을 통해 죽음에 승리하시고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승리는 사단이 심판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세상의 죄와 사망의 권세를 잡고 있던 사단에 대한 심판이었다. 성령께서 이것을 밝히 드러내 알게 해주시는 것이다.

(행 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 2: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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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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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할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어떤 것을 증거하는가? 주님께서 가셔야만 성령이 오시고, 성령이 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이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증거하는가? 첫째로, 약속을 주신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증거한다. 둘째로, 주님께서 사단을 이기셨음을 증거한다. 성령께서 이것을 밝히 드러내셔서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세상은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심판 받았다고 생각하나, 예수님께서 다시 사셔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셨음을 통해 성령은 예수님이 아니라 사단이 심판받았음을 증거한다.
성령은 오늘날 우리와도 함께해주셔서, 그리스도의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핍박 중이든, 환난 중이든, 혼돈 가운데서도 성령을 의지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흔들리지 않는다. 죄와 의와 심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귀한 성령의 본질적 역사이다. 우리는 이 성령을 받았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위해서는 은혜의 단비가 내리도록,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성령의 역사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바른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미리 해주신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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