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제목] 분노 (마5:21-26)

[설교자] 김용준 목자

[설교일] 2022년 7월 2일(토) 안식일 예배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5: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제자들도 이 말씀을 받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살인하면 그 결과는 사형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살인하면 그 사람이 자기 피를 흘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만큼 하나님께서는 살인을 엄하게 다루고 계십니다. 제자들과 청중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증거 하실 때, 그들은 이것이 엄중한 말씀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는 ‘나는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하나님 앞에 살인한 일이 없으니, 하나님 계명을 어긴 일이 없고 의롭게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가’ 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살인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의 참 뜻을 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주신 당사자가 육신을 입고 오셔서 계명의 참 뜻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 마음은 무엇인가요? 이 계명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에게 어떤 수준의 거룩을 요구하시는가요?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심판이란, 사람을 죽인 자가 받는 사형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노하면 살인자가 받는 벌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형제에게 욕설하는 자는 공회의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 모독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 즉 살인자는 지옥 불에 들어갑니다.

‘분노’에는 ‘뒤모스(θυμός​​​)’와 ‘오르게(ὀργή​​​)’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뒤모스’란, 금방 붙었다 사그라드는 불입니다. 즉, 일시적으로 타오르는 분노입니다. 욱하다가도 금방 사그라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분노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분노는 ‘오르게’입니다. 모든 분노가 죄는 아닙니다.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이 말씀을 통해, 분과 죄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분노를 품는 것입니다. ‘오르게’는 ‘뒤모스’와는 달리, 지속적인 분노를 가리킵니다. 지속적인 분노를 가지고 악의를 가지고 남을 해치려 하는 미움을 품는 것이 ‘오르게’입니다. 분노에는 시간적 한계가 있습니다. 해가 지도록까지입니다. 새로운 날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분노를 품고 버리지 못해서는 안됩니다. 즉, 분을 내어도 죄를 지어서는 안됩니다. 뒤모스와 같은 분노를 느낄 수는 있으나, 그 분노를 품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아주신 것에 대해 가인이 매우 분노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죄의 소원은 그에게 있으나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노를 죄가 되도록 연결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악의적인 분노를 살인죄로 규정하시는 까닭은, 살인이 노하고 미워하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살인은 미워하고 분노하는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이러한 분노를 살인죄로 규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분노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마음에는 창고가 있습니다. 그 중 분노의 창고가 있습니다. 그 창고에 두고두고 분노를 쌓아갑니다. 이 분노를 쌓아 증오로 발전하도록 내버려 둔 것입니다. 이것이 증오로 바뀐 후에는 말이 변합니다. 험악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좋지 않은 눈으로 그를 보게 됩니다. 마음에 분노가 쌓이면 말이 좋게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노는 죄입니다. 분노의 창고에 분노가 쌓이면, 상대가 아무리 작은 잘못을 해도 폭발하게 됩니다. 남편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작은 일에도, 분노를 쌓아 증오를 품게 된 아내는 폭발하게 되는 것입이다. 이러한 분노의 마음이 마귀에게 이용당하는 근거가 됩니다.

