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된 것임을 믿으며 참 진리의 유일한 근거가 됨과 동시에 신도생활의 기준이 됨을 믿는다.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성경은 마치 한 사람의 저자가 그 내용을 구성하고 기록한 것처럼 일관된 주제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습니다. 그 일관된 주제란 바로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입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1:20-21)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6)

성경은 진리를 증명하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성경의 목적대로 그 주제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떻게 영생을 주시고 어떤 과정을 통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지 그 계획과 성취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춰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5:39)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사8:20)

성경은 신도생활의 기준입니다.

천국의 법에서 가장 근본적인 핵심의 법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어주신 구원의 과정
즉,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고, 성령을 내려주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모든 과정에 대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란 주님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모든 구원의 과정을 마련해 주셨으니 그 사랑과 은혜를 입은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히 나타낼 성결하고 의로운 삶을 가리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3:17)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수1:8)

성경은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이 복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말씀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실천할 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잠3:3)

본 교회는 예수님께서 늦은 비 성령으로 세우신 교회입니다.

신약 교회의 출발은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이라는 유대인의 절기 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오순절 절기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셨고 약속의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비로소 권능을 받고 예수님이 명하신대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늘날 한국에는 많은 교단 교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초대교회는 이렇게 분열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분열된 배경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 원인과 과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유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약 삼백년이 지날 무렵 순수한 초대교회의 신앙은 이교도의 우상숭배의 문화와 결합하면서 점점 변질되어갔습니다.

동양의 신비종교의 사상이 담긴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과 헬라의 철학 사상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온 것입니다. 더욱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A.D. 313년) 이후 교회는 잔혹한 핍박은 면하게 되었지만 로마의 정치 세력과 타협하면서 순수한 신앙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모습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세속 권력과 결탁한 종교 집단으로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 타락의 결과 교회는 교리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교회에 세워두셨던 온전한 교리들이 변질되고 제거되는 통탄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일신론은 이교에서 유래한 삼신론에 영향을 받아 삼위일체론으로 대치되었고, 세례는 본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성례로 온 몸이 물에 잠기는 침례였지만 그 중생의 실효성을 부정하며 상징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 실내에서 이마에 물을 찍어 주는 약식 세례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마치신 직후 세우신 제칠일 안식일(토요일)을 당시 로마 태양신 숭배일인 일요일로 대치시켰습니다. 그 결과 예수께서 인간 영혼의 구원을 위해 세우신 구원의 교리들은 교회 안에서 사라졌고 교회로서의 영적인 권세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바벨론 제국이 쳐들어와 솔로몬 성전을 훼파하고 그 안에 기물들을 다 약탈해 간 것처럼 초대 교회 안에 존재했던 영적 기물들(구원의 교리들)은 모두 이단 사상에 의해 약탈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타락하여 더 이상 교회라고 일컬을 수 없을만큼 부패하게 되자 성령 강림이 중단되게 됩니다. 로마 정부의 정치 세력과 타협한 교회는 더 이상 순수한 교회가 아니라 세속의 권력과 결탁한 타락한 집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로마 천주교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0: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로마의 세속 권력과 결탁한 천주교는 역사 속에서 많은 불의를 자행했습니다. 교황은 베드로의 사도권을 직접 계승한 존재로 여겨졌으며 그 세속적 권세가 매우 강했습니다. 과거 역사를 살펴볼 때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한 ‘카놋사의 굴욕’ 사건은 그 당시 교황의 권세가 얼마나 위세를 떨쳤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또 교황의 절대 권력 아래 천주교는 종교재판을 통해 선량한 신앙인들을 탄압하고, 십자군 전쟁을 통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역사 속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할 재원 마련을 위해 거짓된 교리까지 만듭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위해 ‘면죄부’를 구매하면 그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격상된다는 허황된 연옥교리였습니다. 독일의 한 천주교 사제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러한 천주교의 거짓 교리와 불의한 행태에 분개해서 1517년 10월 경 천주교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적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문에 내걸었고 이에 군중이 호응하고 연합하면서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비로소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의 처음 동기와 출발은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 개혁’의 본질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이는 ‘종교 분열’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 개혁이 시작된 때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개신교는 교리상의 이견, 교회 정치상의 이견 등으로 수백 수천개의 교단 교파로 분열을 거듭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많은 교단 교파가 난립하게 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바로 종교 개혁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일례로 종교 개혁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루터와 동료였던 쯔빙글리(Vlrich Zwingli)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성찬례’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루터와 결별합니다. 이미 개신교는 출발부터가 이러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즉 개혁교회는 ‘종교 개혁’이라고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 성격을 살펴볼 때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온전히 회복한 개혁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루터는 종교 개혁의 의도가 없었습니다. 타락한 천주교의 부조리만 바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출발이 이러하니 개신교는 천주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증거는 천주교에서 황제에 의해 변경된 성일, 즉 일요일 준수를 그대로 계승했고 천주교의 영세와 유사한 형태의 세례를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례가 상징에 불과하고 단지 교회 입교 절차로 필요한 과정으로만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 개신교의 종교 개혁 운동의 성격을 짚어보면 사실은 인류사에서 인문주의, 계몽운동이 싹트던 시대의 흐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은 인간이 과거보다 현명해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촉발된 인간으로부터의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에 의한 개혁인지라 불완전한 개혁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세우셨던 진리의 기둥들, 영적 성전에 있어야할 진리의 기둥들(세례, 성령, 안식일 등)은 회복하지 못하고 사람의 생각대로 사람들이 만들어낸 교리들로 교회의 내소를 치장한 것입니다.

