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증하겠습니다.

먼저 저에게 간증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몇 번의 경험과 긴 여정으로 저의 신앙을 다시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멕시코에서 잠시 한국행을 결정 

저의 자녀가 세 살 되던 해, 남편이 회사에서 멕시코 법인지사 법인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그렇게 참예수교회도, 참예수교회 성도도 한 명 없는 나라(멕시코)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멕시코에서의 시간은 5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쑥스럽지만 지난 5년 동안 저희는 예배다운 예배를 드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남편과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정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저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어린 딸과 함께 시도를 해보긴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는 예배가 무엇인지 기도가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하였고 무릎 꿇는 것도 집중하는 것도 힘들어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아이는 카톨릭 학교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는 가톨릭 학교답게 매주 미사가 있었고 부활절, 성탄절 등등 때마다 각종 가톨릭 행사를 지켰습니다. 기도를 할 때는 삼위일체 성자·성부·성모 성호를 그으면서 기도를 가르쳐 주기 때문에 엄마가 기도하는 방법을 다시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희야 너는 성호를 긋고 기도 하는 거 하면 안 돼! 우리는 주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 나름대로 참예수교회의 진리를 가르쳐 주곤 했지만 가르침에 부족함이 있었고, 아이도 귀로는 엄마의 가르침을 듣지만, 머리로는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이의 신앙교육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더욱 두려운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코로나였습니다. 멕시코에서는 코로나로 사망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를 직면하면서 두려웠었고 남편의 비즈니스, 아이의 학업, 저의 일터인 대학강의 와 공연 등 모든 일상이 바뀌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외부 출타가 제한되었고 모든 일상을 집에서 온라인(Zoom)을 통해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활은 일 년 반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집이라는 제한적인 공간에서 모든 일상이 이뤄지면서 가족들은 수없이 부딪히기 시작했고 정신과 육체적으로 힘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그리고 저도 저대로 스트레스와 예민함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잦은 부딪힘으로 부부 사이에도 위기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저희에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이 부족했으므로 오랜 팬데믹 속에 두려움과 우울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랜 고민 끝에 잠시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제 판단에 코로나 시국에 가장 안전한 나라는 대한민국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한민국은 K-방역으로 이슈가 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평소 걱정되었던 자녀의 신앙교육과 한국어교육을 위해서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부부 사이의 위기의식을 느꼈던 저희 부부는 잠시 떨어져 서로 차분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느꼈고 잠시 한국행에 대하여 합의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통해 오랜 문제를 해결 

저와 아이가 한국에서 지낼 곳을 찾는 과정에서 미국에 계신 부모님(우요한 목자님, 故 이명주  사모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부모님을 모셔 와서 함께 지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에게 할아버지·할머니의 정도 느끼게 해주고, 할아버지로부터 신앙교육도 받고, 가족들이 함께 교회에 나가서 예배도 드리고, 한국 이곳저곳을 여행도 다니며 한국이라는 나라와 문화도 경험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부모님께 늘 사랑과 지원을 받기만 했기 때문에 보답할 기회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상상에 마음이 설레 있었습니다. 형제들과 의논 끝에 부모님은 십여 년 만에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상상은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상상과 현실은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한 달도 안 되어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미국에 계실 때부터 치매를 앓고 계셨습니다. 모시기 전까지 큰 염려는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부모님은 흔히들 말하는 착한 치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님이시니까 부모와 자식 간이기에 충분히 잘 모실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치매라는 병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육체적으로 굉장히 고단했습니다. 눈을 뗄 수도 없었고 잠시라도 잊을 수 없었고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잠드셨을 때도 모든 신경을 쏟아야 했습니다. 간혹 부모님의 치매 증상으로 의도치 않게 폐를 끼치는 당황스러운 일들을 겪기도 했습니다. 때마다 과도한 신경 씀으로 인해 혈압이 오르기도 했습니다. 몸과 마음 모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저는 급성 고혈압으로 응급실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에 저뿐 아니라 아이도 무척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힘든 와중에도 신앙교육과 한국어교육, 한국 문화에 대한 교육을 잘 흡수하고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미쳐 세심히 돌보지 못했던 아이를 인도해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엄마로서 또 자녀로서 힘을 내야만 했습니다.  

