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제목] 병을 고치시는 주님 (요 4:46-54)
[설교자] 장종규 목자
[설교일] 2024년 6월 1일(토) 안식일오전예배
『46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54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내용입니다. 죽어가는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을 고쳤다는 것은 ‘놀라운 이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이적을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이라고 말씀합니다. ‘표적’이라고 하는 뜻은 ‘싸인’이란 뜻입니다. ‘싸인’은 ‘어떤 증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메시야’라고 하는 증거가 바로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자 되신다’라고 하는 것은 ‘이적을 행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심으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바로 구원자 되신다’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증거 하셨다’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구원자 되신다’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더 갖기를 원합니다.
1. 심령의 낙이 없다고 생각할 때 빨리 하나님을 생각하라!
46절 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셨다는 것은 그전에 45절을 말씀하게 되면 예루살렘에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예루살렘에 계셨다가 지금 갈릴리 가나라고 하는 곳에 이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가나를 가리켜 ‘예수님께서 전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을 행하신 내용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그런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던 것처럼 또 무엇인가 놀라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을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누구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왕의 신하라는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을 미리 암시하고 미리 보여주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기 왕의 신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왕의 말 그대로 왕의 신하인데 왕의 신하를 정확히 보면 왕에 속한 사람입니다. 왕의 신하는 여러 명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왕의 신하는 왕에 속한 사람입니다.
(야 2:8)『…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을 최고의 법이라고 말씀합니다. ‘최고’라고 하는 단어는 ‘왕의 신하’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왕의 신하는 그냥 웬만한 신하가 아니라 굉장히 높은 관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고 관리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린 아들’이라는 것을 뒤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아들이 ‘병들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들어서 죽어가고 있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왕의 신하는 고위 관리입니다. 그러면 돈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위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병들어서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왕의 신하는 어떤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마음이 평안과 마음의 즐거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다른 것을 다 가졌다 하더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이 이렇게 병들어서 죽어가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왕의 신하는 결코 ‘마음의 즐거움이나 또한 평안이 없었다’라는 걸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걸 가리켜 ‘낙이 없다’라고 표현합니다. (전 6:3)『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찌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무슨 말씀인지 아실 것입니다. 옛날 고대 신은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을 굉장한 큰 복이라고 여겼습니다. 자녀를 100명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장수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심령에 낙이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낙태된 자보다 못하다’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보다 ‘심령의 낙’, ‘제 마음의 평안과 마음의 즐거움’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마음의 즐거움과 평안이 없다면, 아무리 다른 걸 다 가졌다 하더래도 여기 말씀하는 것처럼 ‘낙태된 자보다 내가 못 하다’라고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마음의 평안과 즐거움이 물질적인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심령의 낙’이라고 하는 것 ‘마음의 즐거움’과 ‘마음의 평안함’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얻고 싶다고 해서 내가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성경은 ‘마음의 낙’, ‘마음의 즐거움’, ‘마음의 평안함’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왕의 신하를 보시면 아들이 건강만 하면 심령의 낙을 누릴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무리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을 초월하는 상황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낙이 없다고 생각할 때 내가 어떤 일로 인해 마음의 평안과 즐거움이 없고 그래서 정말로 소망이 없는 그런 삶을 느낀다고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심령의 낙’이라고 하는 것이 누구 손에서 나는 거라고 언급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령의 낙이 없다고 생각하실 때 빨리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나는 이러지 나는 평안도 즐거움도 없고 나는 굉장히 다른 사람보다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거든 빨리 하나님을 생각하시라는 것입니다.
2. 절망적인 상황이 처했을 때 주님께 의지하라!
본문 47절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왕인 신하가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에 있던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만나러 가나로 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왕의 신하는 그 당시 사회에서 굉장히 고위층이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상황이 아니라고 한다면, 예수님께 갈 일이 있었을까요? 없었을 것입니다. 뭐가 아쉽겠습니까? 그런데 왕의 신하가 지금 예수님께 가서 간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요? 자기 아들이 병들었고 죽어가고 있다 보니까 왕의 신하를 예수님께 나아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왕의 신하 모습을 보면 구약시대 생각나는 한 인물이 연상됩니다. 혹시 생각나는 사람 있습니까? ‘나아만’입니다. 성경은 나아만을 가리켜 ‘아람왕의 군대 장관’이요. 그리고 그의 주인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다’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큰 용사나 그는 ‘문둥병자였다’라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람 나라에서 아람 왕 그다음으로 가장 높은 그러한 지위를 갖고 있었던 사람이 나아만입니다.