(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불완전한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아래로부터의 개혁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완전한 교리로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완전하신 하나님이 위로부터 완전한 개혁을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세월이 흘러 19세기에 이르러서 그 전조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사도시대 오순절과 같은 성령이 내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당시 미국의 세속화된 교회를 한탄하며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던 일부의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게 되고 그 세력은 점점 확대되었습니다. 이윽고 자신들의 새로운 복음에 사명을 느낀 자들은 오순절과 같은 체험의 성령을 세계 곳곳에 전파하기 시작했고 그 물결이 중국에도 전달되었습니다. 이런 위로부터 시작된 신앙 개혁의 과정 속에서 초대 교회와 동일한 구원의 교리를 갖춘 교회가 나타납니다. 중국 산동성에서 사도 시대의 진리를 추구하는 가운데 성령이 강림하시고 초대교회를 계승한 참교회가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타락했던 교회가 하늘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개혁에 의해서 말세에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비와 늦은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34:26) 내가 그들에게 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이스라엘에서는 농사에 있어서 중요한 비가 두 차례 내리는데 그것은 이른비(가을비)와 봄비(늦은비)입니다. 밀이나 보리 파종 전에 반드시 이른비(가을비)가 내려야 파종할 수 있고 추수 전에는 반드시 늦은비(봄비)가 내려야 추수할 수 있습니다. 겨울은 우기로서 장마비가 오고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땅에서 농사에 중요한 비가 두 차례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적 농사, 즉 인류 구원의 밭인 지구상에 ‘영적인 비’가 두 차례 내릴 일에 대해서 성경은 상징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팔레스틴의 기후와 관련한 농사문화를 통해 인류사에서 두 차례 나뉘어 내릴 성령 강림의 사건을 비유하셨습니다. 즉 이른비란 사도교회의 오순절 성령을 상징하고, 늦은비는 말세에 다시 회복된 참교회에 내릴 성령 강림을 상징합니다. 이 말세에 내리신 늦은비 성령 강림으로 설립된 교회가 바로 참예수교회입니다.

16세기 마틴 루터에 의해 아래로부터의 불완전한 종교 개혁과는 달리 하나님은 20세기에 이르러서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위로부터의 온전한 개혁을 진행하셨습니다. 그 개혁의 결과 죄사함의 은혜를 주는 성경적 세례(거듭남의 물세례), 천국 기업의 보증이 되는 약속의 성령(거듭남의 성령세례), 천주교에서 변경한 일요일을 다시 토요일로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루터의 종교 개혁이 완전한 것이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20세기에 이르러 굳이 성령을 이 땅에 다시 내려주시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루터에 의해 시작된 개혁 교회도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오류가 많고 불완전했기 때문에 참교회를 회복시키시고 인류의 구원 사역을 지속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개혁하시고 회복시키신 본 교회는 다른 교회와 비교할 때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성경은 신도생활의 기준입니다.

