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제목] 이스라엘아 들으라!

[본문말씀] 신 6:1~4

[설교자] 장병용 목자님

[설교일]  2024/07/20 (토)

 

Ⅰ. 배경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6:4)

 신명기는 모세가 모압평지에서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차례에 걸친 긴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법(율법)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내용입니다. 오늘 나눌 신명기 6장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Ⅱ. 내용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6:1)

성경에 ‘명령과 규례와 법도’로 분류해서 기록했지만 쉽게 ‘하나님의 법(法)’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법이 담고 있는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법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담겨 있습니다(창18:19).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체를 말하는 것인데, 성경에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고 쓰여 있습니다(창1:27). 형상의 진정한 의미는 겉으로 나타나는 육체적 외적 모습이 아니고, 육체를 벗고 난 후의 영적인 모습, 즉 ‘영적 외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적 형상의 발현은 여러분이 보고 있는 저의 이 모습(육체적 외적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발현된 것이지 실체(영적 외적 모습)는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바울이 부활을 설명한 예시에서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밭에 뿌리는 씨 즉 알갱이가 땅속에서 썩어 없어지고 생명체인 싹으로 나오는 그것을 실체(형체)라고 하였습니다. 내 육체가 죽은 후 신령한 몸(육체적 외적 모습을 벗고 난 후의 영적 외적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속사람에 따라 선한 부활도 있고 악한 부활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적 모습을 하나님을 닮아가는 선한 모습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이 ‘영적 내적 모습’ (히브리어로는 ‘데무트’)을 ‘모양’으로 번역하고 있고, 앞서 말씀드린 ‘영적 외적 모습’(히브리어로는 ‘쩨렘’)을 ‘형상’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창1:26; 5:3) (창5:1에서는 데무트인데 형상이라고 오역함.)

 

의미

히브리어

한글 번역

겉사람

육체적 외적 모습

 

 

속사람

(부활체가 되면 드러남)

영적 외적 모습

쩨렘

형상 (창1:26; 5:3)

영적 내적 모습

데무트

모양 (창1:26; 5:3)

 

‘영적 내적 모습’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의 인격(personality)을 ‘지정의’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지(知,智)는 지식 및 지혜의 세계, 지적 요소, 즉 머리 부분에 해당됩니다. 정(情)은 정적 요소로 가슴 부분에 해당되고, 의(意)는 선택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의지(意志)를 말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의(義)를 하나님의 지정의로 구체화하여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지정의는 완벽하여 ‘완전한 지정의’ 또는 ‘성숙한 지정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담 하와에게 넣어 준 지정의와는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인간에게 준 지정의는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만들었지만 완전 단계에 이르지 않은 ‘미성숙한 지정의’입니다. 이는 비록 미성숙한 지정의이기는 하나, 죄가 있거나 악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정의를 닮아 가도록 하신 겁니다. 즉, 인간의 순종과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하고자 함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니 성경에서는 두려워 할 것(경외,敬畏)과 자기를 돌아 볼 것(경건,敬虔)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그런데 미성숙한 지정의가 사탄의 영향(유혹)을 받아서 사탄의 씨앗이 인간에게 뿌려졌습니다. 그것이 ‘왜곡(歪曲)된 지정의’를 낳았습니다. 왜곡된 지정의는 ‘죄성(罪性)’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왜곡된 지정의는 우리의 생각, 말,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스럽지 않은 삶으로 이끄는 ‘죄(罪)’를 잉태하게 합니다 (약1:15).

하나님께서는 물침례와 성령침례를 하나님의 법 속에 담아 두고, 이것들을 축으로 하여 죄와 죄성을 해결하고, 의(義)를 성장시켜 하나님의 의를 인간 안에 풍성하게 담게 하십니다. 이 과정은 우리의 영적 내적 모습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만들어 가기 위한 단계입니다. 오염된 우리를 돕기 위해 하나님의 영(靈)이 오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의지하여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읽고 자녀들에게도 꾸준히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이뤄가는 것이 ‘성화(聖化)’입니다. 완벽한 지정의 즉 성경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완전한 지(知,智)’- 하나님의 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 지혜에 대하여, 그리고 ‘완전한 정(情)’-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분노하시고 애통하심에 대하여, ‘완전한 의(意)’- 하나님이 언제 행동하시고 참으시는지에 대하여 잘 깨달아야 합니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6:2)

 

하나님께서는 2절 말씀을 왜 강조하셨을까요? 첫째는 나와 내 아들과 손자로 평생에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기 위한 것, 둘째는 우리에게 명한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 셋째는 우리를 장수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장수는 행복이 가득한 장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장수는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신 이유가 3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6:3)

 

제일 중요한 것은 ‘복’입니다. 구약 성경에 복은 주로 3가지 단어로 쓰여 있습니다 (참조:시128편). ‘바라크’(축복)가 있고, ‘에쉐르’(행복)가 있습니다. 3절의 복은 ‘토브’입니다. 토브는 창세기 1장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의미입니다. (창1:10,12,18,21,31)

정리해 보면 ‘바라크’(축복)란 내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지식, 총명, 재물 등 이지요. 그런데 그 축복이 항상 ‘에쉐르’(행복)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 많아 행복한 경우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재물이 많으므로 불행으로 이어지는 상황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에쉐르’(행복)를 느끼며 살고 나를 돌아 보았을 때 ‘내 인생이 참 좋았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행복한 삶이 ‘토브’입니다.

3절의 첫 부분에서 ‘삼가’라는 단어는 원문에 ‘울타리를 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잘 보관하고 그 보관된 말씀을 따라서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행복한 삶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좋고 아름다운 복을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셔서 하나님 말씀을 행하고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참 좋았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을 통틀어 고찰해 보니 다음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참조:시122편). 첫째 ‘평안(平安)’의 삶입니다. 마음이 평안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둘째는 ‘형통(亨通)’의 삶입니다. 즉 내 삶이 하나님 뜻에 맞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순리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한 삶인 ‘평안과 형통’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명기에서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요약해 봅니다.

첫째, 우리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때마다 귀를 기울이고 듣고 그 말씀을 내 울타리 안에 간직해서 행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행할 때 한 번에 완벽하길 바라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완벽하게 행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속죄법(贖罪法)을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속죄법을 만든 것은 우리가 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는 사탄이 뿌린 씨앗, 즉 ‘왜곡된 지정의’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유혹을 받거나 약해지면 이 왜곡된 지정의가 작동하고 그것이 ‘죄’를 낳습니다. 우리의 신앙 삶은 이렇게 넘어지면서 일어나는 반복되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삶이 이뤄져야 합니다.

영광과 비슷한 용어가 ‘자랑’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칭찬도 자랑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장 31절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의 원문에 따른 정확한 번역은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하라’입니다(렘9:23,24). 영광은 나중에 우리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주십니다. 영광의 면류관(월계관)입니다.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많을수록 많은 영광을 받을 것이고 적으면 조금 받겠지요!

셋째,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우리를 세워주시고 현재의 모습을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지식, 재물 등 나눌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눌 때 나누는 그 손길이 하나님의 도(道)가 되고 하나님의 손이 되어 역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세계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성령 안에서 의(義), 평안(平安), 희락(喜樂)입니다(롬14:17). 하나님께서는 기쁨이 충만되고 의가 충만된 그런 하나님 나라를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 공동체에서 이루어야 할 내용이고 천국에서 이루어질 내용입니다.

이것들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신명기 6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자 굉장히 절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 자체도 복이고, 더 나아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그 복을 향유할 수 있음이 하나님의 뜻이고 창조의 목적임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온 힘을 다하여 행하여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 속에 이루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