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30. 화요일 밤 간증회(이명철 형제)
할렐루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께 받은 은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경 한 구절 읽겠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17
성도님들께 안부인사
할렐루야 동부교회 성도님들 평안하신지요. 제가 오늘 교회를 오며 헤아려보니, 오늘이 저희 부부가 동부교회로 전입온 지 2개월이 되는 날이더라구요. 먼저 그간 저희가 성도님들과 함께 예배드리며 많은 은혜와 평안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저희가 동부교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는 성도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무쪼록 이번 시간, 제가 드리는 간증을 통해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만이 드러나면_ 좋겠습니다.
제가 동부교회에 출석하면서 받은 몇 가지 첫 인상이 있습니다. 우선 목자님 사모님 인상이 굉장히 좋으시고, 성도님들의 마음이 따뜻하시다는 것 외에, 젊은 청년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큰 향방을 결정하는 순간에 있는 우리 젊은 청년들에게 조금이나마 공감 그리고 참고가 될 수 있는 저의 경험을 몇 가지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다
저는 태어나서부터 목회자의 식구로 교회에 살면서도,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는 것을 세밀하게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꼬마 시절 동부교회에도 있었지만 그 이후 전주교회로 옮겨 신앙생활을 하였는데요, 그 때 교회에 자주 와서 기도를 하는, 교회 전체적인 차원의 기도 운동이 있었습니다. 전주교회 2층 예배당 입구 옆 게시판에 아주 큼지막한 표_ 희망자에 한해,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쓴 다음, 교회에 와서 개인적으로 기도를 할 때마다 자신의 이름 칸에 동그라미 표시를 해나가는 식이었습니다. 너무 예전이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각 가정에서 기도를 하여도 표시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히 기억을 하는데요, 그 큰 기도표 맨 위에 ‘주님, 저 왔어요’ 라는 큰 문구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제 이름 칸에 동그라미를 꾸준히 표시해야겠다는 동기 외에도, 다른 친구들은 다 성령을 받았는데 교회에 살고 평일 예배까지 출석하는 제가 성령을 못 받고 있다는 것이 속상한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겨울 영은회가 끝나고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2층 예배당으로 올라가 혼자 기도를 하고 다시 사택으로 내려와 씻고 밥 먹고 학교를 가는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초등부 영은회가 보통 며칠이니까, 그것의 스무 배, 그러니까 한 달 정도 이렇게 기도하면 주시겠지.. 그런데 쉽게 안 주시더라구요. 나중에는 오기가 생겨서 두 달, 세 달 계속 그렇게 하였습니다.
전주교회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교회 예배당이 매우 정겹고 아름답습니다. 새벽 아침에 예배당에 올라가면 한 쪽 창에서 햇살이 빗금치듯이 들어오구요. 그 햇살에 비쳐 흩날리는 입자들이 반짝입니다. 바로 옆 산에서 맑은 공기와 지저귀는 새 소리가 불어오고.. 그 곳에는 하나님과 저만이 있습니다. 그 게시판의 팻말처럼, 주님 저 왔어요. 하면, 그래 왔니, 내 아들아. 비록 지금 당장 제게 성령을 주지 않으실지라도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는 이 순간이 좋습니다. 하며 그 고요한 햇살 속에서 저를 품어주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하나님의 사랑를 느끼며 기도를 하다보니, 새벽에 예배당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는 것이 오히려 내심 기대까지 되었고, 하루 하루 하나님께서 저의 매일을 깊이 동행해주신다는 느낌을 난생 처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연초부터 시작한 기도는, 수개월 더 드린 끝에 그 해 가을, 하나님께 성령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며 진로를 인도해주시다
기다리던 끝에 성령이란 선물을 받았으니, 그럼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교회 예배를 잘 드리고, 교회에 봉사를 하고,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뭔가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시대도 바뀌었고, 각자의 달란트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세상의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제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어린 마음에는, 현재 내가 학생이니, 주어진 현재의 활동, 그러니까 공부를 열심히 그리고 잘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 중 하나 일 수 있겠다.. 하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니던 학교가 전주에 공부를 열심히 시키던 학교 중 하나라 항상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참 쉽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마침 교회 안에 공부를 잘하시는 형들이 있어서 그 형들을 유심히 관찰하기로 했습니다. 