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온 것도 주가 동행함이라.”
이 한 문장은 이 간증 전체를 관통하는 고백입니다.
이 글은 믿음 안에서의 결혼을 소망했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흔들렸던 한 사람이, 오랜 시간 기도와 눈물로 하나님께 매달리며 결국 한 가정이 믿음 위에 세워지기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변화는 빠르지 않았고, 고난은 반복되었지만 간증자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함께하고 계셨다고.
사람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었던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길을 여셨고, 결국 기도의 제목이었던 남편은 믿음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무너짐의 시간조차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음을 돌아보며, 이 간증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늦지 않으시며,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길 위에서
끝까지 동행하시는 분이시라고.
이 짧지만 깊은 고백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삶에도 위로와 소망이 되기를 바라며, 간증을 소개합니다.
“나와 동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증하겠습니다.
이렇게 간증을 할수 있게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간증을 하기로 결정한 일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간증에 대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었는 데 어느날 간증동영상을 보게 되고 그 간증을 보면서 아 그래 옛날에 우리 남편도 교회 가는것 보 다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더 좋아했던 때가 있었지 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정말 감사하다라고 생각한 날이 있었는데 그날 저녁에 경추집사님의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번 영은회때 간증을 해보는 건 어떨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하든 제가 하든 상의해서 알려달라고 하셨는데 참 신기했습니다. 간증을 보게 하시고 그 간증을 통해 우리 남편이 우리 가정이 온전한 믿음의 가정이 될수 있도록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건 아닐까? 란 생각이 들면서 집사님께 간증을 해보겠다고 답변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간증을 준비하려 하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함께 나눠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남편을 전도하게 된 일은 예전에 청주교회 50주년 기념호에 있는데 또 얘기를 하는게 맞나? 고민도 되었지만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거고 오랜시간이 흘러 다시 한번 나누고자 합니다.
남편을 처음 알게 된 건 고3때입니다 당시 같은 학교였고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하루는 전교생이 강당에서 조회를 하는데 그날 저와 친구 한명이 당번이어서 교실을 지키고 있었고 한참을 교실에 있다가 대체 언제 끝나나 싶어 밖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강당에서 우르르 학생들이 나오고 있었고 그 수많은 사람중에 딱 한 사람 지금의 남편만이 환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있던 친구에게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봤는데 자기랑 친하다며 이름과 몇 반인지 성격이 어떤지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 사람에 대해 듣기만 하고 시간이 흘렀는데 가끔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나오는데 어떻게 그 사람만 보였을까? 그것도 무슨 아우라가 비췬것 처럼 그렇게 그 사람만 왜 보였을까? 참 신기한 일이다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게 아니었을까 란 생각도 해봅니다. 시간이 흘러 학교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반의 대표로 제가 나가게 되었고 그 모습을 보고 지금의 남편이 저에 대해 알게 되면서 저에게 친구하고 싶다며 편지를 보내게 되고 자연스럽게 이과인 남편과 문과인 제가 편지를 주고받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저에게 사귀자고 했고 그 당시에 저는 신앙인이 누군가를 사귄다는 건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하늘이 무너지는 큰 죄라고 생각을 해서 거절을 했는데 그 일이 상처가 되었는지 그날 이후로 저와 아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를 잃었단 생각에 속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신앙이 우선이었던 제게 그 일은 후회되지 않았고 대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신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하실 거죠? 강당에서 나올 때 그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몇 년이 지난 후 아주 우연히 길에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시 보게 될까?
이 사람을 전도하라는 걸까? 란 생각이 들었고 다시 만나게 되면서 부모님께 먼저 인사를 시켰습니다. 이방 결혼은 절대 안 된다, 믿음 안에서 결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부모님은 나중에 안 사실 이지만 처음 만나는 날 반대를 하려고 맘먹고 식당에서 우리를 기다렸는데 식당 문을 열고 둘이 함께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너무 닮아서 왠지 반대를 하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지…
저희 엄마는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나와야 하고 세례를 받아야 하고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그리고 저에게는 이방 결혼은 정말 믿음 지키기 힘들다는 얘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이사람을 구원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이방 결혼을 해도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지켜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처음 교회를 함께 갈 때 걱정도 많았습니다. 아직 결혼 전이어서 다른 성도님들이 어떻게 생각을 할까? 그리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거부하면 어쩌지? 이런저런 걱정들이 몰려올 때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교회에 가야 하는데 이런저런 걱정들 때문에 자꾸만 망설여지는데 어떡하죠?” 기도를 하고 나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란 생각이 더 우선이 되었고 남편에게도 교회에 대한 방언에 대한얘기를 미리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의 교회와 다르다. 우리 교회는 성경에 나온 그대로 행하는 교회고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한다. 방언 소리가 처음 듣는 사람은 놀랄 수도 있지만 이건 결코 이상한 게 아님을 얘기를 했고 또한 나는 교회가 제일 우선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얘기를 했습니다. 처음 교회 가게 된 남편은 많이 어색해하긴 했지만, 다행히 놀라거나 거부하지는 않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토요일이 되면 자꾸만 친구들 만나러 가려하고 여행을 가는 등 핑계를 대며 때론 저도 교회를 갈 수 없는 상황도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제 머릿속에 ‘신앙에 있어서는 절대 타협을 해선 안 된다는“ 어느 목자님의 설교 말씀이 기억이 났고 나는 안식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교회를 가야 한다. 