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항 구원에 대한 우리의 믿음

 

구원은 본래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성령을 힘입어 성결을 이루도록 추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성경교훈의 실천에 힘쓴다.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 초월적인 세계를 ‘위’로 표현합니다. 반면 인간이 거하는 현실 세계를 ‘아래’(땅)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이 ‘아래’에서 ‘위’로 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시작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방향성은 여느 종교와 기독교를 비교할 때 다른 종교는‘자력종교’(자기의 의와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종교)인 반면 기독교는‘타력종교’(절대자의 섭리로 은혜로 구원을 얻는 종교)라고 일컫는 근거가 됩니다.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는 사망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인간은 질병, 장애, 소외, 가난 등 다양한 고통과 슬픔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과연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구약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그 가능성에 대해서 시험하신 기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내려주십니다. 과연 인간이 스스로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실험하신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고 자신있게 ‘다 지키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나중의 결론이었습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기능만 할 뿐 인간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무능했습니다. 비유컨대 율법은 엠.알.아이(MRI)라는 의료 장비와 같습니다. 이 장비는 인간의 몸을 단층 촬영하여 병의 환부나 암세포가 어디에 분포했는지 자세히 보여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암세포를 죽이고 치료하는 기능은 전혀 없는 것과 같습니다.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위에 계신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이 스스로 육신이 되셔서 아래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거합니다. 만약 율법을 지켜서 하늘에 오를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내려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이런 사실들에는 하나의 방향성이 발견됩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구원에 이르려는 시도는 ‘아래에서 위로’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위에서 아래로’ 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위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시도된 것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시도된 것들은 인간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인간은 그 과정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고 하나님이 모두 이루신 것들입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은 인간이 관연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신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십자가 공로를 믿고 물세례와 성령세례로 거듭나는 제도를 세우신 것도 하나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인류 구원의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의지대로 계획하시고 성취하신 일입니다. 여기까지는 위에서 아래로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면 이제 인간이 시도해야할 일은 단지 그분이 은혜로 내려주신 것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다 이루시고 인간의 공로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의 구원을 ‘은혜’라고 합니다. 또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표현은 우리 구원의 성격이 공로와 노력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구원은 인간의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은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해 피흘려 주셨지만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둘로 나뉘는 기준이 될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서 그 길이 나뉩니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하나님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절대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그 절대의지를 닮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유의지는 양날의 검입니다. 이는 인간이 로봇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자율적 존재라는 축복의 의미도 있지만 혹시 잘못 선택할 경우 그것에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저주의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느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느냐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믿고 세례를 받을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반응하여 불신하고 세례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이 바로 구원과 저주의 길을 가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유의지를 발휘한 인간 자신의 책임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구원에 대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7:29-30)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위의 두 구절은 믿고 세례를 받는 여부가 구원과 저주의 분기점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느냐 저버리느냐의 분기점이 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모든 인간이 자신의 십자가 ‘은혜’를 부어주신데 대해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아담은 자기의 자유의지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마귀의 음성을 따르는 불신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불신’으로 깨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믿음’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구원이란 예수님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인간이 ‘믿음’으로 반응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믿음이 있으면 마땅히 세례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이요, 천국까지의 구원의 경주로에서 그 출발선에 서는 것입니다.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3)하나님의 약속은 은혜로 주신 것이며 믿음은 약속에 대한 응답 입니다.

‘약속’이란 단어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주시는 주체이십니다. ‘믿음’이란 단어는 인간에게 속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는 주체입니다. 또 약속과 믿음의 선후 관계를 따지면 무엇이 먼저 있을까요? 먼저 약속이 있고 믿음이 나중에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존재해야 인간의 믿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약속도 주지 않으셨는데 인간의 믿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믿음을 겨냥한 것이고 믿음은 약속에 구속됩니다. 이렇게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하나님은 ‘믿음’이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류 시조 아담처럼 ‘불신’으로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천년 전 예루살렘에 그리스도를 십자가 달리게 하심으로써 인류에게 임한 저주를 대신 감당하시는 충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어떤 불신의 핑계도 늘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 희생의 은혜에 대해서 믿음으로 응답해야 마땅합니다.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4)성도는 성령을 의지해 성결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이미’ 구원은 받았다고 선언하기도 하지만 ‘아직 아니’라고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이미 임했지만 천국은 앞으로 임할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모순되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특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유컨대 두 나라가 전쟁을 치를 때 한 나라가 승리해서 다른 나라가 항복하고 종전을 선언했지만 아직까지 각 전투 지역에까지는 승전보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승전보가 전달되고 정전 통보가 전달되기까지 아직도 부분적으로 총알이 날아가고 포사격이 계속되듯이 우리의 구원도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불완전한 상황 때문에 성도의 삶 속에 고난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성도는 삶 속에서 때때로 여러 가지 사건과 상황을 통해 죄의 세력에게 고통당합니다. 그러나 낙심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아시고 하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그분께 위로받고 힘을 얻고 고난을 이기게 해주십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모르더라도 우리 안에 부어주신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해 주십니다.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도는 이렇게 자신 안에 부어진 하나님의 영을 의지하여 육신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순종하며 이 땅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죄의 권세를 이기고 죄의 유혹을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성도는 하나님 경외,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천국 백성인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최고의 법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도 크게 둘로 양분하면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십계명도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라는 두 가지 큰 주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법이요,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 사랑에 대한 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가장 큰 계명, 가장 상위의 법이 바로 이 법임을 천명하셨습니다.

(22:37-39)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6)성도는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범해서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들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처럼 성도의 신앙 생활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사랑의 완성이며 사랑은 천국 백성이 갖추어야 하는 최고의 덕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13장에서 성도가 품어야 할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결같이 우리의 내적인 형상, 인격, 성품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최고의 계명을 인식하고 나의 내적 형상, 인격,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경주할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천국을 이루시고 비록 이 땅에 살더라도 하늘의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마음 속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천국에 대한 소망, 그리스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이렇게 신앙이란 탁자의 상판을 떠받치는 세 개의 견고한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