여기 자발적으로 앉아있는 우리 청년들처럼, 그 형들도 평일 예배, 안식일 예배를 온전히 다 드리고, 예배가 끝나고 어디론가 가더라구요. 그래서 집에 갔나보다 하고 근처 독서실에 가보니, 벌써 거기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더라구요. 입시가 치열했던 그 시기에, 서울도 아닌 전주 일반인문고교에서 착실하게 신앙생활, 그리고 공부를 하며 결과적으로 모두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좋은 대학을 가는 것만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 예배를 온전히 드리고 주어진 여건에서 자신의 달란트로 최선을 다하는 자녀에게 하나님께서 절대 손해는 보게 하시지 않는구나라는 간접적인 경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아버지가 대방교회로 부임하시면서,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전학간 학교가 OO포 고등학교였습니다. 학교가 공부를 잘 못해서 똥포 고등학교로 불렸는데요, 심지어 첫 해 담임 선생님이 제게 전학을 권유하실 정도였습니다. 하루는 제 어머니가 제게 무언가 가져다 주실 것이 있어서 제게 방해가 될까봐, 제게 말씀하시지 않고 학교에 살짝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교실 뒷 문에서 저 말고 다른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고 있는 것을 보시고, 상당한 충격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야간 자율 학습도 있었는데, 참여한 학생이 저를 포함해 고등학교 1~3학년까지 전교에서 2명이었고, 끝까지 매일 꾸준히 참여한 학생은 저 1명이었습니다. 분명 저 말고도 각 가정이나 학원에서 성실히 공부를 한 학생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저는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학교가 교회까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거든요. 텅 빈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불안할 때, 힘이 들 때, 언제든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렸고 찬양했습니다. 평일 예배도 참석하였습니다. 수능시험을 치르기 전에 하나님 말씀을 일독하는 게 먼저라는 마음을 갖게 해주셔서, 성경통독도 고3때 처음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가까이 있게 해주신 은혜에, 저 또한 전주에서 보았던 그 형들과 같은 방식으로 신앙생활과 공부를 성실히 할 수 있었습니다. 혼자서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 같은 일상에 저를 지탱해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 주변 많은 분들의 격려와 기도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제 적성과 형편에 부합하는 학교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학교를 지원할 때, 학과도 정하잖아요. 당시 주변에서 세상적으로 유망한 이런 저런 학과들을 추천하시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기도 가운데, 직업을 위해 학과를 택하기보다, 제가 여러모로 부족함에도,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구할 수 있겠다 싶은 전공을 택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두에 저희가 읽었던 잠언 말씀구절에 뒤이어 이런 말씀이 있는데요,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으니라‘ (잠 8:19)
오늘날을, 투자 대비 효율을 중시하는 가성비의 시대라고 합니다. 저는 제가 그간 공부한 것에 비해 더 많은 인정과 수익을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제 장래를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인도하시리라는 평안과 담대함을 얻고 싶었습니다. 방금 읽었던 구절처럼, 이 땅의 정금이나 천은보다 하나님 나라에서 주실 상급에 더 큰 의미를 두며 살고 싶었습니다. 임용시험에 합격해야만 하나님 은혜, 불합격이면 무조건 내 부족함이라기보다, 하나님을 구하며 현실의 시험을 준비할 수 있게 해주신 과정- 돌아보면 그 과정 자체가 하나님께서 제게 허락하신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군(軍) 복무로 인도해주시다
그런데 남자는 대학교를 진학해도, 또 군대라는 관문이 있잖아요. 그 때만 해도 군대에서 여러 안전 사고 등 들리는 뉴스들이 있어서 어린 마음에 무언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잘 다니지 못하는 부분이 제일 우려가 되었습니다. 그 때 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교회에 어떤 분이 군대를 가신다고 교회에서 환송회를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를 또, 그리고 그 다음달에 또, 생각보다 자주 오시더라구요. 그래서 그게 무엇인가 알아보니, 대학교를 다니며 훈련을 받고 이후 임관하는, 학군장교라는 제도가 있더라구요. 아, 이거라면 내가 군복무 중에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겠구나. 하지만 지금보다 제가 그 때 더 체격이 왜소했고 체력이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시에는 취업난에 더불어 학군장교 경쟁률도 상당하여 제가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때 유년시절, 성령을 구하며 하나님을 찾던 제 마음을 다시 떠오르게 해주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제게 신앙적 동기를 부여해주었습니다. 