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2년 성령을 받으신 김경라 자매님의 회고록 입니다. 김경라 자매님이 직접 써주신  글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2022년 11월 5일 안식일 소모임 아비가일 방에서 기도 시간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저는 60년 10월 9일생. 63세입니다.(2022년 기준) 14세 중 1때 처음 교회에 들어갔었고 49년만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뒤에서 애쓰시고 기도해 주신 에스더(제주)자매님, 문자(전주)자매님, 허진숙(천안교회 사모님), 정미식(서부교회), 이영숙언니(동부교회)자매님, 오점수언니(강남교회)자매님. 감사합니다.

첫 교회 경험은 어린 시절 그때는 국민학교 시절에 교회를 따라갔어요. 국민학교 학생들이 참 많이 모였었고 특히 선생님들이 참 좋았던 하루의 경험이 교회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싫어하실걸 알기에 다신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전북 전주로 전학을 갔어요. 엄마는 늘 환자였습니다. 심장병으로 중1 여름방학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군인이셨고 어린 남동생 2명이 있구요. 어느 날 새 엄마가 우리 집에 오신답니다.

조건은 새 엄마 다니시는 교회에 함께 나가는 것! 저는 무척 기뻤습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꿈에 그리던 일이잖아요 .온 가족이 손에 손잡고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 명칭은 참 예수 교회. 교회에 들어섰는데 일반 교회와 달랐습니다. 기도 시간에 전 너무 놀랬어요. 무서웠어요. 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아니 그 많은 멋진 교회들도 많구만 하필 이상한 교회라니! 기가 막히고 두렵고 신기하고. 밖에 나가면 교회 얘기는 하기 싫었어요. 정말 창피 했어요. 이상한 교회니깐요.

못 다니겠다고 반항도 못하겠고 그냥 놀러 다녔어요.  늘 가면 언니들 많고 오빠들 많고 친구들 많고 친구들이 좋아해주고 그런 기분으로 놀러 다니면서 세례도 받았습니다. 뭐가 뭔지 모르고 하라 하니깐 받았죠. 7년 정도 교복 시절을 전주 참 예수 교회에서 지냈어요. 그 시절 교복 학생 중에는 저만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밖에 나가서는  손가락질 받는 것이  싫어서 참 예수 교회 다닌다는 말을 안하고 살고 교회 안에서는 저만 성령을 못 받고..

그때 기분은 부끄러웠고 두려웠습니다. 왜 난 성령을 못 받을까? 성령 받은 기분은 도대체 어떨까? 아마도 하나님 보시기에 난 앞으로 악을 저지를 사람인가보다. 난 죄가 참 많은 인간인가 하고 낙담하며 교회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한 1, 2년 정도는 괴로움이 있더라구요.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 생활 안 하는 것이 편했습니다. 세상은 즐거움과 짜릿함이 많았구요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 마음 편하고 교회 생각 안하고 사니 편했어요. 

29세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1남 1녀를 두었고 버젓한 남편 직장에 아주 그냥 남 부러울 게 없더라구요. 

주부로써 친구들 좋아하고 자식들 사랑스럽게 키우면서 실컷 놀면서 살았습니다. 수영, 등산.. 한 이십년 정도 등산을 했나 봐요.

산에 가면 가는 산 마다 절이 꼭 있어요. 같이 다니는 친구들 중에 절에 다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그 친구들은 절에 들어가서 절을 하고 기도를 드려요. 그 기도하는 모습이 뭔가 부럽더라구요. 신앙 생활 한다는게 부러웠어요. 일반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친구들도 부러웠어요. 신앙이 갖고 싶었어요.그래서 열심히 찾았어요. 참 예수 교회만 아니면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타인들 시선에 벗어난 이상한 신앙은 절대로 안 할 거라고 다짐, 다짐 또 다짐했습니다. 이단이니 날라리 교회이니 그런 집단에 속하고  싶지 않았어요. 정말이지 평범하고 소박한 신앙 하나 갖고 싶었어요.

