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증하겠습니다.
교회에서 간증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말씀에, 선뜻 순종하지 못하고 며칠 간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신도회에서 저의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이렇게 모든 성도님들 앞에서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라 좀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내가 말하지 않으면 다른 분들은 알 수 없다’ 였습니다. 잃은 양이었던 제가 어떻게 교회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는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받은 크고 작은 은혜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처음 하나님과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데요. 제가 5살 무렵이었습니다. 이미 참예수교회에 다니시던 외할머니가 참예수교회에만 구원이 있다며 다른 교회에 다니시던 엄마에게 참예수교회에 나오기를 여러차례 권면하셨다고 합니다. 아빠는 전혀 믿지 않는 분이셨구요. 당시 우체국에 근무하시던 아빠는 여러 곳을 전근 다니시다가 청주에 정착하게 되었고 부모님은 그 때 처음으로 집을 짓게 되셨습니다. 당시 대성동에 교회가 있을 때인데 저희 집은 교회까지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걸어서 교회에 갈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엄마가 그 전에 다니셨던 (교회를 A교회라 한다면) A교회에 건축헌금을 하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갑자기 이사오게 되는 바람에 마무리 짓지 못하고 오셨다고 합니다. 아빠는 전혀 믿지 않고 계셨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잘 모르셨는데 건축 헌금을 받아내려고 A교회 분들이 (이사 간 집 주소를 모르니) 아빠의 직장으로 찾아가셨다고 합니다. 엄마는 엄청 당황하셨고 화도 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 같은 하나님이지 나는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지킨다. 참예수교회에 헌금하겠다”고 하셨고 참예수교회를 받아들이시고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부부간의 엄청난 불화가 될 수 있는 사건을 통해 참 하나님을 만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아빠를 제외한 엄마, 오빠, 언니(지금은 잃은 양), 저 이렇게 네 식구만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잃은 양인 언니가 저처럼 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저희 식구는 교회에 들어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는 부끄럼이 있었지만 찬양도 하고 율동하는게 좋아서 열심히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 교회보다는 학교생활이 재밌어졌고 특히 컴퓨터 담당 선생님이던 담임선생님이 토요일 오후에 컴퓨터실을 온전히 개방해 주셨기 때문에 점점 방과 후 시간이 재밌어졌습니다.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교회를 멀리하려는 마음이 더 생겼고 제 안에는 성령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유혹에 쉽게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평일에는 학교,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면서도 나름 잘 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도 형제 자매님들이 찾아오셔서 기도도 해 주셨지만 ‘조금 더 이따가 지금 아니야.’ 하는 등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더 미뤘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서울에서 약 10년간 살게 되었고, 강남교회에 있는 오빠가 교회에 오기를 권면해서 3~4번 예배에 참석을 했는데요. 지금처럼 전도 초청 예배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살고 있던 곳에서 강남교회까지는 대중교통으로 한시간 반 이상 되는 거리였고 오빠가 매번 데리러 오기에도 꽤 먼 거리였습니다. 더 가까운 거리의 참예수교회도 있었지만 혼자서 가 볼 생각은 못 했던 시기입니다.
그렇지만 멀어져 있던 교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저희 집 문을 나서기만 해도 크고 작은 교회가 아주 많이 있었는데요.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면 가까이에 이렇게 많은 교회가 있는데, 그냥 가까운 교회에 가도 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설교를 하시든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들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혼자 있는 저를 염려해서 엄마가 가끔 저희 집에 오셨는데요. 그 때 이런 생각을 엄마에게 전했고 외할머니가 하셨던 것처럼 저에게 참예수교회에 가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우리 교회의 교리, 10대 신앙 등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목자님께서 구원이 교리에 담겨있기 때문에 교리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설교를 하셨는데요. 그 말씀을 들으며 참 하나님께로 이끌어 주심을 다시 한 번 감사드렸습니다. 그렇게 또 한 걸음 교회로부터 멀어졌지만 내가 교회에 간다면 참예수교회에 가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중에 남편을 만났는데 남편도 청주사람이었습니다. 결혼해서 청주에서 살기로 했고 신혼집을 알아보던 중이었습니다. 최종 후보에 오른 두 집 중 남편이 저에게 고르도록 선택권을 주었고 두 집을 차례로 가 보았는데요. 두 집 중에서 사이즈가 더 작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끌리는 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한 채 제가 고른 집은 다시 교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습니다. 그 때는 이전 교회에서 지금 교회로 이전하려고 건축 중일 때였지만 청주로 와서 엄마의 권면으로 안식일 오전 예배 정도만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이런 건축 중인 교회 소식에 깜깜이었습니다.