그런데 문둥병자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린 나아만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이 나아만이 나중에 어디로 갔습니까? 이스라엘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게 됩니다. 왜? 찾아갔을까요? 자기가 문둥병에 걸렸으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나아만이 어떻게 이스라엘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게 됩니까? 자기 집에 아내를 수종드는 여종이 있었습니다. 이 여종은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계집아이가 자기 주모에게 “우리 이스라엘에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 선지자에 가면 우리 주인이 낫게 될 거다”라는 말을 합니다.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얘기를 듣고 자기 왕에게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군대장관은 오늘날 국방부 장관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집 아주 비천한 작은 여자아이의 말을 귀담아듣습니다. 평소에는 그럴 상황이 없을 것입니다. 여자아이의 말을 귀담아듣고 자기가 섬기는 왕에게 직접 전달합니다. 결국 나중에 거기 가서 자신의 문둥병이 낫게 되었다고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절망적인 상황들 특별히 몸의 질병들 그런 것들이 하나님께로 그 사람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계기가 된다’라고 말씀합니다. (고전 1:8-9)『…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아니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 허락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마음의 사형 선고를 받는 것 같은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허락하신다는 건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상황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하게 되는데 몸의 질병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성경은 이 여자를 가리켜 자신이 병을 고치려고 많은 의원에게 갔는데 오히려 더 고통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있는 것도 다 허비했고 아무 효용도 없고 도리어 더 상태가 중하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는 ‘그의 병이 고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자신의 병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가서 고침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처했을 때 특별히 어떤 몸의 질병이라고 하는 상황이 되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일단 주님을 의지하는 겁니다.
우리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금 말했던 이 열두 해에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자도 예수의 소문을 듣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예수님께 나아가게 됐고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상황들로 인해서 낙심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말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로 인해 심령의 낙이 없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인생들이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영혼들 에게는 바로 하나님 대신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상황을 알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지금 이런 상황 속에서 굉장히 힘들어하는 것을 내가 안다면 우린 그가 예수님께 나아가서 의지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져라!
본문 48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내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들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때 하셨던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너희는’이란 왕의 신하를 포함한 당시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가리키면서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아야만 믿게 되고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신앙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책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마 16:4)『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계속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 된다는 그런 표적을 계속 구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지 않은 게 아닙니다. 계속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그걸 요구하더라는 것입니다. 소위 ‘표적 주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들 ‘표적을 통해서 그걸 보고 예수님을 믿고 믿음을 갖는 신앙’은 결국 예수님께서 원하는 신앙 즉 예수님께서 기뻐하는 신앙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보면 안 믿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것을 보고 안 믿을 사람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렇게 믿었을 때 그 믿음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정말 놀랍고, 기쁘고 해서 믿고 무엇인가 그의 삶이 변화될 것 같이 보이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게 되면 다시 도로 원위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광야에서 이스라엘 모습을 보시면 40년 동안에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를 매일 같이 봅니다. 근데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항상 하나님 앞에 완악했다’라고 했습니다.
결국은 어떤 놀라운 이적을 보고 그것을 통해서 갖는 믿음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을 추구하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결코 원하시는 신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신앙은 무엇일까요?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 즉 뭔가를 보고 믿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믿는 것입니까? 말씀을 듣고 믿는 겁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게 되면 백부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백부장 자신의 종이 병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종의 병을 고쳐 달라고 했더니, 예수님께서 내가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백부장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주여 내 집에 오시는 것을 내가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말씀으로만 족하다’라고 말합니다. 말씀으로만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이만한 믿음을 내가 보지 못했다’라고 말하면서 그 백 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믿음이 어떤 거라는 걸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보아야만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 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믿는 겁니다. 이걸 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롬 10:17)『…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우리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 주인께서는 이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 대부분은 표적과 기사를 보아야만 믿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서 경계하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말씀대로 행하고 순종하라!