(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미련한 놈’이라는 말도 많이 쓰는 말입니다. ‘똥멍청이’, ‘바보같은 놈’, ‘골빈 놈’, ‘머리 빈 깡통’ 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은 마음에 분노가 쌓여 증오를 품고 상대를 깔아뭉개는 것입니다. 분노를 쌓는 사람을 살인자로 규정하시는 말씀 앞에 우리는 두려워 떨어야 합니다. 우리가 삭이지 못하는 분노를 품고 있는 것은 살인이기 때문입니다.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러한 분노를 품은 사람이 살인자입니다. 심리학자의 통계에 따르면, 80%의 부부가 마음 속의 분노로 인해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사소한 일로 크게 다툰다면, 마음 속에 가만히 숨겨놓은 분노가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면 80%가 적중합니다. 문제의 뿌리가 그 분노에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삭이지 못하는 분노가 있습니다. 말씀과 같이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면, 우리는 몇 번씩 사랑하는 가족을 몇 번씩 죽이고 있는 것입니까? 문제는, 이 분노는 남뿐 아니라 자기도 죽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향해 분노하는 자는 예배드릴 자격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서로 분노를 안고 있으면 불행해집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면 예배 전에 그 감정을 가져와서는 안됩니다. 그 감정을 먼저 처리하고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십니다. 분노는 이렇게 무서운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분노를 놔둬서는 안됩니다. 잘 처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분노를 처리할 수 있을까요? 네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 자기 의를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스스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해석을 듣기 전에는, 우리가 살인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앞에 우리를 비추어보니, 살인자는 바로 나 자신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의는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아직 자기는 남보다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교만을 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의로워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 담긴 계명이 얼마나 높은 수준의 것인지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즉 무지하기 때문에, 혹은 뻔뻔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알면서도 자기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거나, 영적 치매에 걸린 것입니다. 자기 의를 버려야 합니다. 계명을 바르게 이해하면, 계명은 살고 우리는 죽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분노를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분노가 가득 찼다는 것을 인정하고 분석해보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분노 창고 안에 있는 상처 분노, 시기 분노, 실망 분노, 좌절 분노, 자존심 상처 분노, 애정결핍 분노 등을 확인하여 창고 정리를 해야 합니다. 분노를 확인하는 것이 첫 단계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이렇게 많이 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속에 이것이 얼마나 많은지 보아야 합니다. 그 목적과 이유는 무엇입니까?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철저히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아시고,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저주 아래 계셨습니다.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께서 순종하셔서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덧입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뒤에 숨어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 없이 하나님을 부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의를 옷입고 그 옷에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 옷을 입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는 안됩니다. 죄로 얼룩진 옷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서야 합니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철저히 의지해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 앞에 의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회개하면 된다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전부인 줄 알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화날 때는 화도 내고, 용서 받기도 하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들을 능력이 없으니, 이런 삶은 애초부터 포기하고 예수님만 믿자, 예수님의 능력만 믿자, 그리고 하루에 열 두 번이라도 형제를 미워해도 어쩔 수 없으니 개의치 말자, 주님 앞에서 용서를 구하면 된다’와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운 자로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중요한 요구가 있으십니다. 주 안에서 살라는 요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처럼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거듭나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주 앞에서 예수님처럼 살기를 작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이 목표를 잃으면, 우리는 죄를 짓고 회개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가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삶을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반드시 이루려 하는 목표를 놓지 않고 살게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소망을 품을 때 자신의 연약함에 절망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나 같은 사람도 용서해주셨는데, 왜 나는 분노 가운데서 살아가는지 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넷째로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철저히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에 대해 잘 몰랐던 구약 시대 사람들은, 형제에 대한 분노를 느껴도 처리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은 도우미입니다.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보혜사는 무엇입니까? 보혜사는 내 곁에서 내 연약한 것을 돕도록 보내심을 받은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까닭은, 내 속의 연약한 점을 도와주시기 위해서입니다.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 즉 내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던 일을 하게 하시고, 과거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지만,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안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별 수 없다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항상 우리에게 예라고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작은 예수로 살 수 있다고,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향하여 분노를 가질지라도 그 분노가 쌓이지 않도록,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이 있으므로 성령에 의지해야만 이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의지하여 매일 기도하면, 매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며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까지 용서하게 됩니다. 보기만 해도 화가 나는 일에 대해서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럴 때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분노를 잘 관리해서 죄에 이르지 않게 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분노가 창고에 쌓이게 되면 결국 폭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노로 말미암아, 내 인생과 천국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내 믿음이 깨지고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 속의 분노가 폭발하기 전에 분노의 창고를 청소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여 상처받은 마음이 회복되고 성령께서 주신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하게 임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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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