그 날도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서려는데 아는 분을 보았습느다. 저희가 신혼집을 얻을 때 도와주신 공인중개사 분이셨습니다. 복비를 조금이라도 아껴보려고 교차로에서 집을 구했고 그 때 중개사님은 친구의 집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친밀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그 분은 전도되어서 교회생활을 하고 계신 문자매님이셨습니다. 문자매님을 만나고 돌아서 나오는데 또 마주친 분은 저희 집 1층에서 떡집을 하시는 떡집 사장님이셨습니다. 이미 전부터 우리 교회에 떡을 납품하고 계셨다고 하셨습니다. 엄마가 교회에서 집으로 가시며 주셨던 떡이 1층집 떡이었습니다. 그 떡을 보면서 ‘하나님께 바로 돌아올 수 있는데 나도 이 떡처럼 돌아 돌아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의 위치며 나와 관련이 있는 두 분을 교회 안에서 만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구나 라는 생각은 한참 뒤에 들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나를 너무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니님께 무조건 항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부터 온전히 교회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남편에게 토요일은 교회에 나가겠다고 했고 가족 간에 모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시댁 어른들은 감사하게도 가족 모임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바꿔주셔서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도 저도 늦은 나이의 결혼이었는데 별 어려움 없이 임신하고 큰 아이를 낳고 두 살 터울로 작은 아이도 낳았습니다. 저는 성령을 받지 못한 채 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기도할 때면 성령을 간구했습니다. 2011년 5월에 봄 영은회가 있었고 이번 영은회는 새벽 예배까지 꼭 참석해보자 하는 마음에 빠짐없이 참석했습니다. 마지막 날 새벽 기도 때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목자님이 성령의 감동이 있는 것 같다며 더 기도해보자고 하셨습니다. 그 때 부산교회에서 소감사 집사님이 영은회 참석하시려고 와 계셨는데 집사님께서도 성령기도 소리를 들었다며 저보다 더 기뻐하셨습니다. 그 날 오후에 기도하는데 마음이 뜨거워졌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해주시고 내가 돌아온 것을 정말 기뻐하시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교회로 돌아온지 1년이 채 안 되었을 때였고, 복 중에는 큰 아이가 있었기 때문에 두 배로 축복 받은 것 같았습니다. 큰 아이가 6살 무렵 엄마는 언제 어떻게 성령을 받았는지 궁금해 했었는데 “하나님께 저도 성령받고 싶어요~하고 기도 드렸더니 성령을 선물로 주셨어. 그리고 의윤이가 뱃속에 있을 때 성령을 받아서 더 기뻤어.”했더니 “그럼 엄마는 성령을 상품권으로 받았어?” 해서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장 38절)
어릴 때 자녀를 낳는다면 2명 큰 아이는 딸, 작은 아이는 아들을 낳고 싶어라고 얘기했는데 철 없이 한 얘기도 하나님이 들어주셨습니다. 남편도 같이 신앙 생활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아이들이 어릴 때 영은회에 초청해서 교회에 오기도 했지만 아직 제 태신자로 남아있습니다.
큰 아이가 어린이집 가고 둘째만 집에서 보고 있을 때 자매들은 그 이전부터 플룻 배우기가 한창이었습니다. 저한테도 같이 해보자고 했고 계이름은 읽을 수 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 거절했습니다. 권면 끝에 배우기로 했고 작은 아이를 엄마가 봐주기로 하셔서 편한 마음으로 점심까지 먹고 올 수 있었습니다. 연주를 하려면 이미 알고 있는 노래나 찬양을 하는 편이 훨씬 쉽기 때문에 곡을 배우면서 찬양도 많이 들었고, 찬양을 들으면서 노랫말에 집중하니 찬양이 주는 은혜를 더욱 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플룻을 배우기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다과도 하며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자매님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고 자녀에 대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어떻게 기도를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어떨 때는 플룻을 배우는 시간보다 교제하고 점심 먹는 시간이 더 길 때도 있었습니다. 교회에서의 내 모습과 일상 생활에서의 내 모습 간에 간극이 있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는데 삶 속에서 신앙인으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컸고 일을 해봐도 될 것 같아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적응하게 되었고 내 손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눈치보지 않고 십일조를 드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에게 남편의 수입에서 십일조를 하자고 하는 것은 아직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항상 신앙 양심이 찔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번 돈이니 떳떳하게 십일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적은 돈이었지만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1년 정도가 지났고 사정이 생겨서 일하던 곳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1년이 되었기 때문에 퇴직금을 받을 수 있었고 급여가 나온 뒤 얼마간 있다가 퇴직금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당연스레 급여에서 십일조를 했지만 뒤이어 나온 퇴직금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있다가 십일조를 해야지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급여를 받지 못한다고 하니까 십일조 하는 것이 망설여졌습니다. 