본문 49절 50절 말씀입니다.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신하가 예수님께 우리 집에 와달라고 간청합니다.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달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라! 내 아들이 살았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래 이 신하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예수님이 자기와 함께 집에 가면 아들이 병 고침을 받을 거라는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내 아들이 살았다’라는 말씀했을 때 왕의 신하가 그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고 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과 함께 자기의 집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자기 아들의 병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혼자 간 것입니다. 왜요?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내 아들이 살았다’라는 말씀을 듣고 정말 그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 갔습니다. 성경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다고 돼 있습니다. 그래서 왕의 신하는 그 말씀대로 간 것입니다. 믿으면 무엇으로 연결되는 것입니까? 믿으면 순종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한다면 그 말씀을 따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내가 가령 어떤 사람의 말을 정말 믿는다면 누군가와 어떤 말을 했는데 그 말을 정말 믿는다고 한다면, 그 말씀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 정말 믿는다면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이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정말 바라시는 그런 믿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51절 말씀입니다.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왕의 신하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자기 집 종들을 만납니다. 그는 그 종들을 통해서 ‘아들이 살았다’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된 것입니다. ‘가라 내 아들이 살았다’라는 그 말씀이 ‘그대로 됐다’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은 그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그대로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건데 정말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내가 믿고 있는가?’ 내가 정말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보면서 ‘하나의 말씀을 정말 믿고 있구나’라는 것을 내가 알 수가 있습니다. 내 삶 속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행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왜 그런 것입니까? 못 믿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그런 삶 속에서 어떤 부분들은 그 말씀대로 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행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일은 분명합니다.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당연히 그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었을 때 그 말씀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가라 내 아들이 나았다. 이 말씀을 ‘왕의 신하가 믿으니까’ 그의 말씀 그대로 되더라는 것입니다. (살전 2:13)『…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말씀이 믿는 자리에서 역사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 그대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내가 정말 그 말씀을 믿으면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다”라는 말씀처럼 사람은 말을 내뱉고 그 말을 도로 입속에 넣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내가 그 말씀대로 내가 했던 말을 내가 책임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입에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그 말씀대로 행하게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대로 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말씀대로 되려면 그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역사하지 못하고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우리가 말씀을 믿지 않아서라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아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반드시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요단강에 가서 몸을 7번 씻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몸이 깨끗하게 날 거라고 깨끗해질 거라고 우여곡절 있었지만 나아만은 그 말씀을 듣고 갔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7번씩 씻고 나왔습니다. 그러자 말씀대로 아이의 살 같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 그대로 역사 했다’라는 말씀으로 구약부터 신약까지 다 채워 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 오늘날 마찬가지로 말씀을 믿었을 때 말씀대로 역사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면 그 말씀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순종하는 것입니다.
5. 체험을 통해 믿음이 견고해지도록 순종에 힘쓰라!
본문 51절 52절 말씀입니다.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왕의 신하가 종들에게 물어봅니다. 아이가 언제 낫는지 그 시간이 보니까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에게 말씀했던 바로 그때였다는 것입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는 말씀했던 시간하고 실제 아들이 나았던 시간하고 같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됐을 때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 놀라운 일을 왕의 신하가 알게 되었을 때 왕의 신하도 믿고 그 온 집도 다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때 그 일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체험했을 때 그의 신앙 즉 믿음이 더 견고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던 그의 온 집은 이 일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보면 사람들은 믿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것도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믿음이 어떤 것입니까?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체험을 통한 믿음은 어떻습니까? 이런 체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온전해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이유는 그런 일들을 통해서 더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 역사를 체험하는 이러한 믿음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과 믿음의 본질은 아니나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함께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제자들이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즉 사도와 제자들이 전하는 그 말씀이 정말 맞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통해 보여주심으로써 그 말씀을 더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두 가지가 같이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게 되면 초대교회가 한편으로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고 그런 가운데서 복음을 전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건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참예수교회도 두 가지가 같이 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체험을 통한 믿음을 갖게 한 다음 현 상태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이적을 보고 기적을 보고 뭔가 하나를 믿지 않습니까? 이 상태에서 머무르는 신앙은 변질해 버립니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른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해서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결국 그들이 믿었다는 건 무엇입니까? ‘믿음은 결국 영원의 구원을 받음’이라 말씀합니다. 저와 그 어른들이 다 믿게 되었다고 한다는 것은 결국은 ‘그들이 다 이제 구원받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집이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건 하나님 뜻입니다. 하나님 한 개인만 믿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 그 온 집이 다 구원받기를 바라신다는 겁니다. (창 7:1)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노아에게 “너와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를 만드신 것은 그를 구원시키려고 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뿐 아니라 노아와 그의 온 집이 이 방주를 통해서 구원받도록 하셨습니다.