20년 전인지 25년 전인지 에스더 자매와 문자 자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잘해주시는지 거부할 수 없는 친절함. 그래도 그건 제 마음속에 아니였답니다. 그때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고 연락도 안 남기고 도망치듯 이사하였습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그 분들을 피해 이사한 것이.

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천주교에서 장례를 치뤘습니다. 그때 참 고맙고 거룩했고 경건했고 좋았어요. 그래서 성당에 나갔어요. 근데 그 경건함이 우상숭배로 보여지잖아요.

또 친한 친구들을 따라 여러 군데 장로 교회에 나갔습니다. 어머나, 근데 가르침이 들어 오질 않아요. 도덕 시간 같기도 하고 그냥 메아리로 그치는 설교 말씀. 아! 난 왜 이리고 못 됐을까? 친구들처럼 그냥 믿으면 안되나? 왜 자꾸 안 믿어질까?

10년 전부터 바꾸었어요. 그래 절에 다니자. 절 신도가 되어보자. 내 성격과는 절이 잘 맞는 것 같아 이왕이면 명성 있는 절의 신도가 되면 좋겠다 해서 조계사에 나갔어요.

언제 가는 줄도 모르고 그냥 마음 내키면 갔어요. 법당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 하는 거 따라하면서 누군가 나에게 말 걸어 오기 만을 기대하면서 .

그런데 아무도 저에게 말 걸어 오질 않았어요. 그래 다른 절에 가보자. 봉은사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누군가 말을 걸면 바로 대답하리라.

신도가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려고 기다렸지만 거기서도 저에게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집 앞 소망 교회에 나가보자. 번듯한 교회이니 뭔가 다르겠지. 그러니 신도가  저리 많지. 참 무척 낯설었지만 웅장하고 세련된 건축물과 상류 사회 느낌이 물씬 풍기더라구요.

그 안에 들어가 보니 여긴 연회장인가?  사교장인가? 과연 하나님은 계실까? 사람만 많네. 그런 느낌!

난 정말 이방인 같았어요. 

7년 전 용인 산골에 정말 소박한 너무도 소박한 아주 작은 집을 지어서 이사했답니다. 결혼해서 살면서 전부 다 내 멋대로 하고 살았습니다. 나이 들어 딱 하나 남편에게 양보하기로 했습니다.

전원생활! 남편이 그리도 원하니 산골에서 살아주자. 나이도 들었고 한번 살아보자.

전원생활 하면서 전 다(多) 종교인이 되었습니다. 교회에 갈 일이 있으면 오케이. 절에 갈 일이 있으면 오케이. 우상숭배도 오케이. 그래 이렇게 사는 것도 좋구만! 정하지 말고 이렇게 살자, 착하게만 살자! 빌고 싶으면 하나님이든 천주님이든 부처님이든 다 빌면 되지!

압구정에 있었던 작은 사찰의 스님을 만나게 되었고 우리가 용인으로 이사할 때 즈음 그 절도 아산으로 터를 옮겼습니다. 딸을 데리고 그 곳까지 찾아가서 부적을 받아왔습니다. 아들 딸 지갑에 부적을 넣어서 갖고 다니고, 남편 컴퓨터 책상에 붙여 놓고, 딸 집에 부적을 붙여 놓고 뿐만 아니라 절에 있는 커다란 종에 우리 집 식구들 이름까지 전부 올리는 일까지 하였습니다. 남편 모르게 돈을 내가면서.

소리 없는 악행을 계속 저지르고 살았습니다.그렇게 사는 것이 복 받는 일이라고 여겼으니까요. 그렇게 마구잡이식 종교를 이쪽저쪽에 두 발 담고 살았습니다.

2년 전 쯤 허진숙(천안교회 사모님)에게 전화가 왔어요.친구가 너무 그립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고. 오케이! 우리 집으로 와. 정미식 친구와 둘이 왔어요. 중학교 때 처음 갔던 전주 참 예수 교회 교복 친구들! 참 반갑고 좋았지만 얘들아, 나한테 교회 얘기전도 얘기는 절대 하지 말아라 내 남편도 기독교인들 안 좋아하고 나도 교회 얘기 할 거면 너희들 안 만날 거야.

