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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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콘텐츠 공모전

 

참가대상 – 수세 신도 개인 및 신도의 그룹
공모부분 – 동영상 ( 교회와 신앙에 고한련된주제 플래쉬/스톱모션/동영상 혹은 스냅샷을 이용한 15분 이내의 영상물 )
                    MP3음원 ( 기성곡 및 창작곡의 성악,합창,중창,기악 등 )
응모기간 – 2019년 9월30일 까지
접수방법 – www.tjcor.kr/온라인공모전 에 접속하여 업로드
시상내역 – 대상 50만원상당 금상 20만원 상당 은상10만원 상당
심사발표 – 2019.10.31 이후 홈페이지에 게시 예정

 

제8항 안식일에 대한 우리의 믿음

제8항 안식일에 대한 우리의 믿음

 

안식일(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은 하나님께서 복주신 거룩한 날임을 믿는다. 단, 이 날을 은혜아래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기념하고 내세의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지킨다.

안식일은 천지 창조의 시기부터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은 육일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을 안식일로 지정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안식일을 주셔서 안식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도 안식하셨습니다. 이 안식일은 현재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이며 초대교회가 지켰던 본래의 기독교 성일입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하셨을까요? 또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는 무엇이며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기념일입니다.

사람들이 유명한 인물, 역사적 사건을 기리는 마음으로 기념비를 세우곤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기념으로 일곱 째 날을 구별하셔서 안식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이날에 안식하셨습니다.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니이 천지창조 직후 안식일을 정하신 일은 곧 하나님이 천지 만물의 창조주라는 선포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조물주 하나님이 지키신 것처럼 자신도 그 날에 안식하면 이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천지창조 때부터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안식일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2,500년 동안 잊혀졌다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나올 때부터 다시 역사 속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으로 지정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으며 생활하는 동안 안식일 지키도록 훈련하셨습니다. 그 훈련하시는 방법은 곧 만나를 육일 동안만 내려주시고 제 칠일에는 내려주시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날에는 하루만 지나도 만나가 부패했는데 제 육일에는 이틀치 분량을 거두어도 만나는 부패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상이 40년 간 반복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 칠일에 안식하는 것이 습관화되었을 것입니다.

(16: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16:26-27) [26]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칠일은 안식일인즉 그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 제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이렇게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광야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도록 훈련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안식일 지키는 일을 소홀히 여기게 됩니다. 세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 후손들은 여호와 신앙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들었고 안식일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왕국시대에 이르러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차례로 멸망시키십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혼혈정책과 이주정책에 의해 완전히 그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고 남 유다 백성은 바벨론에 끌려가 70년 동안 포로로 생활하게 됩니다. 남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멸망에 대해서 경고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17:27)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20:16)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좇아 나의 규례를 업신여기며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하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음이니라

 

(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바벨론에 70년 간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조상들의 과오를 살피고 반성하게 되는데 그들의 멸망 원인이 바로 안식일을 소홀히 여겼던 점에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포로 귀환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 느헤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의 지도 아래 다시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13:18) 너희 열조가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이 모든 재앙으로 우리와 이 성읍에 내리신 것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오히려 안식일을 범하여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함이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하고

 

