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제목]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마5:13-16)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5년 2월 1일
2020년은 인류사에서 잊지 못할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이로 인해 수많은 확진자와 사망자를 낳았다. 그로 인해 팬데믹이라는 생소한 용어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상황인지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비록 해제된 지 2년이 지났지만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사건은 오늘 날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세계의 학자들은 21세기를 코로나 이전 시대와 코로나 이후 시대로 양분한다. 이 사건이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 결과의 원인이 매우 놀랍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매우 단순한 구조의 바이러스 때문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팬데믹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익이 있다. 첫째는 미래를 예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또 순식간에 멸망에 이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우리는 경성해야 한다. 둘째 유익은 우리 교회의 가치와 영향력에 대한 낙관이다. 작은 바이러스가 이렇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군소 교단인 우리 교회도 상상할 수 없었던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미래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현재 다수냐 소수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미래에는 소수가 다수도 될 수 있고 다수가 소수로 전락할 수 있다. 설사 소수의 규모에 머문다 할지라도 그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규모 때문에 위축될 필요가 없다. 또 이런 말씀도 있기 때문이다.
(눅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산상보훈 가운데 팔복 설교를 살펴보았다. ‘복이 있나니’라는 주님의 선언의 내용이 여덟 개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팔복이라고 했다. 이 여덟 개의 주제는 천국 백성의 속성에 대해 말한다. “천국 백성은 이러한 성품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품을 가진 자에게 이런 복이 있습니다.”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거기에 이어서 오늘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 이러한 성품의 천국 백성은 결국 “세상에 이런 영향력을 미칩니다.” “천국 백성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실 때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시고 있다. 바로 소금과 빛이다.
먼저 발견되는 점은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라고 표현되지 않고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세상의’라는 수식이 붙는 것은 성도란 세상을 등지고 산 속에 들어가 은둔하면서 살면 안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타인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환경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고전 5: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그러면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 그런 존재가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뜻인가? 그 교훈을 얻기 위해 우리는 소금과 빛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소금과 빛의 공통점을 주목하면 그 의미와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 가늠할 수 있다. 둘의 공통점은 이렇다.
첫째, 소금과 빛은 부패와 오염을 방지한다.
(엡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소금은 살균력이 있어서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그래서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음식물 오래 보관하는 방법은 바로 소금에 절여 놓는 것이다. 안동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 중에 간고등어가 있다. 바닷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경북 안동 지방 사람들이 생선을 먹으려면 운송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부패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상하지 않게 하려고 고등어를 소금으로 절였던 것이다. 그래서 안동에서 간고등어가 명물이 되었다.
애굽에서는 죽은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 때 소금물에 넣어두었었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가 하면 집안 살림 용품 중에 찌든 때를 제거하고 소독 청소하는 ‘락스’라는 제품이 있다. 이 ‘락스’는 화학상의 원료가 바로 소금이다. 이처럼 소금에는 부패와 오염을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빛도 마찬가지로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지하실 같은 어두운 장소에는 세균이 득실거린다. 그러나 그곳에 햇볕이 내리쬐거나 그곳의 물건들을 햇볕에 내놓으면 태양광 자외선에 의해서 깨끗이 살균된다.
병원에서는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일에 사용하는 장비가 있다. 방사선을 사용하는 장비이다. 이런 장비는 빛을 고 에너지로 농축시킨다. 그래서 암환자의 환부에 쪼이면 암세포가 사멸하게 된다. 이처럼 빛에는 병을 치료하는 기능이 있다.
그런가하면 어두운 밤거리를 비추는 방범등이 있다. 방범등은 청색이 많은데 이는 흰색등보다 더 멀리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색등을 방범용으로 활용하면 범죄율이 감소한다는 설이 있다.
이처럼 빛과 소금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부패와 오염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성도를 일컬어 “너희가 바로 그런 존재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소금이 그런 속성을 가지도록 만드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빛 안에 그런 속성을 넣어두신 것처럼 천국 백성 안에 그런 성향을 가지게 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적극적으로 행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지키라는 뜻이다. 그 정체성에 충실하면 세상 속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골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세상의 인간관계 속에서 들려오는 말에는 냄새나 향기가 있다. 비방의 말, 원망의 말, 남을 깍아내리는 말, 자기 신분에 걸맞지 않은 말은 마치 부패하는 음식 냄새와 같다. 역겨워서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반면 칭찬의 말, 감사의 말, 은혜를 끼치는 말, 자기 신분에 합당한 말은 방향제를 뿌린 것처럼 향기롭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 곁에는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다.
이처럼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신분에 맞는 언어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무리 속에 경건한 성도가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긴장한다. 그래서 함부로 상스런 말도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 부디 썩어져 가는 세상에서 가장 먼저 은혜로운 언어를 통해 부패를 막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란다.
둘째, 소량이지만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바다에서 염분의 양은 3.4%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비율의 염분 때문에 바다물은 썩지 않는다. 염분은 바다를 썩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인체에도 필수적인 광물이다. 염분은 사람의 혈관 벽에 붙어있는 이물질을 제거하고 혈관이 딱딱해지는 것을 방지한다. 또 장내 소화액 분비를 촉진시키고 장의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서 장내 음식물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한다. 이처럼 아주 작은 양이지만 소금이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다.
