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항 성령에 대한 우리의 믿음
성령을 받는 것은 천국의 기업을 얻는 보증이며 방언(영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증거가 됨을 믿는다.
성령이란 ‘거룩하신 영’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존재했습니다. 천지 창조 때 하나님의 신(영靈)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고 사사 삼손의 몸에 임하셔서 괴력을 발휘하게도 하시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적을 행하는데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성령이 역사하시던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예레미야, 에스겔, 요엘 등의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장차 말세에 나의 신(영)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신약 시대에 오순절이라는 유대인의 절기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영혼 안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이미 성령이 존재했고 성령의 역사도 있었는데 왜 신약 시대에 와서 굳이 성령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그러면 오순절에 내린 그 성령은 구약 시대의 그것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는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까요? 이런 의문점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성령의 가치, 역할,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함께 살펴봅시다.
구약 시대 선지자가 예언한 성령, 사람의 마음 속에 부어주시겠다는 그 성령은 유대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세 절기 중 하나인 오순절이라는 절기에 인류 역사 최초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행 2:1-2) 『[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오순절에 내린 성령은 구약 시대에도 존재한 성령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구별됩니다.
첫째, 이 성령은 구약 시대의 것과 구별되는 ‘약속의 성령’입니다.
성령이 이미 존재하셨던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은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이 특별한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이 성령에 대해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예언했고 예수님 자신도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성령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 세례요한, 그리고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 성령을 일컬어 ‘약속의 성령’이라고 표현합니다.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겔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둘째, 이 성령은 십자가 사건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오순절날 주어진 ‘약속의 성령’은 구약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은 존재하셨지만 ‘약속의 성령’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시대의 ‘성령’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여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역사에 머물렀지만 신약 시대 오순절 이후 내린 ‘약속의 성령’은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서(혹은 부어져서)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맺게 만드는 성령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이 ‘약속의 성령’을 부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야 ‘약속의 성령’이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약속의 성령’도 인간에게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만약 구약 시대의 성령만으로 사람이 구원받기에 충분했다면 신약 시대에 ‘약속의 성령’이 주어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구약의 선지자들도 이에 대해서 예언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신약 시대 성도의 구원을 위해 ‘약속의 성령’이 꼭 필요했고 주님은 그것을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오시리니』
셋째, 이 성령은 거듭남의 한 요소인 ‘성령세례’입니다.
요한복음 3장을 살펴보면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인물에게 예수님은 거듭남(중생)의 중요함에 대해서 밝히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하는데 그 의미는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물은 ‘물세례’를 가리키고 성령이란 ‘성령세례’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인 반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일이라고 대조시켜 말했습니다. 따라서 잠시 뒤에 이어지는 니고데모와의 대화 본문에서 물과 성령의 의미는 곧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오순절에 내린 ‘약속의 성령’ 즉 ‘성령세례’는 매우 중요한 구원의 요소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받아야 천국,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신앙인이 ‘성령세례’ 또는 ‘약속의 성령’을 받는 것은 어떤 가치가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1)성령을 받는 것은 천국 기업을 상속하는 증거가 됩니다.
성경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재산 상속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가치의 유산을 영원히 상속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 약속을 확실히 지키겠다는 뜻으로 인(印 도장)을 찍어 보증해 주셨습니다. 그 인을 찍어 보증하신 일이 바로 ‘약속의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이 일에 대해 ‘성령으로 인쳤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했고 계시록 7장에는 한 천사가 해돋는 데서부터 올라와서 인을 가지고 선민의 이마에 인치려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성령세례를 통해 하나님이 성도에게 구원을 보증하신 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엡 1:13-14)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계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후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신실(믿을만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주셨다면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분이 내게 어떤 약속을 주셨다면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때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원인은 성품이 거짓된 사람이기 때문이거나 혹은 지킬 능력이 없거나 할 처지에 있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과 동시에 전능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성품적으로나 능력면으로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실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침을 통해 구원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히 6:17-18)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2)성령은 성도의 신앙생활의 보혜사가 되십니다.
