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제목]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 11:1-15)
[설교자] 이엘리사 목자
[설교일] 2022년 9월 23일(금) 안식일저녁 예배
『…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12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15)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끈기 있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론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목표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살면 이 세상에서도 뭔가 좋은 일이 있으리라는 기대심리도 있습니다.
그 기대심리는 내가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시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리고, 늘 좋은 것이 주어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바쁘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동기 부여도 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충성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목하고 기억해서 언젠가 내게 꼭 좋은 걸로 보상해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한가요? 천국 기업의 확실한 증표인 성령을 받은 우리!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충성했는데도 오히려 심각한 어려움과 절망에 빠져들거나 예상 못 한 고통과 시련에 탄식하며 눈물 흘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성도라도 여전히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기에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회의가 들고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다른 이가 아닌 신앙인이 어떤 상황이나 사건으로 인해 믿음에 회의가 드는 것! 참으로 가슴 답답하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평생 실족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그 결과, 자신의 구원을 성공으로 완결할 수 있을까요?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던진 질문입니다.
당시 그는 헤롯 궁 부속 감옥에 갇힌 죄수였습니다. 유대의 분봉왕 헤롯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사실을 책망한 걸로 왕의 독한 미움을 샀기 때문입니다.(마14:3-4, 막6:17-18)
이런 상황이 요한에겐 매우 큰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주이자 만왕의 왕이시기에 악한 왕 헤롯을 물리치고 강대한 로마제국 치하에서 하나님의 선민을 해방시켜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저 옛날 찬란했던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리라. 그리고 나도 이 암울하고 숨 막히는 고통에서 풀려나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는 그의 간절한 소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였습니다. 하지만 자기 제자들을 통해 바깥세상의 상황을 알았습니다. 그가 전해 들은 예수님 소식은 자신의 기대와는 너무 달랐습니다. 그분의 사역은 악한 자들을 심판한다거나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요한은 점점 절망과 의심의 늪에 빠져들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세례 요한이 신앙의 회의에 빠지게 된 이유와
우리의 신앙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이런 질문을 만약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또는 일반 백성이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들의 신앙 수준이나 상태를 고려해보면 충분히 이해할만합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 그가 누군입니까?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사람입니다.(사40:3) 주 예수께 세례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받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와 주님 위에 머물렀던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이 보낸 분이라는 걸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확증한 바로 그 선지자입니다.(마 3:13-17) 어디 그뿐인가요?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떤 목적으로 이 세상에 오셨는지도 정확하게 아는 선지자였습니다.(마 3:11-12, 요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그런 그가 주 예수님을 의심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천사가 전한 하나님 말씀대로 엘리야의 심령을 갖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난 확실한 선지자(눅 1:13,17)가, 하나님의 사람 세례 요한이 어찌 그런 의심의 덫에 걸렸으며 신앙적인 회의(懷疑)에 빠지게 되었단 말인가요?
1. 환경의 악조건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 요한이 처한 환경이 나옵니다.
“요한이 옥에서” (마11:2)
헤롯 왕의 진노로 인해 그는 지금 왕궁 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곳은 캄캄하고 습기 차고 추운 곳입니다. 모진 고문이 있고 음식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곳입니다. 이제 더 이상 자유를 얻을 가능성이라곤 희박한 곳입니다. 정당한 재판 없이 불의한 권력에 의해 사형 집행 당할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찬 곳입니다. 그런 감옥에 요한이 갇혀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곳에서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며 육체의 제한을 받다 보면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평소 믿음 좋다고 평가받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넘어지는 자가 적지 않습니다. 어느새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주어진 환경에 절규하며 정신적으로도 처절한 고통을 겪습니다.
‘이제껏 나는 참 신앙을 갖고 살아왔다. 잘난 건 별로 없어도 내 나름대론 하나님을 위하고 진리를 위해 진실하고 의롭게 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뭔가. 결국 내게 주어지는 게 겨우 이런 거란 말인가. 이렇게 억울하고 수치스럽고 비참한 현실이란 말인가.’
