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증하겠습니다.

 저희 가족 구성원은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저까지 3명입니다. 잦은 업무로 인해 바쁘셨던 아버지였기에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할머니는 저의 엄마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당시 이모할머니(대방교회 서정임)께서는 할머니를 전도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주말에도 일을 나가시거나, 일이 없는 날에는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셨고, 남은 저는 할머니와 시장 구경을 가거나 할머니들의 수다 모임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유일한 친구였던 할머니가 없자 토요일은 제게 너무나도 심심했습니다. 하루는 심심한 나머지 ‘그냥 한 번만 따라갔다 와볼까?’라는 생각에 할머니께 나도 데려가라, 따라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모할머니를 만나 셋이 함께 천안교회에 도착했습니다. 천안교회에 대한 첫인상은 엄청난 환영이었습니다. 교회에 도착한 뒤부터 집으로 갈 때까지 엄청난 환대와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고, 다음주 안식일이 찾아왔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빈둥거리며 누워있는 저에게 “정아, 교회 갈 준비 안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너무 당황했습니다. 그냥 딱 한 번만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당연하단 듯 준비하라는 할머니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왜 그랬는지 저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교회 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음주에도, 또 그 다음주에도.. 교회 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교회에 다니게 됩니다. 사실 저의 성격은 줏대 없이 누군가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는, 그냥 흘러가듯 사는 성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심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중, 2018년 8월 2일 할머니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하나님께로 가셨고, 남겨진 아버지는 절망을 표했습니다. 한 편으로는 저에게 배신감과 서운함을 느끼셨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눈물이 많으면서 왜 할머니의 장례식엔 울지 않냐며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선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족들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고, 가장이 아님에도 가장처럼 늘 가족을 챙겨오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장례식장에 얼굴도 비추지 않았던 몇 명의 가족들과, 어려서부터 저를 키우시고 보살펴주셨던 할머니인데 그에 비해 울지 않는 저에게 많은 서운함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물론 저도 당시 할머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프긴 하였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안전히 잘 데려가셨으리라는 생각으로, 안도와 평안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슬픔보단 평안의 마음이 클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시에 할머니에 비해 기도 생활이 좋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고, 또 매일 밤 자기전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시는 할머니와 달리, 저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마치 ‘나는 이렇게 기도 안 하니까 안심하세요’라는 둥 아버지 앞에서는 기도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당시엔 저까지 성령으로 기도해버리면 늦둥이에 외동인 저를 망쳤다며 안 그래도 심했던 핍박이 더 심해질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인도하실지 모르는 일인데, 하나님께 정말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또, 그래서인지 기도 습관이 들지 않았고, 까먹는 날도 종종 있었습니다. 무튼, 할머니께서 편찮으신 뒤로 일어날 힘과 기도할 힘조차 없으셔서 이전보다는 기도를 많이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또, 날로 악화되어서 나중엔 거의 못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는 갑자기 조급함과 할머니를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누워 계신 할머니 앞에서 성령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할머니와 같은 방, 하나의 침대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왜인지 잠도 잘 들지 않았고 새벽 2시쯤 물을 마시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 할머니께서 숨을 쉬시는지 확인하였습니다. 원래 같으면 한 번 깰수록 더 깊이, 더 오래 잠이 들었을 텐데 그날은 잤다 깨었다를 반복하였고 할머니의 상황을 연신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할머니께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만약 제가 평소처럼 깊이 잠이 들었다면 저는 아침에 해가 밝아서야 할머니의 상황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하나님께서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평안한 마음과 하나님께서 안전히 잘 데려가셨으리라는 믿음이 들었을까 싶습니다. 하나님께 참 감사드립니다.

 