부끄럽지만 한 달 이상을 미루다가 퇴직금에 대한 십일조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은 제가 토요일마다 교회 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저에게 전해 주고 싶은 것이 있을 때면 가기 전에 집에 들러서 가져가라고 메세지를 보내곤 하셨습니다. 그 날도 교회를 마치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집에 들르라고 하셨고 어머님이 애들에게 용돈을 주셨습니다. 큰 아이에겐 더 많이 주시고 작은 아이에겐 좀 더 적은 금액을 주셨는데 그 금액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날 낸 십일조는 몇 천원 단위로 끝나는 금액이었는데 지갑에서 돈을 꺼내시곤 정리하실 때 그 몇 천원까지 같이 흘러나와서 “이것도 가질랴?” 하시면서 작은 아이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참 속속들이 알고 계셨습니다. 부끄러운 가운데 하나님은 제가 깨달아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로부터 간간이 제 오빠의 건강이 안 좋아서 걱정이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는 오빠도 이제 나이를 먹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엄마를 위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심각하고 급격히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신장이었는데요. 2017년 말 경에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애진 자매가 병문안 때 오빠의 건강이 갑자기 안 좋아져서 곧 신장투석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투석을 하면 직장 생활을 잘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투석은 되도록 늦게 해야 할 텐데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편의 건강에 대한 염려, 생활에 대한 염려를 하고 있을 언니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가족 중에 이식을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뒷바라지가 필요한 중학생 자녀를 둔 언니보다는 아이들이 어린 제가 해 주는 것이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조카는 이미 국악으로 진로를 정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엄마에게 내가 이식을 해주고 싶다고 말씀드렸고 엄마는 안타까워하셨지만 마음먹은 대로 진행했습니다. 마음을 정하고 기도를 하고 남편에게 동의를 구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편에게도 시댁 어른들에게도 허락을 받았습니다. 결혼 초에는 시댁도 낯설고 아이들이 어린데도 불구하고 2주에 한 번씩 어떨 때는 1주에 한 번씩 가는 것이 조금 버거울 때도 있었는데 이번 허락으로 그 동안의 수고가 보상 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열심히 시댁에 갑니다.^^ 저는 이미 마음을 정했고 만일 누구라도 안 된다 했으면 마음이 상했을텐데 승낙을 받고 하나님께는 물론 허락해주신 시댁어른들께도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울을 오르며 여러가지 검사를 받았습니다. 기본적인 건강 검진, 신장에 대한 정밀한 체크, 지능에 대한 검사도 있었습니다. 걱정되는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위로해 주셨는데요. 한번은 무심코 쳐다본 병원 엘리베이터에 붙어있는 성경 구절을 통해서도 위로를 해 주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리(사 41장 10절)
다행히 수술에 적합하다는 판단을 받게 되었고 수술 후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 동안 저희 아이들은 언니가 맡아주었고 제 간호는 엄마가 맡아주셨습니다. 마침 수술 날짜가 둘째 아이의 생일이었는데 이모와 함께 처음으로 서울랜드도 가고 재밌는 날을 보냈다고 합니다. 저는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었고, 4일 째 되던 날 자매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청주에서 병문안을 오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오빠는 수술 후 무균실로 들어갔기에 병원에 오셔도 만나실 수가 없었고 저는 아파서 수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 회복중이라고 말씀드렸지만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시기로 한 날에 하필 비가 장마처럼 내렸고 오시기도 힘드셨을텐데 송집사님 허집사님을 포함 여러분이 오셨습니다. 비슷한 시간에 애진자매를 위로하러 마침 강남교회에서도 자매님들이 오셨습니다. 이 자매님들은 저와 잘 알지 못했지만 목자님을 비롯해 청주교회의 자매들과는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천국에 가면 알지 못하는 우리 성도들과 이렇게 웃으면서 얘기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저는 교회를 일찍 떠나서 학생이나 청년때 영은회를 참석한 경험이 거의 없었고, 다른 지역의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만난 경험도 적었기 때문에 저로서는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신장이식 수술은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수술을 준비할 때부터 중환자실에 있을 때, 퇴원할 때까지 오빠를 위해 기도 해주시고 혈소판 헌혈까지 마다하지 않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함께 기도해주신 성도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비록 오빠의 수술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이 때 깨달은 것이 있는데요. 이 순간에 어떤 기도를 해야 할까입니다. 