그래서 교회 얘기는 하지 않기로 하고 셋이서 모임을 만들었어요. “우리 과거 여행 하러 가자. 전주 가볼까?” “그래.”

전주에 갔는데 다비다 집사님과 채길석 장로님과 문자 자매와 식사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 한번은 “우리 그림 전시회 보러 가자.  영숙 언니 알지? 그 언니가 전시회 한다는데 가보자.””오케이!” 그래서 영숙 언니를 만났구요.

근  40년 만에 만난 영숙 언니는 뭔가 귀한 분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교회 분들을 만나니 점수 언니가 궁금했어요. 영숙 언니가 저희 집에 놀러 오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점수 언니랑 같이 오겠다고.

너무 반갑고 기다렸죠. 오는 날 연락이 왔어요. 점수 언니 부부, 영숙 언니 부부 네 분이서 출발 하셨답니다.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언니 우리 집은 산골에 작은 오두막이야. 우리 두 사람 움직이는 공간밖에 없어요” 했더니 “응, 알겠어 경라야! 우리 2인분 만큼만 움직이다가 올게!”

어쩜 좋아.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남편에게 어디서 아는 사이라고 말해야 하지? 정말 막막했지요. 여섯 명이서 작은 집에 옹기종기 앉아서 담소를 나누었고 전 심히 불편했습니다.

그 날 가시면서 영숙 언니 남편 분께서 “가평에 초대하겠습니다.꼭 와주세요”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날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왜 자꾸만 참 예수 교인들이 내 삶을 침범하는가?

그날 밤부터 저는 코로나에 걸려 한 일주일 아팠어요. 이틀 뒤부터 남편도 코로나로 일주일 함께 아팠습니다. 그런데 네 분은 전혀 코로나로 아프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성경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다락방으로 올라갔어요.

“수지 아빠! 나 오늘부터 성경 책을 읽을거야. 이 성경책을 다 읽고 나서 내 신앙을 결정해야겠어. 이 책을 읽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으면 난 불교 신자가 될 거야!”. “잘해봐”

그날 저녁부터 성경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시편부터 시작! 한 이틀 간은 재미 없었어요.

참말로 성경 책처럼 재미없는 책이 있을까요? 어려운 수학,과학책 보다 어렵고 허구투성이 같고 믿어지지도 않는 이 책에 사람들은 왜 감명을 받을까?  의아하지만 참고 억지로 읽었습니다.

며칠을 읽다 보니 신기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어머나! 세상에! 믿어지는 거에요. 심장이 두근두근 계속 읽고만 싶은 거에요. 말씀이 소중하고  믿어지고 기도하게 만드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외우며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성경책을 읽으면서 내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어요. 다 잊고 있었던 과거의 잘 못 하나하나 기억나기 시작했어요. 죄라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도 죄라고 고백하기 시작했어요. 너무 많았어요. 생각나는 대로 다 고백했어요. 눈물이 나기 시작했어요. 살면서 이런 느낌 처음이었어요.

영숙언니 연락이 왔습니다. 가평으로 초대한다고! 제 남편은 저 따라가는 모임 싫어해요. 안 갈 것 같았어요. “갈 거야?”하고 물어봤지요. “가지 뭐! “

그래서 함께 또 가평에 갔어요. 영숙언니 부부, 점수언니 부부, 저희 부부. 허인숙언니, 허진숙, 정미숙 모두 모였어요.

사도행전 6장 15절말씀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그날 모인 7분의 모습에서 스데반을 보는 것 같이 천사처럼 빛나 보이더라구요. 정말 잘 살아 온 아름다움이 영향력이 있고 빛나 보이는 겁니다. 제 스스로 제가 보잘 것 없고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주 하나님 안에서 특히 참 예수 교회 안에서 긴 여정을 성령의 사랑으로 살아오신 그 분들과 나와 내 주위 분들의 너무 다른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부러웠습니다.