허나 아버지는 믿음이 없으셨기에 이게 다 교회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에 다니는 저의 모습을 극도로 싫어하셨고 슬퍼하셨습니다. 영은회의 시작을 알리는 영은회 엽서는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적도 있고, 그 밖에도 직접적으로 싫음을 표현하셨습니다. 게다가 아버지께서는 원래도 교회, 특히 방언 소리를 싫어하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리에 민감하고, 잠귀도 밝고, 업무로 인해 지쳐서 피곤한 아버지의 귀에 할머니께서는 매일 저녁 성령으로 기도하시고 주무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는 갔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핍박이 심한 날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년도 코로나로 인해 아버지의 교회에 대한 핍박이 이제는 더 이상 핍박이 아니라, 교회에 가지 말라는 통보로 바뀌었습니다. 코로나가 뉴스로 보도된 날 이후로 저는 교회에 가지 못하였고, 몸이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진 건지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하나님보다 사람을 보러 교회에 갔던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멀어지고 저는 저의 욕심을 채우기에 바빴습니다. 이전에 목자님께서 아버지의 교회에 대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유해지기 위해선 교회 생활에도 열심을 다 해야 하지만, 지금 내가 세상에서 맡겨진 일(학생)에 대해서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처음엔 열심히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학업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성적이 점점 좋아질수록 나의 욕심은 커져만 갔고, 이젠 더 이상 아버지를 위함보단 나를 위함이 되어버렸습니다. 공부의 습관도 처음엔 문제집을 풀기 전과 후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능력을 구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이후엔 점점 귀찮아하며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10초 정도 되는 시간 동안만 기도하거나 그마저도 하지 않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는 처음엔 교회와 가깝다며 좋아했지만, 나중엔 교회 언니 오빠들을 만날까 조마조마한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언니 오빠들과 선생님이 언제나, 저를 포기하지 않고 시간 내서 만나러 학교 앞까지 와주고 계속해서 심방과 편지를 써주었다는 것입니다. 만나서 안부를 묻고, 가끔은 따끔한 권면도 그 당시에와 지금 모두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써주신 편지들을 꺼내서 읽어보면 당시의 제 자신이 너무 답답하고 감사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와 학교가 가까웠던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멀어질수록 죄에 대한 생각도 커져만 갔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것 하나하나 의미부여를 하며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공기업 취업을 희망하는 동아리인 공채반에 들어가면서 토요일에도 학교를 나와 강의를 듣고 자습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퇴출이었습니다. 매주 안식일에 교회가 아닌 학교를 선택하는 제 모습을 보며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의 발걸음은 학교로 향했습니다. 세속적인 욕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 저는 피부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치 여드름의 개수가 내 죄의 개수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에 시달렸고 주기도문을 할 때에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와 같이 죄에 관한 내용에서는 더 온 마음을 다해 기도드렸습니다. 성경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율법주의적인 행동을 보였습니다. 죄책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마음인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 죄책감으로 인해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것임을 알면서도 죄책감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율법을 모두 지키며 살아간다는 바리새인이라 해도 사랑은 실천할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없음을 이제는 마음으로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외식하는 자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 부족함을 계속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사모한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하나님께 메달린다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이전보다 나은 거룩함을 허락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참 감사한 것은, 제가 그렇게 방황하던 와중에도 매일 성경읽기와 기도하기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사랑과 권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제가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기도는 기도라 칭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매우 짧고 형식적인 기도였습니다. 가끔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성경 읽기도 묵상은커녕 그냥 읽는 것 조차도 힘들어했고, 자기 전에 누워서 혹은 소위 랩을 하듯 무슨 소리인지도 모른 채 읽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형식적인 기도와 말씀 읽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형식적으로 말씀을 읽는데, 그냥 또 아무생각 없이 읽었음에도 말씀의 내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열처녀의 비유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미련한 5명의 처녀들을 보며 ‘이건 나다.‘라는 생각과 함께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교회로 가야지, 이제는 돌아가야지, 이제는 그만해야지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 드렸듯 세상을 향한 욕심과 부모님의 기대, 그리고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심과 부담감이 쌓여 계속해서 저를 망설여지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귀가 심어준 생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선 저의 그동안의 이런 생각들이 무색할 정도로 말씀 하나만으로 저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대하고 힘 있는지를 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형식적이더라도 말씀 읽기와 기도가 습관화 되어야 함을, 그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하나님께로 다시 나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도들과 눈물이 있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바쁜 와중에도 매일같이 새벽기도에 참석하며 기도해준 친구, 피곤한 와중에도 멀리 사는 저를 위해, 영은회에 더 오래 참석하게 하기 위해 차량 운행 해주시는 선생님과 성도님 등등..!! 정말 많은 성도님들을 보며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젠, 그 받은 사랑을 나도 전하고 실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끝으로, 제가 슬픔보단 평안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를 아버지도 깨달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실 저희 아버지께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존심이나 세상적인 것들을 선망하는 모습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는 모습을 상상할 땐, 저에겐 영화같은 이야기, 비현실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요리 솜씨가 있으신 아버지가 주방에서 봉사하는 모습도 상상해봅니다. 이렇게 소망하며, 계속해서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다가도 중간에 한 번씩 소홀해지거나 지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이를 위해 ’분명 하나님의 때가 있을 것인데, 그보다 더 빨리 허락하여 주시고 싶을 만큼 간절히 기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더 간절히,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계속해서 구한다면 곧 이루시리라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여 주세요.

 

 

지금까지,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오실 때까지 깨닫고, 사모하며 살기를

내가 죽고 그가 사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간증을 마치겠습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