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천안교회 최병덕 형제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할렐루야!
저는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2009년 5월 영은회에서 성령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특별한 체험이나 이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제 인생에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제 삶에 있어서 가장 특별하고 가장 귀한 일이다 라고 생각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교회를 나오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제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나눌 간증은 제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인도하셨는지와 성령 받는 것 그리고 이후에 저희 어머니와 가족의 전도됨을 간증하려고 합니다.
< 이전의 모습 >
16년 전인 2009년, 제가 성령 받기 이전의 나이는 딱 40세였습니다. 신앙생활 이전의 삶의 중심, 마음의 중심은 회사일이었습니다. 제가 기계설계 쪽의 일을 하였는데 업무가 항상 늦게 끝났습니다. 그 당시 일이 끝나는 시간이 대부분 10시 정도가 보통이였고, 나를 진단하면 약간의 일 중독 상태였습니다. 그 늦은 시간에 끝나고도 술을 좋아해 동료들과 함께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며 지내는 것이 낙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 집을 사고, 언제 결혼하고 이런 내일에 대한 막연한 걱정들을 하며 사는 생활이었는데, 어찌보면 세상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평범한 고민과 생활을 하며 지내고 있었지만 지금의 눈으로 보면 세상의 많은 것에 욕심을 두고 어두움에 길을 잃고 헤매이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종교에 대한 저의 생각은 신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종교는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종교는 바보같은 것이고, 사람이 죽으면 끝이다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중에 기독교는 더 믿을 수 없고 교회 다니는 사람의 성품이 제가 느끼기에 특별히 더 나아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 다니는 사람이 더 한다” 라는 것을 뉴스를 통해 또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제 주변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정말 한심해 보였습니다. 나에게 교회 이야기는 허용할 수 없는 것이었고, 종교에 대해서는 나에게는 이야기도 하지마! 딱 잘라 말했습니다.
참으로 오만한 생각과 세상의 많은 것에 욕심을 두고 살아가는 어리석고도 어두움 속에 헤매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디가 길인지 모르고 어두움 속에서 속고 살고 있습니다. 이런 어둠 속에 헤매는 저를 빛 가운데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 어린시절 >
제가 태어난 곳은 충남 부여군 규암면입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저수지 솔밭 언덕에 위치했고, 내부는 나무 바닥으로 되어 있었고, 안동교회에 있는 풍금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부여 참예수교회였습니다. 그곳에서 저희 가족 부모님, 형, 누나들과 외가댁 식구들이 제가 학교 입학할 때까지 다녔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 양손을 잡고 고스롬타면서 그리고 하얀 눈길을 걸으며 다녔던 기억이 조각으로 남아있습니다. 그곳에서 배운 찬송이 ‘내게 강같은 평화’, ‘금과 은 나없어도’… 가 기억이 납니다.
< 믿음을 잃어버림 >
그러나 부여 참예수교회가 안타깝게도 지금은 없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입학할 즈음 없어지게 되었고, 그때부터 저와 우리 가정도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부여 시골에서 정미소를 하였는데 교회가 없어지고 나서 몇 년 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망하였습니다. 빚쟁이들이 계속 찾아왔고 결국 정미소를 팔고 1979년 10살 때 큰아버지가 계시는 서울로 이사와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부모님은 정말 힘든 생활을 하였습니다. 79년에 서울에 올라와서 오랜기간을 시장에서 닭장사를 2007년까지 28년간 계속 하셨습니다. 시장에서 닭장사 새벽에 시작하여 저녁이 아주 늦어야 끝이 났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또한 뜨문뜨문 할머니와 사촌들을 따라서 대방교회에 다니다가 안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차가 있지만 가족 모두 신앙을 잃게 되었고, 막내누나만 더 다니다 결국 모두 떠나게 되었습니다.
< 청년생활 >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없으니 잊는 것은 너무 쉬웠습니다. 오히려 커가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더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으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싫어하게 될 수많은 이유가 생겼는데 그중에 살아가면서 만난 기독교인 대한 경험입니다. 대학교 때에 첫 아르바이트를 강남 버스터미널 앞 기독교 백화점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사장님이 교회를 다니시며 장사를 하시는데 그곳에 직원들에게 심하게 화를 잘 내고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첫 직장 사장님이 기독교인이였는데 정말 거짓말을 잘하였습니다. 또 기독교를 싫어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제가 가지고 있는 얇은 성경 지식도 그 하나였습니다. 욥의 시험과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시험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음으로 하나님을 정말 많이 비난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녀들에게 행하고 시험할 수 있는가 교회 다니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하나님을 많이 비난하였습니다. 신문 방송에서 교회의 목사들이 세상 사람보다 더한 잘못을 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기에 교회를 더 많이 비난하였습니다. 이렇게 교회하고는 담을 쌓고 정말 완전히 잊었고 제가 교회 다녔던 기억조차도 잊었습니다.