다시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혼자 공원에 뛰어가 시험 종목들을 연습하는 준비를 1년여 정도 한 끝에 학군장교에 들어갈 수 있게 인도해주셨습니다. 강원도 전방이나 교통이 불편한 산지 부대에 배치받은 동기들과 달리, 오직 저만 인천교회에 대중교통 20분이면 갈 수 있는 부대로 배치받게 해주셨습니다. 장교도 밤을 새우는 평일 근무, 종일 근무하는 주말 근무를 서야하는데요, 군 간부들이 제일 기피하는 근무 요일 중 하나가 토요일입니다. 왜냐하면 토요일 근무하고 이튿날 일요일을 쉬면 주말이 없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제 막 들어온 막내 초임 장교임에도, 일요일, 공휴일에 근무를 더 서는 대신, 교회에 갈 수 있도록 전역할 때까지 토요일 근무를 제외시켜주시는 상관을 만나게 해주셔서 군 복무 기간 동안 안식일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군 복무에 있어서 제가 가장 바라던, 안식일을 지키는 은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미국으로 인도해주시다
제가 미국에서 몇 년이라도 공부하고자 했던 동기도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 생활을 더 잘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군 전역 직후 아버지의 권유로 미국 동부에서 열리는 단기 신학을 다녀올 기회를 얻었고, 그곳에서 많은 목자님들, 신앙의 선배님들, 청년들을 통해 제 신앙이 더 발전되어야 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조금 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신앙과 제 전공에 힘을 써서 하나님 앞에 조금이나마 더 나은 그릇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 나이나 현실적 여건을 고려했을 때 우려하시는 분들이 많았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두고 기도를 하며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교원이 휴직을 하고 유학을 가는 것이 그렇게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휴직을 할 수 있는 규정이 비교적 완화되었고, 그것을 교장 교감 선생님께서 제게 먼저 알려주셨습니다. 본래 젊은 남자 선생님을 보내는 것을 잘 추천하지 않지만, 그간 학교에서 근무한 태도와 실적을 고려하였을 때 한 해라도 젊었을 때 외국에 나가서 추가적인 공부를 하면 좋겠다고, 교장 교감선생님께서 믿고 먼저 추천을 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교육청의 최종 면접 심사 때도 면접관분들 중, 과거 교육청 주관 행사 때 저를 눈여겨 보셨던 장학사님이 계셨습니다. 인사 규정이 바뀐 후 제가 최초 지원자였음에도, 매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저를 보내주시기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상황적 인도하심 가운데 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미국에 도착했을 때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많이 멀었습니다.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론 가는 길에 교회 형제, 성도님들께서 차를 함께 태워주셨는데, 참 감사하면서도 죄송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교회에 봉사하고 싶었지만 저로 하여금 먼저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나중에 그 분들과 가까워진 이후 들은 이야기이지만, 제가 한국에서 아무리 신앙생활을 착실히 했다 해도, 그리고 인접 뉴욕 교회에서 지난 한 해 동안 신앙생활을 해서 그간 저에 대해 들은 바가 있다 하여도, 출석 교회에서 많은 성도들과 임원들이 직접 신앙생활을 함께하며 제게 적응할 시간을 주고, 저를 지켜보고 직접 검증하는 시기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 교회 임원 한 분이 제게 다가와, 교회 생활관에 들어와 교회를 위해 봉사해주지 않겠냐고 먼저 물어오셨습니다. 이미 한 명의 형제가 있지만, 교회에 일손이 많이 필요하여 제가 들어와 같이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의하셨습니다. 제가 미국 교회에서 충분히 덕을 끼치며 잘 할 수 있을까, 부모님께서는 학교 기숙사에 그대로 남아 지내는 것이 어떨까_ 하셨지만 저는 교회에 가까이 지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감사했습니다. 먼저 교회 임원분들께서 저를 인터뷰하시고, 그 간의 제 신앙생활의 태도와 왜 들어오려 하는 것이며, 어떻게 봉사할지 등의 대답 내용을 가지고 다시 직무임원회의를 통해 가장 가까이에서 교회를 섬길 기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의 사랑과 신중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각 나라와 교회 실정을 고려하여, 본교 목자님께서도 말씀하신대로, 그리고 현재 우리 동부교회 성도님들처럼,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성업에 힘쓰는 모습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저는 남은 기간을 교회에 가까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새벽 하나님을 만나고 교회에 봉사하며 많은 신앙의 선배님들과 동역자분들을 통해 신앙의 여러 모습들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그 때는 제가 홀몸에, 휴직을 하고 공부를 하는 학생 신분이었고, 그것도 교회에 거주하며 봉사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이 참 감사합니다. 