빛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밤중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들은 항구를 찾아오기 위해서 수많은 조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몇 십 개 몇 백 개의 등대가 필요하지 않다. 불이 켜진 한 개의 등대만 있어도 배들이 악천후에도 안전하게 항구로 되돌아오기에 충분하다.
가로등도 없는 시골길에서 행인이 보행하려면 어느 정도의 빛을 필요할까? 작은 손전등 하나만 있어도 밤길을 가기에는 충분하다. 그것으로 안전하게 보행할 수 있다.
작은 빛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소금이 아무리 그 분량이 적을지라도, 또 빛이 광도가 아무리 미미할지라도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서는 그 영향력은 충분하다. 주님은 바로 천국 백성인 성도를 그런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부디 그런 사실을 이해하고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자.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셋째, 자기 희생을 통해 유익을 준다.
팔레스틴의 소금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소금과는 많이 다르다. 당시 그 사람들은 바다에서 소금을 취한 것이 아니라 육지에서 소금을 취했다. 이것을 암염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돌과 소금이 섞여 있는 것이다. 사해 주변에는 암염이 많이 있다. 이 암염으로부터 소금을 체취하는 과정은 이렇다. 암염을 물에 넣으면 염분 성분은 녹고 돌 성분만 남는다. 그렇게 물로 녹여낸 염분을 다시 증발시키면 소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물로 염분을 녹이는 일을 반복하면 나중에는 염분이 다 빠지고 돌 성분만 남게 된다. 이렇게 염분이 다 빠졌으니 이제 소금을 얻을 수 없고 그런 암염은 길바닥에 내다버렸던 것이다. 그러면 그 맛잃은 암염이 오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혔던 것이다. 본문 말씀에 맛 잃은 소금이 발에 밟힌다는 뜻은 이런 배경아래 나온 표현이다. 이처럼 암염이 맛을 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물에 자기를 녹여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바로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이다.
빛도 유사한 특징이 있다. 예수님 공생애 시대에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는 단순했다. 오늘날처럼 채광이 잘되는 구조가 아니다. 출입문이 하나요 창문은 작았다. 그래서 대낮에도 실내는 매우 어두웠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주간에도 항상 등잔불을 켜고 생활해야만 했다. 따라서 전기도 없던 그 시절에 등잔은 모든 가정이 구비하는 필수품이었다. 그 등잔에 불을 밝히려면 기름이 필요했는데 그 기름의 원료는 바로 감람유, 올리브유였다. 올리브유는 정제해서 가장 먼저 추출되는 것을 엑스트라 버진이라고 해서 식료품으로 사용한다. 보통 네 차례정도 추출하는데 가장 나중에 추출되는 질이 낮은 올리브 오일을 등불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실내에 빛을 비추려면 등불을 밝혀야 했고 등불을 밝히려면 기름이 태워져야 했다. 즉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의 과정이 필요했다.
이렇듯 소금을 보아도 등잔불을 보아도 녹아지고 태워져야 한다. 녹아지고 태워지는 희생의 과정이 없으면 존재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 이처럼 성도가 천국 백성이라는 존재로서 의미가 있으려면, 자기 사명을 완수하려면 반드시 자기희생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런데 그 희생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첫째는 내가 세상 속에서 신앙인이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소위 커밍 아웃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다운 말과 행동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대화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참 성도의 모습이다. 만약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마치 염분이 다 빠진 암염과 같다. 그것은 마치 등잔불에 소쿠리를 덮어 놓은 것과 같다. 부디 자기 정체와 자기 신앙을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밝히고 드러내는 성도가 되자.
예)참예수교회의 초기의 발전에 자기희생의 목자님들이 있었다. 세무서 공무원의 안정적인 신분도 마다하고 나아가 순교도 불사하고 목회의 길을 나선 박필선 목자님 같은 분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분 한 분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하고 어려운 시대에 사회로 나가지 않고 한 달에 쌀 한 포대 정도의 노임만 받고 희생한 원로 목자님들이 있었다. 이렇게 자기를 내어주는 목자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참예수교회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희생의 전통은 끊어지지 않고 대물림 되었다. 어떤 목자님은 사회 속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위해서 목회의 길을 선택했다.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의 정신은 앞으로도 그 전통이 되어 이어질 것이다.
그런 현실을 볼 때 저는 비록 우리 교회가 소수지만 미래가 매우 밝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금과 빛의 역할이 살아있다는 뜻이고 그것이 살아있으면 우리 교회는 미래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결과를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도님들은 어떻게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모두 목회자가 되어야할까? 박필선 목자님처럼 다른 원로 목자님들처럼 그렇게 목회자의 길을 가라는 것인가? 순교라도 하라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도님들은 최전선에서 세상과 접촉하며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소속한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 소금과 빛의 사명을 완수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기독교인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그 자기 정체에 일치하는 삶을 살자. 세상으로부터 저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찬을 듣자. 여기까지 가면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세상의 사람들은 소유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지 않았다. 세상을 위해 내어주기 위해서 왔다. 주님이 먼저 십자가에서 그 모범을 보여주셨다. 부디 주님이 남기신 모범대로 빛과 소금의 본분을 다하는 성도가 되자. 나를 통해 세상이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그 사명을 감당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천국의 기업을 상속하시는 저와 성도가 다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