(히 11:7)『믿음으로 노아는 …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 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은 내게 속한 온 집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의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씀도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런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나 혼자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나의 집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그 사람을 통해서 온 가족을 다 구원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성도들은 나와 내 집이 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고, 힘써야 된다’라는 것을 또한 우리도 알아야 되겠습니다.
6.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동행하라!
본문 54절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싸인’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싸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의 신하의 병을 고쳐주심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아 된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신 표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마 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병자를 다 고쳐주셨는데 성경은 이 상황을 가리켜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하신 거였다’라고 말씀합니다. 선지사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었다는 것은 선지사 이사야를 통해서 그리스도 즉 메시아에 관한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걸 통해서 그가 바로 메시아라고 하는 것을 증거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는 이런 자고, 이런 분이라는 것입니다.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는’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이 메시아 즉, 구원자는 ‘병을 고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병으로부터 자유한 사람 있나요? 병으로부터 오늘 내가 건강했다고 하더라도 내일 병들 수 있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병은 육체의 병만 있는 게 아닙니다. 마음의 병도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살아가는 모든 사람 중에 이런 병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병을 고치시는 분이시기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 모든 병을 다 고치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는 경우가 있고 병을 고쳐주시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알겠는데 병을 고쳐주지 않은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오늘 말씀을 보면 메시아가 어떻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까?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11:28)『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짊어지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때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우리의 병을 짊어지셔서 우리를 쉬게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비록 우리의 육체적인 병을 고쳐주지 않더라도 우리 마음에 평안과 안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병을 다 고쳐주지 않으십니다. 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바울사도가 육체의 가시를 다 제거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의 병을 고쳐주지 않습니다. 왜? 그가 받은 가시가 너무 많아 자고할까 싶어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바울이 누구입니까? 바울은 나의 연약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모든 걸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유익을 위해서 때로 우리 병을 고쳐주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병을 고쳐주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병을 고쳐주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과정을 위해서 때론 우리의 병을 허락하시고 우리 병을 고치지 않으실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 하더래도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우리 쉼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걸 능히 감당케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 마음의 평안과 우리 마음의 즐거움을 허락하셔서 비록 내가 질병 가운데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마음이 평안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쉬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쉬는 겁니까?
(마 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그 쉼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내 멍에를 매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멍에를 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처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두 마리 소가 같이 멍에를 맺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멍에를 매자’라고 제안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처럼 이렇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힘을 얻는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행한다는 게 뭡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그럼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진 짐도 있는데, 예수님의 멍에를 또 맨다! 더 무거워질 것 같은데, 사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매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인생의 멍에를 맬 때, 인생에 짐을 지고 갈 때, 특히 내가 어떤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 내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게 되면 예수님께서 내 멍에의 짐을 짊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시 68:19)『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 특별히 우리가 어떤 질병의 문제로 인해 내가 짐을 지고 있을 때, 고통받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 짐을 대신 져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쉬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멍에를 매게 될 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능히 그걸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런 가운데서 내가 마음이 평안하고 마음이 즐거울 수 있도록 놀라운 그런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런 삶을 살면서 점점 예수님과 같은 삶이 되도록,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러한 삶을 되도록, 더욱더 배우고 그런 삶을 살아가다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짐을 더 많이 져주시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생의 짐이 다 해당하는 것으로 질병뿐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인생의 문제들 인생의 멍에들 짐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배우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내가 병이 있을 때 예수님을 통해 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병을 고쳐주셔서 쉬게 할 수도 있고, 내 육신의 병을 고치지 않으시지만 내 마음에 놀라운 예수그리스도의 평안을 허락하셔서 능히 감당할 수 있게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는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실 수 있는 바로 ‘우리 구원자 되신다’라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구원자 되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실제 삶 속에서 날마다 날마다 예수님이 우리와 동행해 주셔서 비록 우리가 가는 이 과정이 힘들고 어렵겠지만 예수님을 통해 평안과 즐거움을 얻고 능히 우리가 걸어가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데까지 큰 은혜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