이 때부터 하나님께 결과가 좋게 해주세요나 살려주세요라는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뜻대로 해주세요 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생사가 오가는 중에도 기도해야 하고 또 같이 하는 중보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믿지 않는 저희 남편과 나눌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도 있는데요. 제가 목요일에 전도심방팀회의에 참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매주 목요일에 회의에 참석하고 엄마도 뵙는 날로 정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직장에 가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니, 저만 시간에 늦지 않도록 준비하면 되는 날인데 갑자기 남편이 제 차 키를 찾으면서 본인 차는 회사에 두고 왔으니 제 차를 타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남편의 직장이 천안이었기 때문에 택시를 타고 가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전날 미리 얘기를 해주던지 시간이 촉박해서 다른 선택도 할 수 없게 한 남편이 얄미웠습니다. 엄마께 전화를 드려서 상황을 설명드리고 오늘은 그냥 집에 있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엄마는 용담동에 있는 구옥을 가끔 살피러 가시곤 했는데, “네가 오지 않으면 난 용담동 가서 있다 올거야.”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 오후 4시경, 오랫만에 아는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엄마가 괜찮으시냐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안부를 묻는 것인 줄 알고 건강히 잘 계시지~ 했는데 그게 아니라 엄마가 계신 건물에 화재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 언니는 엄마가 사시는 건물 맨 뒷 동에 살고 있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엄마께 전화를 드렸더니 감사하게도 엄마는 아직 용담동에 계셨습니다. 건물의 구조가 1층은 필로티이고 주차장으로 사용했는데 거기에 주차 해 놓았던 차에서 화재가 시작되었고 차량 2대가 전소될 만큼 많이 위험했습니다. 건물을 중심으로 화재는 왼 편에서 났고 엄마의 집은 오른편이어서 그나마 피해가 적었지만 나중에 집에 들어가서 보니 집안에도 검은 그을음이 있었고 공기가 탁해서 숨쉬기가 불편했다고 하셨습니다. 당장 집에 들어 가셔서 생활하기에 불편하셨는데 상황이 더 안 좋았던 분들은 주민센터에서 임시거처를 마련해주기도 하셨습니다. 엄마는 용담동 집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한동안 생활하셨고 건강에도 문제가 없으셨습니다. 그날 위험이 있을 것을 알고 하나님이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피하게 해주셨다는 생각이 들었고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남편과 나눌 수 있는 간증이어서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남편은 교회에 대한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 처음엔 좋게 대화를 시작했다가 결국 기분이 안 좋게 마무리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대화하게 되었는데요. 남편은 애들을 위해 트리도 해주고 싶어하고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고 싶어했습니다. 성경에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라고 되어 있지도 않고 심지어 예수님은 그 날 태어나지도 않으셨다고 했더니 성경에 있는 것을 찾아보라고 해서 싸움하던 중에 성경을 펴고 둘이서 읽는 일도 있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이들을 포함해서 저는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남편은 집에 있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새 밥을 지어 놓고 나오는데 그 날은 밥이 너무 잘 됐다고 얘기하니까 할렐루야! 라면서 남편이 농담을 했습니다. 남편은 할렐루야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그래서 더 깜짝 놀랐습니다. 저녁 식사 당번 때 저희 조 단골 메뉴가 돼지고기 김치찌개인데 너무 맛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도 싸다 주곤 했는데 그 날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신기하게도 다음날 남편에게 김치찌개가 생겼고 “어제 내가 당번이었는데 우리도 김치찌개를 하잖아. 어제는 싸오지 못했는데 너무 잘 됐다.”하니 “그럼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냐?” 하는데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남편 입을 통해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이 남편에게 조금씩 부드러운 마음을 주고 계신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의 말을 듣는 제 마음도 달라지게 해 주셨다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남편을 통해 저를 세워주고 계신다는 생각도 듭니다.
찬양 중에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이라는 찬양을 할 때마다 우리집은 아니야에서 우리집은 아직 아니야로 아직 아니야에서 우리집도 그렇게 이끌어 주시겠지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남편을 포함해서 저희 가족도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는 믿음의 가정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마다 눈높이에 맞는 필요한 말씀을 주시고 제 옆에 동역자를 주셔서 같이 갈 수 있도록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간증을 준비하면서 준비하는 이가 더 은혜를 받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제가 그런 것 같습니다.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며 간증을 마칩니다.
글작성 : 김정민 자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