라고 계속 얘기를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신랑은 세례를 받게 되었고 그 후에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해서는 서울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세례는 받았지만, 아직 신앙이 연약했고 세상의 즐거움을 더 좋아했던 신랑은 안식 일이 되면 교회를 가야 하는데 자꾸 핑계되며 안 가려 하고 세상 친구들 직장동료들과의 모임 등을 중시했고 이런 문제들로 자꾸만 다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사회생활 하다 보면 인맥도 중요하고 그러려면 술자리만큼 친해지기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신랑의 고정관념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최대의 고민거리였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 형제들은 술을 마시지 않고도 오히려 더 사회에서 인정받는 다는 것을 어떡하면 알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다 인도해주신 다는 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남편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닌데 천국이 분명히 있는데 그걸 아직 모르는 남편이 너무나 불쌍했습니다. 신랑과 신앙의 문제로 부딪힐 때마다 이방 결혼은 이래서 힘들구나 뼈저리게 느꼈고 나중에 우리 자녀는 꼭 믿음의 가정과 결혼시켜야지 란 생각을 했습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또한, 아직 신앙이 연약한 남편을 위해 때론 금식기도도 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 가는 것부터 가 먼저라는 생각에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사탕이나 과자로 달래듯 저는 남편이 갖고 싶어하는 것을 안식일 예배 빠지지 않고 가면 사줄께~ 라고 달래서 교회를 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같이 교회 갔다 오는 길엔 꼭 이 말들을 했습니다. “ 당신이랑 이렇게 교회 갔다 오니 너무 좋고 행복하다고.“
그리고 평소 집에서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장 17절 말씀에 의지하여 억지로라도 말씀을, 찬양을 듣게 하려고 청소할 때나 설거지할 때 말씀을 틀어놓거나 찬양을 틀어놓곤 했습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드는 것처럼 언젠가는 남편도 서서히 바뀔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저의 바람은 내 믿음이 흔들릴 때 나를 바로 잡아줄 수 있는 동역자가 남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였습니다. 내가 믿음 안에서 결혼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후회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서울에 살때 신랑은 세상에 더 많이 속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고, 혼자 울기도 많이 하고 그때 하나님만이 저의 유일한 안식처였습니다. 정말 그때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았다면 아마 우울증이 심하게 오지 않았을까? 란 생각도 해봅니다.
시간은 흘러 둘째가 태어날 때쯤 제가 청주로 내려가자고 신랑을 졸랐습니다. 서울에서 저는 아는 사람도 없는데 남편은 매일 야근에 회식에 늦게 들어오고 혼자 만삭에 큰아이까지 보는게 너무 힘들었고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남편은 세상에 더 빠져버리고 신앙은 멀어지겠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신앙도 흔들릴 것 같았습니다.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청주에 직장도 없이 무작정 내려와 시댁 어른들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믿지 않는 가정에서 신앙을 지키는 게 쉽진 않았습니다. 이때 또다시 왜 이방 결혼은 안 되는건지 왜 그렇게 믿음 안에서 결혼을 하라고 했는지 친정 부모님의 말이 많이 떠올라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이건 내가 짊어져야 하는 내 십자가란 생각으로 정말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믿지 않는 가정이라 저녁때면 일 마치고 오신 시댁 어른들과 신랑은 술자리를 즐겼는데 그 모습을 어린 우리 아이들이 보고 자라는 게 저는 참으로 싫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수 있는건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댁 어른들과 술을 마시던 신랑이 잠깐 화장실에 갔는데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일이 있었고 그날 이후로 ”앞으로 너는 술 마시지 마라“ 라고 하셨고 다시는 술자리를 갖더라고 신랑에겐 술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할렐루야! 역시 멋진 우리 하나님!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아뢸 때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체험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가정에서 십일조를 한다는 것은 많은 고민이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결혼하고도 십일조를 하는 부분에 대해서 신랑은 탐탁지 않아 했습니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굳이 십일조를 해야하느냐, 이런 부분으로 투닥거릴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 마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일을 할 수 있었겠어? 당신이 벌 수 있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셔서 벌 수 있는거야. 그 전부를 드리는 것도 아니고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고 이렇게 감사하며 십 일조를 할 때 하나님께서 더 축복해주신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도 신랑은 탐탁치 않아 했지만, 청주에서 십일조의 기적을 여러 번 체험하면서 신랑의 마음은 바뀌게 됩니다. 청주로 이사 오고 신랑이 직장을 구하고 첫 월급은 수습이라서 너무나도 금액이 적었습니다. 너무 적은 금액을 십일조 내기 창피한 마음에 십일조보다 더 많은 금액을 냈는데 신기하게도 그 다음 달 십일조 낸 금액만큼 월급이 올랐습니다. 창피하게 생각해서 더 내긴 했지만 이렇게 축복해주신 게 너무 감사해서 두 번째 달은 감사한 마음에 십일조보다 더 냈는데 신기하게 더 낸 만큼의 월급이 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신랑에게 얘기하면서 신랑도 신기해했고 그 후로는 십일조 하는 것에 더 이상 반감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 말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말씀을 삶에서 직접 체험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청주로 이사하고 교회를 가는 데 그때 당시 교회는 용정동에 있었습니다. 신랑과 애들을 데리고 교회에 가는데 지금은 안 그래 보이지만 그때 당시 신랑은 낯을 많이 가렸습니다. 그래서 교회 가자마자 한 형제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우리 신랑이 낯을 많이 가리는데 옆에서 꼭 붙어서 좀 챙겨줄 수 있겠냐고, 적응할 수 있도록 좀 도와 달라고 부탁을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근데 그 형제님은 알겠다며 흔쾌히 대답을 하고 그때부터 밀착케어에 들어갑니다. 무엇을 하든 같이하자고 하고 어딜 가든 같이 가자고 하고 절대 혼자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절친?이 되었지만, 그 당시 그렇게 매사에 챙긴다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힘든 일이겠지요.
