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제목] 비천한 자를 존귀한 자로 (삿11:1-11,29-40)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2년 10월 8일(토) 안식일 예배

인도라는 나라에는 ‘카스트 제도’라는 뿌리 깊은 신분 제도가 있다. 카스트 제도의 내용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을 네 계급으로 나누는데,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가 그것이다. 그런데 네 계급 외에 카스트 제도 안에도 못 들어가는 최하층민이 있다. 이 계층을 불가촉천민으로서 달리트라고 한다. 태생적으로 상호간의 신분 이동은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1950년에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인도인의 문화 속에 영향력은 여전하다. 이런 신분 제도의 기원은 흰두교의 원시종교였던 브라만교에서 기원했다. 힌두교가 인도의 지배종교로 지속되는 한 인도 사회에 신분 계급 관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카스트 제도 같은 태생적 신분 제도는 없지만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도입한 결과 자본이 계급이 되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유행어를 보면 시대의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는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등의 표현들이 자본으로 사람을 분류하려는 씁쓸한 우리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도 쓰면 안 된다. 세상의 가치와 관념에 휘둘리게 되면 우리는 속게 되기 때문이다. 천국의 가치와 기준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와 관념의 잣대로 나 자신을 평가하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남들도 그렇게 평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나는 오늘날 나의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복한 존재임을 발견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가치 기준에 휘둘려서 자신을 불행한 존재로 비하하고 있지 않는가?

오늘은 비천한 신분의 사람 입다가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길이 어디에 있었는지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사사시대 길르앗이란 사람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다. 그 낳은 아들의 이름은 입다였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집안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학대받았다. 결국 배다른 형제들로부터 쫓겨났고, 쫓겨나면서 재산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떨려 났다. 혈혈단신 돕이란 땅에 거하게 되었는데 어느덧 이곳저곳을 떠돌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부랑민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렇게 태생부터 비천한 처지였던 입다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암몬 족속을 보내 괴로움 당하게 하셨고 그것은 전쟁까지 이르게 되었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오는 위기상황에서 길르앗 장로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쫓아낸 입다를 찾아가게 된다. 입다에게 전쟁을 수행할 장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입다는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 신분까지 약속받고 그 제안을 수락하게 되고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입다에 대한 이 이야기는 세상 속에서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진 비천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면 존귀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도대체 입다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비천함에서 존귀함에 이를 수 있었을까?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첫째, 신앙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명약이다.

(삿 11:1-2) 『[1]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2]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사람은 자기가 노력해서 개선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개선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스스로 개선할 수 없는 영역 가운데 태생이란 것이 있다. 태생은 자기 선택이나 노력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입다는 태생이 비천했다. 그런데 그의 고통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배다른 형들로부터 쫓겨났고 자기 몫의 재산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사람이 건실한 인격체로 성장하려면 어렸을 때 가정에서부터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 그런데 입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서자라는 낙인과 더불어 가정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쫓겨나는 상처와 아픔을 경험했다. 본문을 보면 입다의 추방은 한 가정에서가 아니라 한 가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입다에 대해서 성경은 ‘서자’라고 먼저 언급하지 않고 본문 1절 말씀처럼 ‘큰 용사’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큰 용사’란 ‘전쟁의 명수’ ‘싸움의 용사’ 즉 전쟁에 익숙한 자를 의미한다. 아마도 그에게는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은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은사 외에 그의 마음 속에 존귀하게 될 수 있는 다른 요소가 들어 있었다.

(삿 11: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한 말에서 우리는 입다의 마음 속에 여호와 신앙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내가 그들과 싸워 이기면’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면’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은 전쟁의 승패가 내 능력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또 다른 곳에서 여호와 신앙이 발견된다.

(삿 11:11)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했다. 이는 입다가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한다는 믿음, 여호와 앞에 자기의 말을 다 고하는 사람, 그런 신앙이 있던 사람이 바로 입다였다. 이것이 입다가 비천한 신분에서 존귀한 자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비천한 처지였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존귀한 자가 되는 예를 많이 발견한다. 그 가운데 역대상에 야베스라는 인물이 있다.

