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11. 25. 안식일 오전 (오희도 목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 5:1)
1절 말씀을 보면 두 개의 집이 나온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 &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장막집은 임시 거하는 처소이다.(고후4:18) 내가 살았던 집도 나의 몸도 결국 무너진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집이 있다.(요14:2) 하나님의 백성이 내집 마련의 꿈을 어떻게 이룰수 있는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하나님께서 지으신다. 사람의 손으로 짓는 것이 아니다. 손으로 짓는 것은 실수가 많고, 엉망으로 짓기도 한다. 그러나 영원하고 완전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 이 땅에 집이 없어도 소망을 가질수 있고 살아가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인생의 중요한 결론이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고후 5:2)
우리는 땅에 있으면서 탄식한다. 부정적인 탄식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탄식이다. 또한 삶의 고단함과 정욕과 욕심으로 인해 나약한 자기의 모습을 보며 탄식한다. 하늘의 처소는 이 땅의 장막집이 무너져야 들어간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하늘의 영원한 처소를 이 땅에 살아갈때 덧입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덧입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은 두 구조가 있다. 하늘나라에 가서 거하는 처소도 있지만 이 땅에 살아갈 때 하늘나라의 영원한 집을 영적으로 덧입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3)
벗은 자들로 발견되는 시점은 죽었을 때이다. 하나님 믿지 않고 죽으면 마치 벗은자들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영원한 처소를 사모하고 믿었던 자들은 영원한 처소가 덧입혀져 있다.
우리는 이 장막에 살면서 무거운 인생의 짐에 눌려 지게를 지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 헬라적인 사고는 육신과 영혼을 분리해서 생각했다. 이원론적인 사고이다. 극단적으로는 영혼은 이미 하늘나라에 가 있기 때문에 육신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을 했다.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육신을 갖고 있을때 무슨 일을 했는지에 따라 그것을 근거로 구원이 결정된다. 육과 영이 분리되어 있는것이 아니다. 육신의 행위와 함께 하나님 앞에 심판 받는것이다.
죽을 몸이 생명에게 삼킨자 된자들은 영원한 처소를 덧입는 자가 된다. 세례받으면 주의 죽으심과 함께 장사되었고 물에서 올라오는 순간 새생명 가운데 살게 된다.(롬6:4) 이 일을 하나님이 이루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5절) 성령을 받은 우리는 속으로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롬8:18~23) 성령은 영원한 삶을 보증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담대하게 살 수 있다.(6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 본질임을 깨달을 때 담대해진다. 세례받고 올라올때 이미 내집 마련이 되었다. 우리는 주님과 살기 위해 빨리 떠나기를 바라지만(8절) 이 땅에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게 하기를 힘써야 한다.(9절)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을 기쁘게 하기에 바빴다.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9~10)
우리는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이다.(10절) 벗어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의 수많은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심판대가 있음을 생각지 못해서이다.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는 순간 서야 할 곳이 심판대이다. 그때에는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날마다 주를 기쁘게 하는 자가 되고 담대히 주님 오시는 날을 기다리며 주안에서 날마다 행복한 신앙 생활 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