그분들의 아름다움에 제가 반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점수 언니의 간곡한 메세지가 왔습니다, 영은회 하는데 꼭 한번만 와 봐. 초대할게. 참 다정하게 차분하게 그러면서도 강력하게 거부할 수 없는 초대였습니다.

남편에게는 서울에서 점수 언니가 한번 만나자고 하네 한번 다녀올게 하고 다녀왔습니다.

교회 다녀온 후로 여러 생각이 많았습니다.

남편과 자식들에게,식구들에게,친구들에게 참 예수 교회 나간다는 말을 못 하겠더라구요.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이단이라고 나오더라구요! 거기에서 기가 또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난 이단을 나가면 절대 안돼. 그러나 인간적인 실수를 두 번이나 하지 말자 피하지 말고 만나서 사실을 얘기하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만 난 참 예수 교인은 되고 싶지 않다고 얘기 하고 나오자.

그렇게 양지에서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줄이 길었는데 그 날은 두 대의 버스가 한, 두 사람만 태우고 가버렸어요. 그곳에 있던 20여명의 사람들이 화가 나서 난리가 났습니다.

하늘의 뜻이구나! 집으로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검은색 차량이 남자 한 분을 태우고 출발하다가 문을 열더니 남부터미날 가실 분 세 분만 타세요 하는 거에요. 그 순간 제가 손을 번쩍 들고 차 안에 일착 했어요. 그 뒤에 저 따라서 두 명이 더 탔답니다. 염치고 체면이고 불안이고 생각이 하나도 안 나고 그냥 타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순간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감사해서요.

전 참 소심하고 겁이 무척 많은 사람이에요. 모르는 차를 탄다는 것은 제 성격 상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에요.

남부터미날 도착, 지하철 6 정거장을 지나서 소모임 예배에 출석 했습니다.

이제 예배 끝나면 점수 언니에게 다 얘기하고 저는 집에서 혼자 고요히 성경책 읽으면서 제 신앙 생활을 할 거라고 얘기만 하면 되었어요. 예배 시작하면서 점수 언니가 인도를  하시더라구요.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여기 나온  김경라 자매님 성령 받기 위해서 기도합시다.”

깜짝 놀랬지요. 49년 동안 그냥 살아왔고 또 나에게 얼마나 상처를 남기려고 성령 받기 위해 기도 하자니 왜 이러시나! 큰일이네! 에고 모르겠다. 무릎 꿇고 않아서 두 손 모으고 가만히나 있자 하고 눈 감고 있었어요. 입 꾹 다물고 숨만 쉬고 있었어요.

저는 분명히 눈을 꼭 감고 있는데 분명 눈을 감았고 안 뜨고 있는데 가슴에 황금 빛 큰 십자가가 있는 하얀 가운을 입고 어떤 분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제 왼쪽으로 걸어서 오시는 거에요.

그때 순간 저는 ‘어머 내가 왜 이런 공상을 하고 있지? 이게 뭐지? 아니 근데 왜 뜨겁지? 아니 왜 자꾸 입술이 입안에서 움직이지? 입을 벌려야 하나?’

그러면서 입을 벌리자 방언이 터지는 거에요. 그때 강력하게 느꼈습니다. 나 지금 성령 받고 있구나!

그러면서 기쁨과 안도와 평안함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는 그렇게 성령을 받았습니다.

양지로 돌아와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만나자마자” 수지 아빠, 나 교회에 가서 성령을 받았어. 이건 기적이야” 하고 소리를 질렀어요.

마당을 지키는 풍산개 백구에게 “백구야!엄마 성령 받았어.” 방안에 있는 푸들 강아지 두 마리에게 “대박아! 또복아! 엄마 성령 받았어.”

그렇게 두 번 교회에 다녀 온 이야기를 남편에게 알리면서 새로운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축복은 제 남편과 함께 안식일 예배에 두 번 참석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성령의 체험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또 때가 되면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 하나님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리고 평생 감사드리며 살겠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멘! 김경라 자매님의 신앙생활에 성도님들의 많은 기도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