(대상 4:9)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역대상의 이 ‘야베스’란 이름은 ‘고통’이란 뜻이다. 그 어머니가 고통 중에 낳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태생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거나 산모가 순탄하지 않은 탄생의 비화를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야베스는 성장 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지경을 넓혀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입다에게도 야베스와 같은 아픔과 고통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입다의 발목을 잡아 그의 인생을 넘어뜨리지 못했다. 그는 돕 땅에서 여러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여호와 신앙이다. 신앙에는 이처럼 상처를 극복케 하는 능력이 있다. 신앙을 가진 자는 세상이 자신을 쓰레기 취급해도 ‘너는 내 형상을 닮은 존귀한 자야!’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서자’라고 손가락질해도 ‘너는 세례를 통해 하늘에서 태어난 내 아들이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깊은 상처와 쓰라린 아픔으로 얼룩진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치료되고 회복될 수 있고 존귀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람의 영혼을 고치는 명약이다. 과거에 어떤 상처와 아픔이 있더라도 입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로지 하나님만 섬기는 믿음으로 치유받고 존귀하게 되시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길 바란다.

(시 16: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둘째, 신앙에는 원수와 화목하게 되는 복이 있다.

(삿 11: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입다가 길르앗 백성의 머리와 장관이 된 과정을 주목하자! 기드온처럼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부르고 사사로 세운 것이 아니다. 삼손처럼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의 길르앗 족속 장로들이 직접 그에게 나아가 ‘장관’이 되어 달라. ‘머리’가 되어 달라는 부탁으로 사사로 발탁된다. 여기에 숨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입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천대하고 내쫓은 자들이 찾아와서 우두머리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입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처럼 나를 힘들게 하고 모욕했던 사람에게 사과받고 화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입다가 그동안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고 그분을 의뢰하는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일종의 상급이었던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믿음의 조상 삼인이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다. 그런데 이 세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인생의 황혼기에 원수와 화목케 되는 일을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나를 괴롭히던 자들이 나를 찾아와 화친의 악수를 청했던 것이다.

(창 21:22)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창 26:26-27)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창 33:10)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이처럼 성도님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원수 관계의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미움을 거둘 수 없게 깨져버린 관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올바른 신앙의 길에 가다보면 미래의 언젠가 그가 찾아와 악수하고 화목케 되는 날이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 삼인에게도, 그리고 오늘 본문의 입다에게 임했던 화평의 복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저와 성도님들의 것이 되기를 기원한다.

(잠 16: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셋째, 신앙에는 좋은 성품을 가지는 복이 있다.

(삿 11:27-28) 『[27]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나 [28]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사람은 상처와 아픔을 경험하면 난폭하고 모난 성격이 되기 쉽다. 남을 원망하거나, 환경을 원망하거나, 부모나 태생을 원망하는 자가 될 수도 있다. 자기를 잃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좋은 은사를 받은 사람도 방탕으로 치달아 인생을 망친다. 태생이나 자란 환경으로 볼 때 입다는 그럴 위험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암몬과 전쟁하기 전에 사신을 보내 담판을 짓는 장면을 보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 좋은 성품의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암몬 족속과 즉시 전쟁을 수행하지 않았다. 먼저 협상을 통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이처럼 입다는 전쟁보다 협상을 원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신앙을 가졌기에 이런 성품의 사람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화평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호와 신앙의 길을 간 입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상급이 있었다. 그 상급이란 하나님 닮은 아름다운 성품이다.

(잠 4: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오늘날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입다와 같은 깊은 상처와 쓰라린 아픔의 과거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신가? 그렇다면 실망하지 말라. 사람도 환경도 원망하지도 말고 하나님의 섭리로 주어진 것임을 믿자. 결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길에 정진하면 비천한 나도 존귀한 자가 되게 하실 것이다. 좋은 성품을 가지고 존귀한 인생을 살게 하실 것이다. 부디 상처와 아픔으로 뒤범벅된 인생의 전쟁터에서 믿음으로 치유받고 승리하시는 입다와 같은 믿음의 ‘큰 용사’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한다.

글작성 : 김세한 목자님

글편집 : 박은우 형제

https://youtu.be/7LdzDnn3Ez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