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제목] 돌을 옮기는 야곱 (창29;1-10)
[설교자] 신영길 전도자
[설교일] 2024/07/20(토)
요즘 우리 교회 아동부 한 아이는 한창 자기 고집이 센 때입니다. 원복은 맘에 안 든다며 잘 안 입으려고 합니다. 제 딸도 그맘때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한여름인데 겨울 부츠를 꺼내서는 신고 가겠다고 떼를 쓰곤 했습니다. 그런 아이를 말리다가 포기했습니다. 고생해 보면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이란 다 그렇게 자기 고집을 하나씩 꺾어가며 배우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겠노라 이 길을 걸으면서 정말 그렇게 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내 뜻을 버리지 못하고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야곱은 굴곡이 많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입장에선 그만큼 하나님의 손길이 어떻게 그를 인도하셨는지 발견하기 쉽습니다. 야곱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은 없는지, 우리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로 가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창29;1을 보면 야곱이 “발행했다”고 돼 있습니다. 직역하면 “발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과 축복을 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출발은 가벼웠을지 몰라도 야곱의 말년을 보면,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이후 2~14절을 보면, 24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늙은 종을 하란으로 보낼 때와 비슷합니다. 우물에서 결혼 상대자를 만나기까지 순탄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늙은 종에겐 있었는데 야곱에겐 없는 것이 있습니다.
2~8절 보면, 당시 목자들의 우물 사용 관습이 서술돼 있습니다. 큰 돌을 막아 두었다가 목자들이 모이면 먹이고 다시 덮습니다. 그런데 그런 설명을 들은 야곱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직 해가 높으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풀을 뜯기라고. 그러나 목자들이 거절했습니다.
큰 돌이니까 무거웠을 것입니다. 물론 야곱이 혼자 옮긴 걸 보면 혼자서는 절대 옮기지 못할 무게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게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규칙이고 관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라헬이 등장하고 야곱은 혼자 그 돌을 옮기고 양 떼에게 물을 먹입니다.
야곱이 그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서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창 29:10)
아마 다른 목자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그리고 라헬도 놀랐을 것입니다. 그의 박력있는 모습과 넘치는 힘에 매력을 느꼈을까요? 야곱은 그 순간 괴력의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자기 생각을 위해 괴력을 발휘한 사나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우물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는 때가 있지요. 그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은 혼자서 큰 돌을 옮기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는 것을 보면 그는 자기 시간표, 자기 뜻,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그가 좋아하는 일을 위해 힘을 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선 일이 잘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잊은 것이 있습니다. 결혼의 과정에서 늙은 종에게는 있었는데 야곱에게는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란에 간 목적은 동일했지만 신붓감을 만나기 전 아브라함의 늙은 종과 달리 야곱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순적한 만남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면서 리브가와 “몇 날”후에 만날 것을 약속했습니다(창27;44). 그러나 야곱은 자기 맘대로 라반과 7년을 계약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체 없이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가려고 한 늙은 종과 달리 자기 임의로 14년을 계약했습니다.
야곱은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즉 자신이 인생의 주인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의 삶은 성공적으로 보입니다. 두 아내, 13명의 자녀. 그리고 장인 집에 살면서 재산을 늘려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야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창 30:30)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공력”이라는 단어는 1절에서 들었던 “발”입니다. “그의 발을 따라” 즉, “그의 노력을 따라”. 그런 그의 삶의 결과가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길이 가장 좋은 길이고 쉬운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살고 계신가요? 계속 내 뜻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자꾸 큰 돌을 놓으실 것입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돌을 만났을까요? 그럴 때 얼마나 자주 내 힘으로 그 돌을 옮기려고 했나요?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옮겨 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험악한 세월을 살게 됩니다.
순탄한 삶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야곱의 인생 후반에 그는 가뭄을 만나 결국 요셉이 총리로 있던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의 뜻대로 내려갔을까요?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발행하여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니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발행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의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비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웠고 (창45;28-46;5)
야곱의 말년에 그는 달라졌습니다. 자기 뜻이 있었지만 하나님께 여쭈었고 그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런 그의 임종은 어땠을까요?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창 49:33)
그는 그의 발을 스스로 모으고 죽었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기력이 있었고 평안히 죽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젊어서 발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자기 힘과 뜻으로. 그러나 마지막에 발을 모으고 가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그 뜻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은혜 주시는 분의 뜻과 시간에 따라야 합니다. 그걸 위해서 기도도 하고 말씀도 읽는 것이지요. 말씀은 말씀대로 읽으면서 삶은 여전히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아무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고 싶은 대로 가게 두시기도 하지만 또 우리를 지키고 이끄시는 분입니다. 잃은 양이었지만 믿음을 회복한 분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저 역시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붙들고 이끌고 계셨음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오늘 이 자리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믿음만으로는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해서도 이런 약속을 주셨는데 하물며 우리 인생에 필요한 은혜와 축복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내 뜻대로”, “내 시간표대로” 안되면 불안해서 엉덩이를 가만 두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내게 약속하신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시기도 합니다. 나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은 약속을 이뤄가고 계십니다.
여러분 앞에는 어떤 돌이 있습니까? 내 앞길에 장애가 되는 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은혜를 체험할 돌입니까? 은혜를 체험할 돌이 되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이 우리의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돌을 옮기느라 힘을 쓰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옮겨 주시기를 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