어떤 국가든지 그 나라 국민이라면 반드시 준수해야하는 국법이 있는 것처럼 천국의 시민인 성도도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천국의 법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법 가운데 가장 상위의 법이 헌법이듯이 천국의 법에서 가장 근본적인 핵심의 법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어주신 구원의 과정 즉,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고, 성령을 내려주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모든 과정에 대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란 주님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모든 구원의 과정을 마련해 주셨으니 그 사랑과 은혜를 입은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히 나타낼 성결하고 의로운 삶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성결하고 의로운 삶도 우리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부어주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말씀을 순종하는 실천의 의지가 발휘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나타낸 의로운 삶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과 및 관절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추악한 죄악을 제거하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도록 인도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체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도와주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고칠 수 있게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의한 변화의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없으면 이웃 사랑의 계명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마치 미성숙한 어린 아이는 자기보다 어린 동생을 배려하고 돌보아주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처럼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어린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성도를 배려하고 돌보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참고. 고전 1:10-13 3:1-4). 따라서 성도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뜻을 깨닫고 성령으로 기도하여 영혼의 성장과 성숙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지속될 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의 사람으로 점점 변화하게 되고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성경은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이 복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말씀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실천할 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52시간 20분, 신약성경은 7시간 40분으로 육십 육권을 모두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60시간 정도라고 합니다. 성경 전권을 단기간에 통독하는 일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적은 분량이라도 매일 일정한 분량을 정하고 정기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말씀을 암송하여 마음판에 새기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암송하면 더 깊은 감동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3:3)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성경은 진리를 증명하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모두 사람들에게 특정한 유익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사람이 죽은 이후 영생으로 들어가게 할 목적으로 기록된 책은 성경 뿐입니다. 모든 책들 가운데 독특하고도 유일한 목적입니다. 이 성경의 기록 목적은 성경의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성경의 목적대로 그 주제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떻게 영생을 주시고 어떤 과정을 통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지 그 계획과 성취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아져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은 모두 장래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실 일들의 예표(예언 등을 미리 보여주는 조짐)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애굽 바로 왕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넌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악 세상의 노예가 된 인간들을 세례를 통해 거듭나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예표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한 여호수아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을 이끌고 천국을 침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들과 그분이 장차 하실 일에 대해서 예표하는 사건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지어 구약의 모든 내용이 곧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개신교에서는 천주교와는 달리 오로지 구약 삽십 구권과 신약 이십칠 권만 정경으로 인정하며 그 외의 외경(성경외의 경전)이나 위경(올바른 신앙에서 벗어난 거짓 경전)과 같은 것들은 정경(바른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외경과 위경에는 본래의 신앙 정신에서 변질되거나 동방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은 이단적인 내용들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기독교 신앙을 추구한다면 66권의 경권만 정경(正經)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것은 성경에 포함되고 어떤 것은 제외하는 문제는 이미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순수한 신앙의 정기를 소유했던 초대교회에서 판단하고 구별하여 정리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동일한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는 육십 육권의 성경만 정경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고후 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감동로 된 것입니다.