마침 제가 출석하던 교회가 대전 총회와 같이 많은 교회 행사가 주최되는 곳이었고 현재는 미국 총회의 교육센터로 다시금 거듭나는 중에 있습니다. 그 교회를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며 미국 청년 및 성도로서 할 수 있는 행사와 교육프로그램들을 자연스레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전반적인 미국 생활과 학업을 인도해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덤 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기 전 하나님께 가장 바라고 구했던 모든 것을 당신은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그 분의 마음을 함께 구할 수 있도록 배우자를 만나게 해주시다
그렇게 교회에 머물며 집중적인 신앙의 수련 기간을 거치는 동안, 제 자신의 밑바닥이 더욱 적나라하게 깨달아졌습니다. 말세를 향해 가는 세상 속에, 제 자신은 너무도 연약했고, 제 신앙을 홀로 지킬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간 목자님들께 배운대로, 제가 배우자에 관해 기도한 두어 가지 기도 제목이 있었는데요, 그 중 가장 큰 하나가 하나님의 뜻이라면 저와 함께 어디든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물리적 환경의 변화 뿐 아니라 신앙적 도전도 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제 자신에 비교해보았을 때 훌륭하신 자매님들이 많았습니다. 예의상의 말이 아니라 정말 그랬습니다. 누군가와 꼭 비교하기보다, 상대방에게 무얼 바라기 전에, 제 자신부터가 제 기도 제목을 감당할 수 있는 신앙적 성숙과 용기, 그리고 책임감이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상대 자매에게도 저로 인해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제 현재 현실적 상태에 대해 기대게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스스로의 미래를 책임질 수 없는 한 명의 피조물이자 인간이었기에, 누가 되었든 결혼 전 제가 어떠한 약속을 하거나, 소문을 낼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상황적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제 부족한 신앙적·인품적 됨됨이 때문에, 배우자 기도로 정확히 10년이 채워지는 시점에 지금의 자매를 아내로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신앙의 한 가정을 이루는 것에 있어서, 그냥 평상적인 기도가 아닌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서 보니, 갈수록 아내에 대한 제 사랑이 깊어지는 가운데, 저희를 신부로 사랑하시는 당신의 마음을 점점 더 체험하고 있음에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며 변함없이 인도해주시는 은혜
앞서 저희가 불렀던 찬양 499장(저 장미꽃 위의 이슬)처럼, 미국의 예배당 새벽 아침에도 전주교회와 같이 정확히 같은 방향에서 햇살이 빗금치듯 들어옵니다. 흩날리는 입자들이 햇살에 빛나고, 바로 옆 창문에서 맑은 공기와 지저귀는 새 소리가 불어들어옵니다. 예배당 밖에서 사슴들이 풀을 뜯고 안에서는 하나님과 저만이 있습니다. 20년 전 전주의 예배당에서 한 소년을 안아주시던 당신은, 먼 타국에서도 저와 함께 동행해주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바라던 제 소망과 기도들을 더욱 놀랍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채워주셨습니다. 먼저 당신의 마음을 구할 때에, 제 앞의 현실을 극복할 힘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마침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쯤, 교회 앞 잔디밭에 죽은 나무가 있었는데요, 그간 저를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제 사비로 한 그루- 향기나는 작은 묘목을 심어드릴 수 있게 허락해주셨습니다. 성도님들의 시야를 가리지 않게 하기 위해, 교회 앞 마당에 심어드린 그 작은 나무는 올해 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전 회기동 교회로 돌아와_ 성도님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의 개인적인 일을 통해 저희 부부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금 배우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당신의 애타는 부르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곳에 계신 모든 분들이 당신께서 간절히 사랑하시는 자녀임을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서두에 읽었던 잠언 8장 17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성도님 여러분, 저희 부부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을 찾고 사랑하는, 저희에게 훌륭한 신앙의 모범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또한, 하나님 안에서 지금처럼 함께 화목하며,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그 신앙의 여정에 함께 하기를 겸손히 소망합니다. 이 모든 은혜와 감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립니다. 아멘.
3월에 전입한 이명철 형제 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