그리고 교회에서도 무슨 행사를 할때면 신랑이 좋아하는 요리경연대회라든가 탁구 등 모든 초점을 신랑에게 맞춰주는 배려와 성도님들의 사랑에 신랑도 서서히 세상 친구들 모임보다 교회 안에서의 활동들, 성도 간의 교제가 주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청주로 내려와 경제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신랑이 조금씩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모습이 보여서 좋았고 청주에 내려온 지 1년이 되었을 때 드디어 신랑도 성령을 받아서 더없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드디어 우리 가정이 온전한 믿음의 가정이 된건 같아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간증을 적으며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고 성장시키기 위해 참 많은 일들을 하셨구나 란 생각이 듭니다. 최근 들어 때때로 제가 믿음 없는 말을 할 때면 신랑은 오히려 저를 깨우쳐 주는 동역자가 되어있는 지금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내 믿음이 흔들릴 때 잡아줄 수 있는 동역자가 남편이길 바랐던 저의 바람을 하나님께선 기억하시고 이뤄주셨다는 게 참 신기하고도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사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가게를 운영하다가 폐업하게 된 일, 우유 판촉 일을 하면서 비바람을 맞았던 일, 사기를 당해서 돈을 날렸던 일 등,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게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려합니다.
신랑과 함께 죽 가게를 했었는데 병원 검진 손님들을 상대로 운영을 하다 보니 안식일 오전 예배 참석을 할 수 없었고 안식일을 못 지키는 것에 계속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를 드렸는데 어느 날 꿈에서 우리 가게 앞 도로에 큰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모든 가게들이 무너지고 우리 가게도 무너지게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너진 잔해 속에 작은 빛이 보이고 그 빛이 보호막처럼 신랑과 제가 다치지 않게 보호하고 있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이 꿈이 대체 무슨 꿈일까? 꿈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계속 그 꿈이 무슨 뜻일까?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이 꿈을 꾸고 얼마 되지 않아 저희 가게는 병원 검진 손님들이 전혀 오지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병원에서 새로 건물을 지으면서 식당까지 운영을 하게 되고 더 이상 검진 손님을 우리 가게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몇 년을 함께 했었는데 아무런 말도 없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어버리니 저희 가게는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가게를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게 권리금도 돌려받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으며 정리를하게 되는데 그 당시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도 너무 힘들어서 담임 목자님께 기도 부탁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전에 꾸었던 그 꿈이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다 무너졌지만, 우리를 보호하던 그 빛이 생각 이 나면서 빛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지켜주실 거란 확신이 들면서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함께 기도해주고 도움의 손길을 주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예비하신 하나님께 참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우리 부부가 깨달은 것은 안식일을 우리가 온전히 지키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와 무슨 일이 있어도 안식일을 지켜야겠단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에 직장을 구할 땐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지가 제일 일 순위가 되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직장을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며 기도했더니 신기하게도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직장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고난이 오거나 할때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시고 내가 생각지 못하는 방법으로 반드시 하나님의 완벽한 때에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난이 있어야 신앙이 성장을 하는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수많은 날들 속에 평안한 삶만 있었다면 과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온전할 수 있었을까? 란 생각이 듭니다. 고난을 통해 남편은 옛사람의 모습들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관들을 버릴 수 있게 되고 오직 하나님만이 제일이란 생각을 갖게 했으므로 지금은 그 고난이 감사하단 생각이듭니다.
내가 걸어온 길 길고도 짧은 길
내 힘으로 걸어온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온 것도 주가 동행함이라
주님 나와 동행하심이라며
때론 험한 길에서 폭풍우를 만나고
때론 가시밭길에서 고난을 당하나
주님 동행하시니 나는 두려움 없네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동행이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내 삶에 함께 동행하신 하나님이 계셨기에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고 남편이 구원을 받았고 신앙이 성장을 할 수 있었고 자녀 또한 믿음 안에서 자라나는 온전한 믿음의 가정이 될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천국 가는 그날까지 온전한 신앙의 집을 잘 세우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드리며 간증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작성 : 박은정 자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