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줄 수 있으려면 첫째,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고 둘째, 전 인류를 구원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이 있더라고 능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고 부활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능력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인류사에서 어떤 종교의 교주나 훌륭한 성현도 죽음을 경험했거나 죽음에서 부활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더욱이 그 죽음이 인류를 위한 것이고 부활이 또한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믿는 예수님만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증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은 기독교를 일컬어 독선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다른 길은 없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유일성에 대한 주장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은 언젠가 제자들에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 이 보다 독선적인 선언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은 다른 길은 모두 틀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배타성은 바로 이 선언에서 출발합니다. 이와 같은 유일성은 제자들도 분명히 깨닫고 고백한 내용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초대교회를 막 시작한 사도와 성도들은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이스라엘의 종교재판소) 앞에서 예수님의 유일성에 대해서 고백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은 큰 의문이 있습니다. ‘내가 만나보지도 않은 수천 년 전의 인물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왜 내가 죄인이 되어야하고 사망의 저주에 놓여야 하는가?’하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이 의문은 예수님을 믿으면 모두 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모든 문제를 예수 한 분으로 인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인류의 첫 번째 아담이 일으킨 문제를 인류의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책임지고 해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부당하게 처벌한 것도 아니고 아담의 불행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로 당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시려는 깊은 사랑과 관용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성경의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