< 사회생활 >
대학졸업 후 군대를 갔다 제대한 후 사회생활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처럼 직장생활을 하였고, 주 6일 동안 일하고 저녁은 술 마시고, 간혹 시간 나면 주말에 낚시도 가고, 또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 집을 살까? 서울과 안산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1999년 직장 때문에 천안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천안에 와서 더 일에 집중하며 살았습니다. 천안에 큰누나가 살았는데 같은 곳에 살았음에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찾아갈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일속에 또 세상 욕심에 빠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지냈지만 지금에서 그때의 저를 생각하면 타인에게 사랑을 혹은 관심을 주지도 않았고, 또 받는 것도 싫어하는 아주 메마르고 건조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정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35:1) 광야과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라!
< 은혜의 시작 >
어머니(이순복 모매님)가 오랫동안 닭장사를 하셨는데 장사가 점점 더 계속 안 돼서 너무 힘들어하셨습니다. 생닭과 치킨을 팔았는데 한집 걸러 한집이 치킨집이 생기고 또 슈퍼나 마트에서 생닭을 파니 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지도 어려운 상황이 몇 년 간 계속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옆집 채소가게는 정말 장사가 잘되었습니다, 채소가게가 너무 잘되니 채소가게에서 확장을 하려고 권리금을 주고 팔으라고 하여 그렇지 않아도 유지가 안돼 그만두려해도 시장에 보증금이 거의 없이 월세를 내고 있어 이것 저것 정산할 수가 없는 상태였는데 권리금을 준다니 바로 넘기고 26년간 하시던 장사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이것 저것 정산하고 반지하라도 방도 얻고 생활을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병원 청소 일을 시작하셨는데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이유는 닭 장사는 하루종일 자정까지 매여 있어야 하는데 병원일은 새벽에 나가지만 일찍 끝나 본인의 시간이 최소한이라도 있고 또 장사할 때는 본전도 안되었는데 병원 일은 월급도 최저임금이지만 월급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병원에 가니 매 아픈 사람 뿐인데 본인은 건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격주로 토요일에 쉬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장사를 그만두고 나서 수십 년간 못 나갔던 하나님께 나가야겠다 생각을 하였는데 그때 마침 교회에서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때마침 대방교회에 새로 부임한 목자님(오희도 목자님)이 교적부를 보고 잃은 양들에게 연락을 한 것입니다. 교회에 나가려는 딱 그때 연락이 와서 다음주부터 다니시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장사를 하면서도 믿음생활을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어머님이 약 30년만인 2007년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을 지금 생각하면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그때는 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오히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는 뭐하시러 그런 곳에 다니실까? 시간 아깝게—라고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일이 은혜와 축복의 시작이었습니다.