성경은 약 1,500년의 기간 동안 약 40여명의 인간 저자를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그 저자들의 출신, 학문의 정도, 직업, 살았던 시대, 개성 등이 매우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왕족, 제사장도 있었지만 농부, 목동이 직업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마치 한 사람의 저자가 그 내용을 구성하고 기록한 것처럼 일관된 주제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습니다. 그 일관된 주제란 바로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은 성경의 저자가 눈에 보이는 인간 저자들(이를 제 2저자라고 부름)이 아니라 사실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를 제 1저자라고 부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개성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출신, 학문의 정도, 개성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따라서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해 감동(영감)된 사람들이 기록한 문서’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즉 하나님의 신이 인간 저자를 ‘감동’, 또는 ‘영감’시킨 상태에서 그를 도구로 삼아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원어의‘감동’ 또는 ‘영감’(inspiration)이란 의미는 ‘신의 바람을 쏘인’(데오스 퓨뉴스토스)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신(영靈, 바람)에 쏘여져 하나님의 도구가 된 자들의 저작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벧후1:20-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과 그와 관련된 일들을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약 성경을 인용하셨다는 것은 구약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합니다(참고. 요5:46). 또 보편적인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토라’(Torah:율법서) ‘느비임’(Neviim:선지서) ‘크투빔’(Kethoubim:성문서)으로 삼분하는데 예수님도 그와 같이 구약 성경을 셋으로 분류하셨습니다. 위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은 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 된 글임을 받아들이셨고 그 권위를 인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한 분이라고 믿는다면 그분이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듯이 우리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마땅합니다.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 시대의 ‘성경’은 구약 성경에 한정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시대에는 아직 신약 성경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신약 성경을 기록하신 적이 없고 또 제자들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신약이라는 것이 경전으로 존재합니다. 구약 성경은 앞서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인정하시니까 우리도 구약 성경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신약 성경은 무엇을 근거로 기독교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 신약 성경은 예수님 승천 이후 교회의 신앙생활의 소산물로 출현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본래 초대 교회 성도들이 교회를 이루고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직계 제자나 그에 준하는 자들이 기록한 문서들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직계제자나 그에 준하는 인물들의 저작을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일찍이 신령한 문서로 취급했습니다. 그 증거를 신약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를 언급합니다. 이 바울의 편지가 바로 오늘날 바울 서신이라고 일컫는 신약의 경권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이 바울의 편지를 마치 구약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경전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즉, 구약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면 안되는 것처럼 바울의 편지(바울 서신)도 억지로 해석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초대 교회가 구약 성경을 다루듯이 바울의 편지를 다루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구약 성경을 권위있는 문서로 보듯이 바울의 편지도 권위있는 문서로 본 것입니다. 이는 조금 확대해서 해석하면 사도들의 편지를 구약 성경처럼 새로운 경전으로 삼게되는 근거가 됩니다. 이렇게 권위있는 문서로 인정받은 문서들이 수집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27권의 신약 경전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을 신뢰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신약 성경을 새로운 언약의 경전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벧후 3:15-16)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구약 성경)과 같이 그것도(바울의 편지)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그분의 생생한 교훈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교회는 평소 교훈의 내용을 상기시켜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고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유지하고 가르치는 경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교회 공동체의 동의에 의해 편집이 완료되어 회의를 통해 경전으로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아야할 점은 인간이 만든 회의체에서 성경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초대교회가 과거부터 순수한 신앙의 교본들로 삼았왔던 편지들을 회의의 과정을 통해 경전으로 재확인하고 천명한 것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성경을 신앙의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안에 담긴 교훈을 믿을 수 있습니다.  

제2항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

제2항 성경에 대한 우리의 믿음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 된 것임을 믿으며 참 진리의 유일한 근거가 됨과 동시에 신도생활의 기준이 됨을 믿는다.

 

성경은 현재 2008년 12월 말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6,500여개 언어 중에서 2,479개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성경은 세계인이 가장 많이 구매하는 인류의 베스트셀러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많은 관심과 호응을 받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 안에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감동로 된 것입니다.