이렇듯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쉽게 받는 존재입니다. 육체에 고난이 주어오면 마음이 변합니다. 신념이 흔들린다. 삶에 대한 꿈과 희망이 와르르 무너져 내립니다.
온전치 못한 믿음으론 별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판단해 보아 양심의 가책을 받을 게 없는데도, 특별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뜻밖에 도저히 감당 못 할 환경의 제한을 받거나 육체의 고난이 주어지면, 다른 사람들에게 심한 상처를 받고 수욕을 당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신앙에 회의가 찾아드는 것입니다.
2.온전치 못한 신앙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의 백성과 종교지도자들이 가진 메시야(그리스도) 관념이 있습니다. 그들이 고대하는 구주, 자신들에게 오실 메시야는 정치적 해방, 경제적 ․ 사회적 구원을 가져다줄 해방자였습니다. 당장 옳고 그른 것을 심판해서 세상의 모든 불의와 죄악을 척결해 주실 ‘심판 주(主)’였습니다.(마 3:7,10,12, 눅3:7,9)
그러나 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심판 주(主)’로 오신 게 아닙니다.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영원한 사망에 처해질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세의 불의나 죄악에 대한 심판은 언제 있다는 말인가요? 주님이 만민에 대한 ‘심판 주(主)’로 오시는 날, 곧 세상 끝 날입니다.(요 3:17, 12:47-48) 그때까지 하나님은 풍성한 긍휼과 자비로 오래 오래 참아주십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벧후 3:9)
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머리론 어느 정도 이해했을 진 몰라도 믿음으로 온전히 수용하진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메시야로 세상에 오신 걸 그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그리스도)가 오시면 큰 권능을 행하고 능력을 베푸신다. 그래서 불의와 죄악이 만연한 세상이 거룩하게 뒤바뀌는 굉장한 역사가 일어난다.’
그가 기대한 것은 다만 이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전해 들은 주님의 행적은 그것과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간절히 염원했던 하나님 나라가 자기 눈앞에 우뚝 세워질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놀라운 능력을 행하면서 조용히 천국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뿐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엠마오로 가던 그들은 권능과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무력하게 죄인들의 손에 붙들려가고 무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들이 매우 실망하고 낙담한 나머지 낙향해 자신들의 생업을 계속하려고 했던 이유입니다.
그때 홀연히,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서 동행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눅24:26)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경륜을 믿지 못하는 그들의 미련함과 불신앙을 주님께서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주님의 고난은 당연합니다. 죄와 그로 인한 형벌에서 인간을 구해내기 위해선 십자가의 희생은 반드시 치러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고난의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영광과 승리의 메시야만을 기대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3.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희생은 하나님의 더 큰 역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도록 썩어져야 하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그는 그걸 바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깨달음이 오기 전까지 어쩌면 그는 감옥 문이 열려 자유를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희구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감옥 문이 열리는 기적이 여러 번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그랬고, 바울과 실라도 그랬습니다. 그들이 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옥문이 열려 자유로운 몸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행12:3-19, 16:19-34)
하지만 야고보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목이 베여 순교를 했습니다. 스데반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복음을 증거 하다가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성난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행7:54-60)
왜 어떤 사람은 옥문이 열려 살고, 왜 또 어떤 사람은 비참하게 죽을까요? 그렇게 상반되는 일이 일어나는 건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요?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여러 번 기적이 일어나 살아납니다. 하지만 매번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로마의 감옥에서는 순교를 당합니다.