< 하나님의 인도자와 만남 >
2008년 봄에 이종사촌 결혼식에 참석하여 친척을 만났는데 이종동생과 그 신랑을 만나 인사 했습니다. <김하늘(김참운) 집사, 김지용>. 천안에 10년 가까이 살았는데 이종동생이 천안에 사는 것을 몰랐습니다. 천안에서 식사 한번 하기로 인사하고 돌아왔습니다. 남편이 도로과 공무원이니 좋은 회사 땅도 알아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얼마 뒤 사촌 동생인 참운 자매로부터 밥 한번 먹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장소가 이학돌솥밥이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부부 내외만 있을 줄 알았는데 여러 사람이 앉아 있어 엄청 당황했습니다. (홍영석 목자님, 김한길 목자님 내외… 등)
그리고 조금 뒤 아 예수쟁이들이구나! 을 알고 나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나왔습니다. 나오면서 다음에는 절대 만나지 말아야지 하면서 나왔습니다. 연락을 끊고 지내던 중 영은회였던것 같은데 참운 자매 어머님이(이모님) 천안에 왔는데 와봐라 하셔서 할 수 없이
나가 교회 다니라는 권면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래서 나갈 마음이 있었냐? 절대 나갈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마음도 없었지만 당시 전 굉장히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서두에 밝힌 것과 같이 하루를 일로 보냈습니다. 갈비탕을 먹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해 8월에 청주 천안 연합 래프팅을 가게 되었는데 왜 거기를 간다고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됩니다. 저는 바쁘고 내가 낄자리가 아닌데 래프팅을 함께 갔다 오고 나서 저의 마음은 “이 사람들이 내가 생각한 것처럼 나쁜 사람들은 아니구나” 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교회에 다닐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바쁜 사람이고 교회에 다니려면 제가 그것에 매인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래프팅 후 참운 자매의 강권도 있고, 래프팅 간 것도 있고 해서 몇 번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예배의 참석하여 김한길 목자님 설교가 말씀이 때마침 저에게 맞는 말씀이었는지. 제 마음을 열어 주신 것인지.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 내용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신앙생활, 교회, 신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아주 세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는 스스로 생각해도 올무이고 저처럼 바쁜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 신앙을 할 수 있는 결정적 변화 >
2008년 9월 리먼 사태가 미국에서 발생하였습니다. 부동산 모기지에 투자한 은행들이 파산한 사건인데 그 사건이 있은 후 두달 만에 거짓말처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국의 기업들이 투자를 중단하여 저희 회사에 모든 일이 끊겼습니다. 직원들은 휴직을 하고 저도 오전에 잠깐 나갔다가 오는 정도였습니다. 정말 바쁜 사람이었었는데 몇 개월을 직원들과 함께 놀게 되었습니다. 그때를 맞추어 참운 자매가 교회에 출석하라고 전화가 왔고, 예전에는 교회오라면 나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일 때문에 못간다고 했는데 그 일후로는 핑계 거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배와 교회 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11월에 대둔산도 다녀오고 저녁예배 안식일도 나와서 말씀도 듣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과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친밀감이 생겼고 그즈음 저와 같은 구도자인 서민선 형제님도 같이 활동하고 예배 참석도 하였습니다. 다음해 목자님이 바뀌어서 윤득도 목자님이 부임하셨는데 저는 그때까지도 제가 계속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새로 부임하신 윤득도 목자님을 약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계속 다닌다는 것은 내가 어떤 것에 매인다고 족쇄가 된다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윤득도 목자님이 부임하신 후 얼마 뒤에 서민선 형제님이 성령을 받으셨는데 저는 그때까지 성령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고 성령에 대한 지식도 없었습니다. 다만 성령 기도는 어렸을때부터 들었던 것이기에 이상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어렸을때에는 “나는 왜 저런 기도가 안되지?” 하는 정도였습니다.
< 성령을 받음 >
그해 2009년 5월 30일 영은회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2~3주 전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면 마음이 울렁거리며 눈물이 흘렀고, 기도하면 또 그렇게 눈물이 났습니다. 청주 영은회가 천안보다 1주일 전에 있었는데 거기서도 엄청 울었습니다. 이상하게 눈물 콧물 흘리면서 울게 되니 창피해서 기도할 때 휴지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청주 영은회에 가서도 많이 울었고, 천안 영은회가 시작되어서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안식일날에 어머님이 오셨는데
청주 이모님과 지금은 돌아가신 부산 감사 집사님이 오셔서 서로 반가워하며 기도하시는데 어머니의 기도소리가 얼마나 슬프던지 …. 본인의 인생을 돌아보신 것인지 나를 위한 기도인지는 모르지만 너무 슬펐습니다. 그리고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그때가 처음 어머니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는데 “내가 어떻게 어머니랑 예배를 드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안식일날 제천으로 돌아가시고 안식일 마지막날 마음이 평온한데 너무 속이 울렁울렁하였습니다. 그래서 점심도 금식하게 되고 오후 예배 후 기도시간에 엄청 울면서 눈물 콧물 흘리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큰 기쁨과 눈물과 회개 등등 너무 감사하고 희한한 느낌이였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저를 바라보면 악하게 해꼬지는 안하지만 굉장히 메마른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을 받지도 주지도 않는 메마른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자녀삼아 주시려 성령을 통해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비를 내리어 촉촉히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성령을 받고 나서 굴곡은 있었지만 믿음생활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 어머니의 이야기 >
