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항 세족례에 대한 우리의 믿음

 

세족례는 주님과 상관을 맺고 서로 사랑하고 성결, 겸손, 봉사, 용서의 교훈을 가르치는 성례이며 세례(침례)를 받은 모든 신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족례를 일차 행하며 신자들 상호간의 세족례는 필요시에 시행할 수 있음을 믿는다.

교회가 담고 있는 교리에는 공통된 지향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관계를 맺어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불완전한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들입니다. 참예수교회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세 가지 성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물세례, 성찬례, 세족례입니다. 그 가운데 세족례는 발을 씻기는 성례로 십자가 사건 직전 유월절 만찬에서 주님이 설립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본회에서는 이를 하나의 성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족례가 하나의 성례로 인정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며 우리를 그 안에 담고 있는 구원으로 인도할 귀중한 교훈들은 무엇일까요?

 

1)세족례는 예수님과 상관을 맺게 만듭니다.

세족례가 교회에서 하나의 성례로 성립되는 근거 중에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중에 나타난 ‘상관’이란 단어 때문입니다.

(13: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여기서 ‘상관’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메로스’(μέρος)로써 ‘부분’ ‘조각’ ‘몫’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상관을 맺는다’는 뜻은 예수께서 주시는 ‘몫을 받는다’ 또는 ‘분깃을 받는다’는 상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선언은 천국의 기업, 천국의 몫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그 말씀이 이렇게 엄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태도가 정반대로 돌변합니다. 조금 전까지 ‘절대로 발을 씻기지 못한다’고 거절하더니 이제는 ‘목욕까지 시켜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태도가 바뀐 이유가 예수님의 말씀이 구원과 관련된 엄중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13:10-11)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또 다른 근거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거절에 대해 답변하시는 내용 가운데 들어있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에서 ‘목욕하는 것’은 무엇이며 ‘발씻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석가들은 ‘목욕하는 것’이란 ‘물세례’를 가리킨다고 대체로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발 씻는 것’은 분명 ‘세족’을 가리킵니다. 주목할 점은 목욕하는 것이 발씻는 것과 병행하여 서술된 점입니다. 그런데 병렬 관계는 곧 성례와 성례의 관계여야 그러한 서술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물세례가 하나의 성례인 것처럼 세족례도 하나의 성례라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세 번째 근거는 요 13:15에서 예수님이 ‘내가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말씀하신 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긴 행위가 제자들도 장차 실천해야 하는 일이라고 밝히십니다.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이신 것처럼 제자들은 장래에 발씻기는 일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와 같은 여러 가지 근거로 최후 만찬이 있던 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행하신 사건은 일회적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 교회가 마땅히 성례로 수용해야 하는 것임을 반영합니다. 본회에서는 예수님이 세우신대로 세족례를 성례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 성례는 예수님과 ‘상관’을 맺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교훈은 무엇일까요?

 

2)세족례에는 사랑,성결, 겸손, 봉사, 용서의 교훈이 있습니다.

세족례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려는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오늘날 나는 그 교훈을 발견하고 세족례를 받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 그 뜻을 깊이 새기고 이웃들에게 주님을 닮은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그러면 구체적으로 세족례를 통해 실천해야 하는 주님을 닮은 신앙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예수님이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성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족례를 행하실 무렵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는 섬김의 왕이 되시고자 하셨지만 제자들은 주님이 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유대 민족을 독립시켜줄 정치적인 임금으로 즉위할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관심은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를 따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주님 곁에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에 모아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매우 가슴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며 배웠지만 예수님의 정신과 모범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 주님이 세 번이나 십자가 수난에 대해서 예언했건만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세배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주의 좌편과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이들의 요청에 대해 분노를 발했습니다. 분노를 느낀다는 것은 그들도 똑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서로 반목하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는 어리석고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둘째, 생활 속에서 자신의 성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땅에 발을 디디고 생활하므로 신체 가운데 가장 쉽게 오염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발입니다. 그래서 매일 씻고 관리하지 않으면 위생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성도가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삶 속에서 세속의 여러 가지 부정하고 불결한 것들에 유혹받을 수 있고 부정한 생각을 하고 불결한 행동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근원적으로 범죄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자신을 영적으로 깨끗하게 관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매일 자신의 발을 닦고 관리하듯이 성도는 매일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혹시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깨닫거나 범죄한 사실이 있다면 주님께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성결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우리의 영혼은 점점 하나님을 닮은 아름다운 형상의 성도로 점점 변화하게 됩니다. 이처럼 세족례는 이미 물세례는 받았으나 불완전한 성도가 어떻게 성결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셋째, 겸손하게 낮아져서 봉사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외출했던 어떤 사람이 귀가하면 그 발을 닦아주는 일은 그 가정의 종 가운데 가장 비천한 종이 담당하는 몫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만찬을 가지실 무렵 ‘누가 높으냐’하는 문제로 서로 반목하는 분위기 속에 있던 제자들은 결코 동료들의 발을 씻겨주는 섬김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먼저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이 자신들의 발을 씻기려고 하실 때 제자들은 얼마나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런 행위가 반목하는 분위기의 제자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을지 가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신분이 높은 자가 낮은 자의 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훈의 가르침대로 그분 자신이 세족례를 통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처럼 세족례 안에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내가 남보다 낮아져 겸손히 봉사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넷째, 용납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기신 열 두 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이 제자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패륜의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스승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음을 품은 유다를 돌이키시려고 간접적으로 수차례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스승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품었던 가룟 유다를 겨냥한 말씀입니다. 또 만찬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도 역시 가룟 유다를 겨냥한 지적입니다. 가룟 유다는 ‘어떻게 내 마음을 아고 계셨지? 아! 내가 죄를 지었구나! 스승님께 용서를 구하자’라고 깨닫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은 최후로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가룟 유다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겨냥하여 수차례 돌이키도록 수차례 말씀하시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그런 제자의 발을 씻기셨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평소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교훈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가르침대로 유다의 발을 씻기시는 행동을 통해서 원수의 죄를 용서하시는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세족례를 통해서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용서와 관용의 정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와의 관계 속에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모두 불완전하기 때문에 때로 성도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면서 해소될 수 있으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 세족례를 통해 주님의 정신을 되새기며 서로 화해와 용서를 도모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살전 5: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3)세족례 시행은 성경적 절차를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 즉, 물세례를 받은 제자들에게 세족례를 시행하셨듯이 오늘날에도 반드시 물세례를 먼저 받은 성도라야 세족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주님과의 관계를 맺는 의미에서 반드시 성령이 임재하시는 교회의 성직자로부터 한 차례 세족례를 받아야 하고 또 성도 상호간에 갈등과 불화의 경우 상호 합의가 이루어진 가운데 세족례를 시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족례를 통해서 불화와 갈등을 해소하는 것보다 먼저 대화와 상호 이해를 통해서 해소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때로는 세족례를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불화하고 분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세족례를 성례로 주신 주님께 오히려 매우 송구스러운 일이며 세족례 시행하여 화목을 시도한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족례를 시행하는 것보다 세족례의 정신을 더 높여서 평소 타인과 불화하지 않고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도 상호간에 세족례를 시행하는 것은 대화와 이해로도 해결되지 않고 상호간의 관계가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상호 발을 씻겨주는 기회를 갖는 것이 옳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