왜 어느 때는 기적이 일어나고 왜 또 어느 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그들에게 한 알의 밀알로 죽어 썩어져야 할 가장 적절한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마땅히 깨달아야 할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모든 문제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되어야만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다는, 지극히 잘못된 자기 본위의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결코 바른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처럼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 뜻 안에서 기꺼이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신앙으로 말미암는 자기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일으키는 한 알의 아름다운 밀알이 되려면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요12:24)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2.‘실족(失足)’의 의미
‘실족(失足)한다’는 것은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그 뜻을 좀 더 자세히 새기면 ‘발이 돌 같은 장애물에 걸려서 또는 부딪혀서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에서 “나”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고 바라고 믿는 모습과 너무 다른 모습의 예수님을 보고 신앙의 길에서 실패할 자가 있을 것임을 주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이 처한 지금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주 예수께서 이 세상의 불의를 외면하시고 특히 자기 같은 신실한 종의 의로운 고통을 외면하시는 것 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앙 면에서 깊은 의심과 침체에 빠져 있었습니다. 당시의 세례 요한에겐 하나의 크나큰 위기였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그런 여건에 놓여도 추호의 흔들림 없이 하나님 향한 신앙을 강하게 붙들고 힘차게 나아갈 수 있을까요? 주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항상 우리를 자기 눈동자처럼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요14:16-20) 그것을 우리는 머리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현실의 삶에선 그 믿음이 약해지거나 사라질 때가 적지 않습니다.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면 그 지식과는 영 딴판인 반응이 나타납니다. 주님을 이 세상의 현실적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무능한 분으로 잘못 판단합니다. 주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길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이유입니다.
처음엔 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나중엔 자신의 불신앙과 어리석음 때문에 구원의 길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론 주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한 게 되고 맙니다.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은 바로 그 반대 측면을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입니다.
2.실족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에게 주 예수님은 넘어지게 하는 돌이며 거치는 돌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온전히 믿는 자들은 구원과 영생을 얻어 부끄러움을 당치 않습니다.(롬9:31-33, 벧전2:6-8) 그들은 주 예수께서 행하시는 사역이 자기의 기대와 다를지라도 ‘실족(失足)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주 예수님을 메시야(그리스도)로 믿고 따릅니다.
그 결과는 영생복락의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계14:12, 21:1-7) 그들은 신앙에 대한 어떤 장애물도 극복해 냅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를 믿으며 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신앙을 견지합니다.(히10:36-39, 12:1-2)
모든 것을 보고 알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참 선지자로서 얼마나 신앙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며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인지를 아셨습니다.(마 11:7) 세례 요한은 자신의 안일을 위해 권력에 아부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마11:8), 주님이 그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평가하시고(마 11:11) 공개적으로 그를 인정하시고 높이 칭찬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고통이나 억울함을 당할지라도, 설상가상으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잘못된 평가를 받더라도, 또 모든 것이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당장 해결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믿음, 나의 진실, 나의 순종과 회개로 이루는 의로움을 아십니다. 나의 연약함, 내가 겪는 시련과 고난, 나의 인내까지 하나님은 전부 다 아십니다.(시 33:13-15, 94:9-10, 계 2:1-3)
그렇다고 아시는 걸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 마지막 날, 사람들의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굳게 믿어야 합니다.(전 12:13-14, 요 12:47-48, 롬 2:6-8)
맺는 말
성경을 살펴보면 세례 요한이 실족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떠나보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6)
주님 말씀에 의하면, 세례 요한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세상에서 가장 큰 자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도중에 신앙 면에서 실족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으로서 인생의 최대 실패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세상에서 별로 대단한 업적은 없어도 인내로 믿음을 잘 지켜 천국엔 겨우 꼴찌로 즉 <가장 작은 자>로 들어가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더 큰 자’입니다. 왜 그럴까요? 최소한의 자격요건을 갖춰 간신히 천국에 들어갔기에 천국에선 가장 작은 자로 평가받을 건 분명하겠지만, 결국엔 영생복락의 천국에 들어갔으므로 그야말로 ‘진정한 성공자’이기 때문입니다.(마 11:11)
이는 우리에게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믿음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려 줍니다. 그것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인내로써 끝까지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마 16:26-27, 딤전 6:17-18, 요일 2: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