그리고 저의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어머니는 2007년 대방교회에 다니시다가 아버지가 제천 조그만 여관을 사면서 제천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여관은 허름했기에 주로 일하시는분들이 한달에 얼마주고 사용하는 달방으로 사용하는 숙소였습니다. 그곳에서 기차타고 버스타고 해서 청주로 교회를 다니셨습니다. 아침 일찍 나가서 오전 예배드리고 오후에 오시곤 하였습니다. 아버지도 제가 교회 나가고 나서 1년 정도 후부터 교회에 나가셨지만 잘 다니시지는 못하고 간간히 다니셨습니다. 10년 정도 그렇게 생활하셨는데 이제 힘이 많이 부치시고 해서 그곳을 팔려고 어머니와 생각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매출이 크지 않아 여관을 내어놓아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장사도 점점 안되었습니다. 2년 정도 내놓았지만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가 못 걸으신다는 연락을 받고 급한 마음에 병원에 모시고 갔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못 걸으시니 큰일이었습니다. 어머니가 혼자 청소 빨래 아버지 돌보는 것 까지 해야 했으니까요. 다행히 한두달 후 아버지는 걸으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이제 정말 부모님이 여관일을 그만두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님께 기도 드려야 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몇 개월이 지나서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요즘 장사가 잘된다. 방이 다 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몇 달 지나지 않아 매매가 되어 천안으로 이사 오게 되어 천안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안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도하게 하셨고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런 와중에 천안에 살고 있는 큰누나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희 형제는 2남 3녀 중 제가 막내이고, 천안에는 제 큰누나가 살고 있었습니다. 큰누나는 많은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렸을때 부터 뼈에서 고름이 나오는 골수염을 앓아 다리를 절단하기 전까지 갔었고, 이후에도 나았던 다리가 또 재발 그리고 암으로 병원 신세를 많이 지고 있었습니다.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마다 참운 자매와 제가 병문안 가서 위로하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면하였지만 그때마다 하는 말이 내 꼴을 봐라 내가 지금 교회 갈 때니? 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구안와사가 와서 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또 병문안을 가서 권면했습니다. “이제 교회 나와” 라고 했는데 또 말합니다. “야, 내꼴 봐라. 지금은 때가 아니야. 그러면 제천여관 팔고 엄마가 내려오시면 그때나 다닐께!” 라고 했습니다. 몇 년 동안 내놓아 팔리지 않았기에 천안에 오신다는 생각은 못한 것이지요. 그런데 언제 팔렸을까요? 그 말을 한 다음날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어 부모님이 제천을 정리하시고 천안으로 이사 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안에 오신 어머니를 통해 영혼들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천안에 와서 잠깐 쉬다가 하신 일은 노인 일자리를 다니시게 되었는데요 일하신 후 얼마 뒤 거기서 함께 일하시는 어르신 3명을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조에 같이 일하는 2분이 있었는데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분은 장로교, 한 분은 침례교에 다녔고,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어서 너무 좋다고 생각하였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자연스레 교회 이야기를 하였고, 같이 일하시는 분에게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 받은 증거가 방언이라 이야기 하자 그렇게 말하니 한분이 “그럼 날날라 하는 교회여유?” 하며 질문하고 “그렇다” 하니 가보고 싶다고 하였답니다. 그리고 그 옆에 한분은 가만히 있길래 “자네는 안가남” 하니 “저는 다녀유” 하니 어머님이 그럼 “구경도 못가남?” 하니 “구경이야 가쥬” 하면서 두 분이 함께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 그 옆에 조에 있던 한 분도 호박죽 먹으러 오라 하는 말로 시작하여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뒤에는 그 남편분까지 전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큰누나의 전도를 위해 기도를 하며 애를 썼습니다. 편지도 유언처럼 써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22년도에 교회 송년식사가 있었고 누나와 매형을 부르게 되었고 그 계기를 통해 매형과 큰누나 그리고 큰누나의 손자, 손녀들가 다음해 1월부터 믿음생활을 하게 되었고, 매형과 손자, 손녀들도 성령을 받고 믿음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전에 있는 이모님까지 전도되고 성령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너무나 크고 놀랍습니다. 그리고 크신 은혜를 또다시 우리에게 주심을 알기에 어머니는 나머지 자녀들의 구원과 믿음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가정에 주신 은혜와 주실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감사주!
<최병덕 형제 가족사진>
(뒷줄 우측에서 2번째가 최병덕 형제, 앞줄 가운데 계신 분이 이순복 모매(어머니), 그 오른쪽이 최귀미 자매(누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