성경은 약 1,500년의 기간 동안 약 40여명의 인간 저자를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그 저자들의 출신, 학문의 정도, 직업, 살았던 시대, 개성 등이 매우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왕족, 제사장도 있었지만 농부, 목동이 직업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마치 한 사람의 저자가 그 내용을 구성하고 기록한 것처럼 일관된 주제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습니다. 그 일관된 주제란 바로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은 성경의 저자가 눈에 보이는 인간 저자들(이를 제 2저자라고 부름)이 아니라 사실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를 제 1저자라고 부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개성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출신, 학문의 정도, 개성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따라서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해 감동(영감)된 사람들이 기록한 문서’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즉 하나님의 신이 인간 저자를 ‘감동’, 또는 ‘영감’시킨 상태에서 그를 도구로 삼아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원어의‘감동’ 또는 ‘영감’(inspiration)이란 의미는 ‘신의 바람을 쏘인’(데오스 퓨뉴스토스)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신(영靈, 바람)에 쏘여져 하나님의 도구가 된 자들의 저작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벧후1:20-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과 그와 관련된 일들을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약 성경을 인용하셨다는 것은 구약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합니다(참고. 요5:46). 또 보편적인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토라’(Torah:율법서) ‘느비임’(Neviim:선지서) ‘크투빔’(Kethoubim:성문서)으로 삼분하는데 예수님도 그와 같이 구약 성경을 셋으로 분류하셨습니다. 위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은 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 된 글임을 받아들이셨고 그 권위를 인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한 분이라고 믿는다면 그분이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듯이 우리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마땅합니다.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 시대의 ‘성경’은 구약 성경에 한정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시대에는 아직 신약 성경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신약 성경을 기록하신 적이 없고 또 제자들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신약이라는 것이 경전으로 존재합니다. 구약 성경은 앞서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인정하시니까 우리도 구약 성경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신약 성경은 무엇을 근거로 기독교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 신약 성경은 예수님 승천 이후 교회의 신앙생활의 소산물로 출현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본래 초대 교회 성도들이 교회를 이루고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직계 제자나 그에 준하는 자들이 기록한 문서들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직계제자나 그에 준하는 인물들의 저작을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일찍이 신령한 문서로 취급했습니다. 그 증거를 신약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를 언급합니다. 이 바울의 편지가 바로 오늘날 바울 서신이라고 일컫는 신약의 경권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이 바울의 편지를 마치 구약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경전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즉, 구약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면 안되는 것처럼 바울의 편지(바울 서신)도 억지로 해석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초대 교회가 구약 성경을 다루듯이 바울의 편지를 다루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구약 성경을 권위있는 문서로 보듯이 바울의 편지도 권위있는 문서로 본 것입니다. 이는 조금 확대해서 해석하면 사도들의 편지를 구약 성경처럼 새로운 경전으로 삼게되는 근거가 됩니다. 이렇게 권위있는 문서로 인정받은 문서들이 수집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27권의 신약 경전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을 신뢰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신약 성경을 새로운 언약의 경전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벧후 3:15-16)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구약 성경)과 같이 그것도(바울의 편지)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그분의 생생한 교훈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교회는 평소 교훈의 내용을 상기시켜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고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유지하고 가르치는 경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교회 공동체의 동의에 의해 편집이 완료되어 회의를 통해 경전으로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아야할 점은 인간이 만든 회의체에서 성경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초대교회가 과거부터 순수한 신앙의 교본들로 삼았왔던 편지들을 회의의 과정을 통해 경전으로 재확인하고 천명한 것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성경을 신앙의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안에 담긴 교훈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진리를 증명하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모두 사람들에게 특정한 유익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사람이 죽은 이후 영생으로 들어가게 할 목적으로 기록된 책은 성경 뿐입니다. 모든 책들 가운데 독특하고도 유일한 목적입니다. 이 성경의 기록 목적은 성경의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성경의 목적대로 그 주제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떻게 영생을 주시고 어떤 과정을 통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지 그 계획과 성취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아져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은 모두 장래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실 일들의 예표(예언 등을 미리 보여주는 조짐)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애굽 바로 왕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넌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악 세상의 노예가 된 인간들을 세례를 통해 거듭나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예표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한 여호수아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을 이끌고 천국을 침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들과 그분이 장차 하실 일에 대해서 예표하는 사건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지어 구약의 모든 내용이 곧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개신교에서는 천주교와는 달리 오로지 구약 삽십 구권과 신약 이십칠 권만 정경으로 인정하며 그 외의 외경(성경외의 경전)이나 위경(올바른 신앙에서 벗어난 거짓 경전)과 같은 것들은 정경(바른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외경과 위경에는 본래의 신앙 정신에서 변질되거나 동방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은 이단적인 내용들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기독교 신앙을 추구한다면 66권의 경권만 정경(正經)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것은 성경에 포함되고 어떤 것은 제외하는 문제는 이미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순수한 신앙의 정기를 소유했던 초대교회에서 판단하고 구별하여 정리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동일한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는 육십 육권의 성경만 정경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고후 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성경은 신도생활의 기준입니다.

어떤 국가든지 그 나라 국민이라면 반드시 준수해야하는 국법이 있는 것처럼 천국의 시민인 성도도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천국의 법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법 가운데 가장 상위의 법이 헌법이듯이 천국의 법에서 가장 근본적인 핵심의 법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어주신 구원의 과정 즉,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고, 성령을 내려주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모든 과정에 대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란 주님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모든 구원의 과정을 마련해 주셨으니 그 사랑과 은혜를 입은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히 나타낼 성결하고 의로운 삶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성결하고 의로운 삶도 우리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부어주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말씀을 순종하는 실천의 의지가 발휘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나타낸 의로운 삶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과 및 관절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추악한 죄악을 제거하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도록 인도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체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도와주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고칠 수 있게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의한 변화의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없으면 이웃 사랑의 계명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마치 미성숙한 어린 아이는 자기보다 어린 동생을 배려하고 돌보아주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처럼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어린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성도를 배려하고 돌보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참고. 고전 1:10-13 3:1-4). 따라서 성도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뜻을 깨닫고 성령으로 기도하여 영혼의 성장과 성숙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지속될 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의 사람으로 점점 변화하게 되고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성경은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이 복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말씀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실천할 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52시간 20분, 신약성경은 7시간 40분으로 육십 육권을 모두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60시간 정도라고 합니다. 성경 전권을 단기간에 통독하는 일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적은 분량이라도 매일 일정한 분량을 정하고 정기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말씀을 암송하여 마음판에 새기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암송하면 더 깊은 감동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3:3)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