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제목] 울지 말라 (눅 7:11-17)
[설교자] 전홍희 목자
[설교일] 2022년 10월 8일(토) 안식일 예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전쟁과 기근, 전염병과 갈등이 만연해 있는 곳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진면목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와 평안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시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1절에 나오는 ‘나인’이란 곳은 산지인 나사렛에서 동남쪽 10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대부분 척박한 이스라엘 땅에서 이토록 비옥한 곳을 볼 수 있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이곳은 이스르엘 평야가 시작되고 풍부한 채소와 과일이 풍부한 기쁘고 즐거운 곳입니다.
헬라어로 ‘나인’은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이 나인성 들어가셨을 때는 전혀 즐겁지 않은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12절에 한 과부의 독자가 죽어 상여를 메고 나오는 것을 보는 광경이 나옵니다.
남편을 잃은 고통도 큰 데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독자가 죽어서 너무 비통한 상황에 처한 한 과부를 예수님께서 보십니다.
성경에는 불쌍한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고아, 나그네, 그리고 과부입니다.
이런 가난한 자를 위하여 곡식을 베거나 과실을 수확할 때 일정 부분 남겨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범사에 복을 내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24장 19절입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 시리라(신 24:19)
이렇게 나인성에 있는 과부는 남편을 잃은 아픔에 더하여, 삶의 희망이요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외아들을 잃는 지극한 슬픔과 고통에 휩싸여 있으며, 다함이 없는 절망에 좌절하고 있습니다.
단어의 뜻과는 정반대로 즐거움의 성 나인성에 슬픔과 절망, 탄식과 울음소리가 가득합니다.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에 매료되어 즐거움과 기쁨이 가득한 곳으로 세상을 동경하지만, 사실 세상도 인생도 모두 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시편 90장 10절입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모세는 인생의 년수가 칠십이고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인생의 진면목을 제대로 본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현혹하는 외형에 치중하지 말고, 세상의 본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성도님들 되시기를 원합니다.
인생의 슬픔과 고통을 체험한 이 과부를 보시고 다가가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 이십니다.
누가복음 7장 13절입니다.
(눅 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불쌍히 여기다’는 말의 헬라어 어원은 ‘창자가 뒤틀려지는 것 ’이라고 합니다.
과부가 크게 고통스러워할 때 예수님께서는 창자가 뒤틀리는 심정으로 과부의 슬픔에 공감하십니다.
그리고 ‘울지 말라 ’고 위로의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 위로의 말을 해 야할 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에게 위로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울지 말라 ’는 말씀은 ‘어린이가 엄마 울지 마 ’하는 것과 같은 무기력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고 하신 것은 허황된 소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진정으로 과부를 위로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과부의 독자가 놓여 있는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명하십니다.
‘일어나라’ 명하셨더니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 앉고 말도 하여 과부에게 전해주십니다.
누가복음 7장 14절과 15절입니다.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눅 7:14-15)
생명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죽은 독자를 살려 주신 예수님의 권능을 체험한 이 과부는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여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세상은 행복과 소망이 가득한 성이 아니고, 슬픔과 고통이 가득한 곳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슬픔과 아픔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가서 그 앞에서 울며 통회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 상한 심령과 통곡하는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우리에게 참된 위로와 기쁨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긍휼을 베푸시는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은 오늘날 어디에 계실까요?
요한계시록 2장 1절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계 2:1)
예수님께서는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신다고 합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가리키는 것(계 1:20)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금 촛대, 즉 일곱 교회 사이를 거닐고 계십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예수님이 계시는 교회로 나오셔서 예수님을 만나 뵙고, 예수님 앞에 우리의 짐을 모두 내려놓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눈물의 기도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인생의 진면목을 경험한다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아시고 눈물을 닦아주실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서 마음을 쏟아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8절로 1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 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8-10)
성도 여러분!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에 놓일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복음을 모른 채 영원히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계 21:8)으로 향해가는 불쌍한 영혼들이 주변에 있다면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께로 나아와서 마음을 쏟아내야 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그 눈물을 보시고 위로와 평안, 구원과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글쓴이: 김세광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