그렇게 포로귀환 후 수백년 세월이 흐르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무렵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른 문제점을 나타냅니다. 안식일을 준수하되 그 본연의 목적과 취지에서는 멀어지고 인간을 속박하는 과격한 금지 조항들이 만들어집니다. 그 조항들이 바로 안식일 39개조 금법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장로들의 유전(전통)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금법의 조항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려는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하나님이 인간에게 안식일을 주신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과도하게 속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셔서 안식일의 본질에 대해서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2: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13:15)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2:1-2)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유대인 종교지도자들과 안식일 준수 문제로 많이 충돌하고 변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결코 안식일 자체를 부정하거나 폐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율법적 안식일 준수 방법’에 대해서 부정하신 것입니다. 한국의 일반 개신교회에서는 안식일을 율법 시대에 속한 성일이므로 폐해졌다고 여기는 것이 보편적인 견해이고 신약 시대에는 일요일(주일이라고 표현함)을 개혁된 성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시간적으로 살펴볼 때 율법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천지창조 때부터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천지 창조 때부터 세워진 안식일이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존속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예수님이 종말론에 대하여 교훈하실 때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돌이켜 보면 안식일은 ‘말세의 때’까지 존재한다는 뜻이며 그 때까지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2)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에는 집안의 종이나 가축 심지어 나그네까지 포함됩니다. 안식일 준수의 범위가 사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포함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피조물의 입장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온 천지만물의 주인이라는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창조 질서에 부합하는 일입니다. 역대하 성경에는 심지어 토지가 안식년을 누림 같이 70년간 그 토지가 황무했다고 기록한 곳도 있습니다.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3)사람의 육신과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몸은 너무 많은 일을 할 수도 없고 너무 오래 일할 수도 없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일하면 면역력도 떨어지고 질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사람은 육신으로 노동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정신적으로도 노동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기쁘고 즐겁고 유쾌한 순간도 있지만 그보다는 근심하고 염려하고 불안하고 불만족한 순간들이 더 많습니다. 사람은 삶 속에서 책임감, 좌절감, 절망감 등을 느낄 상황을 만나면 많은 피로를 느낍니다. 몸의 휴식이 필요하듯 마음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영혼과 육체가 쉴 수 있는 은혜의 창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세상에 속한 육신의 일을 잊고 몸과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20:10)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23:12)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4)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후 5:17)에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안식일을 준수하도록 명령하신 일이 두 차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천지창조 때 아담에게 명령하셨고, 출애굽 사건 때 선민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선민 이스라엘도 더 이상 바로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새 신분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새 생명, 새 신분의 선물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처럼 신약 시대의 구원받은 성도가 새 피조물이라면 마치 새롭게 창조된 아담처럼, 새 신분을 얻은 출애굽 백성들처럼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새 피조물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과거 천지창조의 시대에 아담과 하와에게 요구하신 것과 같고, 출애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과 같습니다. 먼저 창조의 은혜를 주시고 나중에 안식일 준수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아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는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5)하나님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게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범죄한 인간은 부정한 존재입니다. 구원이란 부정한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거룩이라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몸이 쉼을 통해 부정한 것이 정화되고 회복되고 마음도 쉼을 통해 세속적인 욕망, 근심, 감정이 정화되고 새롭게 됩니다.

(20:12)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6)영원한 내세의 안식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천국을 시간적으로 표현하자면 바로 영원한 안식입니다. 성도가 지상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바로 천국에서 누리게 되는 영원한 안식과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땅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는 하늘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땅에서 온전한 안식을 누리는 자만이 장차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땅의 성도는 안식일에 예배를 통해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선행에 참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장차 우리가 하늘에서 영원히 누릴 안식의 연습이요, 훈련입니다.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은혜의 안식일을 이렇게 지킵니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까요? 느헤미야 시대 이후 유대인들은 안식일 준수에 대한 과격한 적용을 통해서 안식일 39개조 금법이 형성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엄격한 금지 조항은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목적과 취지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안식일의 노예가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안식일 준수에 대한 큰 전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참예수교회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유대인들이 지켰던 ‘율법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비와 사랑의 정신 아래,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씀에 따라 ‘은혜의 안식일’을 지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성일로 지키는 타 교단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본회의 안식일 준수의 모습은 미흡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성일로 주장하면서 정작 잘 지키지 않는 교회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안식일’이 아닌 ‘은혜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자기의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셔서 예배에 참예하셨고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쳐주셨고 선행에 힘쓰셨습니다. 본 교회는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보여주셨던 모습대로 은혜 아래서의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시까지 현대 이스라엘인들을 지키는 것과 동일한 시간대에 안식일을 지킵니다. 세속적인 오락과 노동을 삼가고 가족들과 함께 예배에 참예합니다. 또 성도들은 교회의 여러 가지 일을 분담하여 봉사합니다. 또 안식일에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는 연약한 신도들을 방문하고 교제합니다.

(58:13-14) [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56:2)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제5항 성령에 대한 우리의 믿음

제5항 성령에 대한 우리의 믿음

성령을 받는 것은 천국의 기업을 얻는 보증이며 방언(영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증거가 됨을 믿는다.

성령이란 ‘거룩하신 영’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존재했습니다. 천지 창조 때 하나님의 신(영靈)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고 사사 삼손의 몸에 임하셔서 괴력을 발휘하게도 하시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적을 행하는데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성령이 역사하시던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예레미야, 에스겔, 요엘 등의 여러 선지자를 통해서 장차 말세에 나의 신(영)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신약 시대에 오순절이라는 유대인의 절기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영혼 안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이미 성령이 존재했고 성령의 역사도 있었는데 왜 신약 시대에 와서 굳이 성령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그러면 오순절에 내린 그 성령은 구약 시대의 그것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는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까요? 이런 의문점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성령의 가치, 역할, 성령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함께 살펴봅시다.