성령은 천국 기업의 보증으로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천국을 소망하며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성도에게 여러 가지 실제적인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비록 성도는 천국의 약속은 받은 존재지만 이 땅에서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있는 것처럼 거듭난 성도에게도 역시 고난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불신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을 통해‘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었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부모는 타인의 자녀가 아니라 내 자녀에게 온갖 관심을 쏟고 필요를 공급하며 보살피듯이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한 보살핌을 받습니다. 그래서 비록 이 땅에서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우리 안에 성령께서 위로하시고 상담해주시며 감당하는 능력과 은혜를 주십니다. 이러한 성령을 일컬어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보혜사란 상담자, 조력자라는 뜻입니다.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물세례와 성령세례(성령의 내주)로 거듭난 성도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죄의 유혹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육체의 소욕에 이끌리지 않고 성령의 소욕에 이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단이 주는 생각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생각에 순종해서 선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의지와 결단을 동원해서 성령께서 주시는 선한 소욕에 순종하면 됩니다. 성령께서는 혹시 죄를 범했을 때 그 죄를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의지해서 그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때 우리 죄를 소멸시키시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성령의 풍성한 열매들을 맺게 하십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 세례 즉 약속의 성령은 성도 개인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이 이룬 공동체, 즉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성령이 이끌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은사는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고침의 은사, 능력의 은사, 예언의 은사, 각종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은사를 내려주시는 목적은 성도 개인이 자랑하고, 자기 만족하게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엡 4:11-12)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고전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3)방언이 성령을 받은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내주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승천 직후 오순절 절기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성령이 내리실 때처럼 방언(또는 영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방언을 성령 받은 증거로 삼아야 할까요?
첫째, 믿는 것이 곧 성령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믿으면 곧 성령 받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내용들을 살펴 볼 때 믿는다고 곧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성령의 내주는 별개의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9장 2절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만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 질문을 받은 제자들은 대답하기를 아직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 후 안수하자 성령을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행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 19:6-7)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둘째, 세례를 받은 것이 곧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에서 빌립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다시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서 성령받기 위해 안수 기도했습니다. 만약 예수를 믿었거나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충분했다면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성령을 구하며 안수한 것은 너무도 이상한 행동이 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마리아의 제자들이 세례 받은 것으로 불충분하고 성령을 받게 하기 위해서 안수받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본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 8: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셋째, 선행을 한다고 성령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이 그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실 만큼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령은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시고 그를 지시하셔서 베드로를 만난 후에야 비로소 그 가족들이 성령세례와 물세례를 받게 됩니다. 고넬료가 그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기억되는 신앙으로 구원받기에 충분했다면 굳이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 지시하시고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셔서 두 사람이 만나도록 주선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넬료 가정 방문한 일의 결말은 그 가정이 성령세례를 받고 이어서 물세례까지 받은 것으로 일단락되고 있습니다.
(행 10: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 가정의 전도는 오순절 사건 이후 대략 10년 정도 세월이 흐른 뒤에 나타난 사건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는 오순절 제자들에게만 임한 대표적 사건이거나 일시적 사건도 아닙니다.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여러 장로들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베드로는 고넬료 가정에 내린 성령세례가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라고 증거했습니다. 고넬료 가정도 오순절 제자들이 체험한 것과 똑같은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오순절과 똑같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사도 시대와 같은 현상은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행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넷째,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다고 성령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언젠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은 성령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고전 12:3). 그러나 베드로가 그 때 약속의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 절기에야 비로소 성령을 받았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성령 세례’로서의 성령이며 구원의 보증이 되는‘약속의 성령’입니다. 오순절 이전에 구약 시대부터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역사는 존재하듯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것은 감동의 역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것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면 오순절에 다시 ‘성령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오순절과 같은 동일한 체험으로 받는 것입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4)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을 때는 방언을 말했습니다.
위와 같은 내용을 살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물세례나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불완전한 단계의 신앙인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그런 신앙인들에 대해서 세례와 성령을 받게 한 사도들의 노력을 보면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선행하는 믿음으로 구원이 충분히 보장된다면 사도들은 굳이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베풀려고 사람을 만나고 안수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는 것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신약 성경에서 유일한 역사서로 분류되는 사도행전에만 성령 받는 순간 나타나는 구체적 현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오순절 날의 사도들의 체험에서(행 2:1-4), 둘째, 고넬료 가정에서의 체험에서(행 10:44-48), 셋째, 에베소 교인들의 체험에서(행 19:1-5) 그 현상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성령세례의 공통적 현상은 방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행 2:3-4)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10:45-46)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 19:5-7)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빌립이 사마리아 선교한 사도행전 8장의 기사에는 성령이 내려오실 때 방언을 말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그 정황상 방언을 말했을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때로는 생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들은 사마리아를 선교할 때 백성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안수했습니다. 그런데 마술사 시몬이 사도들에게 돈을 드려 자신도 그런 능력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 물세례만 받고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신도들에게 마술사란 직업인이 탐낼만한 어떤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추론하게 합니다.
(행 8:18-20)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위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보아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임했던 성령 강림은 구약의 성령의 역사와는 뚜렷이 구별됩니다. 그리고 성령세례의 구체적인 증거는 방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을 때 방언을 말하는 현상은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 사도교회를 계승하는 본 교회 안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