나 자신이 그다지 훌륭한 효녀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부모님을 모시는 동안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기로 했습니다. 치매라는 병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치매 요양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하였고, 치매 노인을 보살피는 노하우도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양사로서의 형편과 내 부모를 대하는 형편은 참 달랐습니다. 마음이 온전히 비워지지 않았습니다. 참 답이 없다는 심정으로 동동거릴 때쯤에 이 시간을 보상해 주는 듯 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희 가정은 남편의 실수로 인해 경제적인 파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법원에 파산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치매 걸린 두 부모님을 혼자 모시고 있다는 이유가 반영되어 판결이 아주 쉽게 진행되었고 파산 문제가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몇 년을 힘들고 고단했던 문제가 부모님으로 인해 쉽게 해결이 된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매일같이 힘들다고 뱉어 내기만 했는데 말이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모님을 모시며 끙끙대는 저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셨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겪으며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신 동안 효도할 기회이며 하나님께서 부모님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회복시켜 주심

다시 한국에서의 신앙생활은 지난 5년간 멕시코에서의 생활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먼저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의 자리에 참예할 수 있었고, 설교 말씀을 마음에 새겨들을 수 있었고, 성도님들과 함께 부르는 찬양과 성도님들과 함께 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나 은혜였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저희 모녀는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많은 성도님의 배려와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우리 유니게회(소속 신도회) 자매님들의 사랑은 저의 영혼을  다시 촉촉하게 적시는 치료와도 같았습니다. 마치 딱딱하게 메말라 굳어 있던 저의 심장과 영혼이 재충전 되는 것 같았습니다. 믿음 안에서 자매님들과 교제를 나누며 진정한 신앙고백을 뱉을 수 있었습니다. 소중한 만남을 허락해 주셨고, 이렇게 저를 다시 단단하게 또 바로 세워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평안을 주셨을 때 비로소 남편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남편은 고혈압이 있었고 그 때문에 종종 힘들어하곤 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남편의 고통과 그 강도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지사지라는 말과 같이 제가 급성 고혈압으로 고통을 경험하게 되면서 평소 남편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육체적 고통과 남편의 입장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할 기회를 허락 해 주신 것입니다. 다시 남편과의 갈등을 직면하게 된다면 유니게회 자매들에게 받은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남편의 마음을 더욱 헤아리며 이겨낼 힘이 생겼습니다. 감사주!

 

믿음의 동역자로 세워주신 자녀

*희(자녀/4학년)는 정말 많은 변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신앙이 무엇인지, 참예수교회의 진리가 무엇인지, 성령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 주시는지를 배우고 깨닫고 있습니다. 

한 에피소드를 말씀드리자면, *희가 학교에서 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비둘기 이미지에 대한 내용으로 생각을 나눌 때였습니다. 아마도 다른 아이들은 평화라든지, 공원이라든지 라고 말했을테지요. 그러나 다희는 당당히 “비둘기는 성령!”이라고 답했고, 아이들의 놀림에도 그 생각은 전혀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씩씩거리며 하교 했습니다. *희는 결국 아동부 소풍에 새 친구를 데리고 오기도 했습니다.

어디서 이런 당당함이 나왔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겠지요? 

저희 모녀는 행복하고 감사가 가득한 2년의 시간을 보냈고, 다시 멕시코에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렇지만 이젠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모녀의 신앙을 회복시켜 주셨고 저와 아이는 서로에게 든든한 동역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우리가 어느 곳에 지내며, 어떤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고 하더라고 저와 아이는 함께 손잡고 기도하며 예배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도망치듯 떠나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2년의 시간 동안 저를 회복시키신 것도 모자라 자녀를 믿음의 동역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예비 하심과 인도하심은 항상 제 생각을 뛰어넘었습니다. 임마누엘! 

 

어머니의 소천

얼마 전(3월 10일) 어머니(故 이명주 사모님)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심장 판막 문제로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으셨습니다. 늘 다리저 림으로 힘들어하셨지요. 

어머니는 기력이 쇠하여지면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중이었습니다. 당연히 고령의 나이다 보니 여러 곳의 기능이 떨어진 상태로 쉽게 호전되지는  않았습니다. 

멕시코로 다시 돌아갈 날은(4월 18일) 정해졌지만 이런 어머니를 뒤로하고 다시 멕시코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아주 괴로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생전에 막내딸을 항상 애정 해 주시던 어머니는 제가 멕시코로 다시 돌아가기 전 소천 하셨습니다. 가족 모두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가족 모두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 주셨죠) 모든 장례도 무사히 치를 수 있었습니다. 무거웠던 제 발걸음의 무게를 그렇게 덜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소천은 저의 신앙을 한 번 더 다잡게 했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더욱 사모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을 꼭 전승해야겠다 다짐하게 하셨지요.

엄마!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물려주신 이 믿음 끝까지 잘 지키며 굳건히 살아가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유니게회.  2022년 하늘공원 나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