구약 시대 선지자가 예언한 성령, 사람의 마음 속에 부어주시겠다는 그 성령은 유대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세 절기 중 하나인 오순절이라는 절기에 인류 역사 최초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2:1-2) [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오순절에 내린 성령은 구약 시대에도 존재한 성령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구별됩니다.

첫째, 이 성령은 구약 시대의 것과 구별되는 약속의 성령입니다.

성령이 이미 존재하셨던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은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이 특별한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이 성령에 대해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예언했고 예수님 자신도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성령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 세례요한, 그리고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 성령을 일컬어 ‘약속의 성령’이라고 표현합니다.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6: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둘째, 이 성령은 십자가 사건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오순절날 주어진 ‘약속의 성령’은 구약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은 존재하셨지만 ‘약속의 성령’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시대의 ‘성령’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여 어떤 기적을 일으키는 역사에 머물렀지만 신약 시대 오순절 이후 내린 ‘약속의 성령’은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서(혹은 부어져서)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맺게 만드는 성령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이 ‘약속의 성령’을 부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야 ‘약속의 성령’이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의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약속의 성령’도 인간에게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만약 구약 시대의 성령만으로 사람이 구원받기에 충분했다면 신약 시대에 ‘약속의 성령’이 주어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 구약의 선지자들도 이에 대해서 예언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신약 시대 성도의 구원을 위해 ‘약속의 성령’이 꼭 필요했고 주님은 그것을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오시리니

 

셋째, 이 성령은 거듭남의 한 요소인 성령세례입니다.

요한복음 3장을 살펴보면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인물에게 예수님은 거듭남(중생)의 중요함에 대해서 밝히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하는데 그 의미는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물은 ‘물세례’를 가리키고 성령이란 ‘성령세례’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인 반면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일이라고 대조시켜 말했습니다. 따라서 잠시 뒤에 이어지는 니고데모와의 대화 본문에서 물과 성령의 의미는 곧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오순절에 내린 ‘약속의 성령’ 즉 ‘성령세례’는 매우 중요한 구원의 요소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받아야 천국,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신앙인이 ‘성령세례’ 또는 ‘약속의 성령’을 받는 것은 어떤 가치가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1)성령을 받는 것은 천국 기업을 상속하는 증거가 됩니다.

성경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재산 상속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도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가치의 유산을 영원히 상속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 약속을 확실히 지키겠다는 뜻으로 인(印 도장)을 찍어 보증해 주셨습니다. 그 인을 찍어 보증하신 일이 바로 ‘약속의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이 일에 대해 ‘성령으로 인쳤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했고 계시록 7장에는 한 천사가 해돋는 데서부터 올라와서 인을 가지고 선민의 이마에 인치려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성령세례를 통해 하나님이 성도에게 구원을 보증하신 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13-14)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고후 5: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신실(믿을만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주셨다면 그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분이 내게 어떤 약속을 주셨다면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때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원인은 성품이 거짓된 사람이기 때문이거나 혹은 지킬 능력이 없거나 할 처지에 있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과 동시에 전능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성품적으로나 능력면으로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실 수 있고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침을 통해 구원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6:17-18)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2)성령은 성도의 신앙생활의  보혜사가 되십니다.

성령은 천국 기업의 보증으로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천국을 소망하며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성도에게 여러 가지 실제적인 도움을 주시기 위해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비록 성도는 천국의 약속은 받은 존재지만 이 땅에서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있는 것처럼 거듭난 성도에게도 역시 고난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불신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을 통해‘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었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부모는 타인의 자녀가 아니라 내 자녀에게 온갖 관심을 쏟고 필요를 공급하며 보살피듯이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한 보살핌을 받습니다. 그래서 비록 이 땅에서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우리 안에 성령께서 위로하시고 상담해주시며 감당하는 능력과 은혜를 주십니다. 이러한 성령을 일컬어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보혜사란 상담자, 조력자라는 뜻입니다.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물세례와 성령세례(성령의 내주)로 거듭난 성도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죄의 유혹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육체의 소욕에 이끌리지 않고 성령의 소욕에 이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단이 주는 생각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생각에 순종해서 선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의지와 결단을 동원해서 성령께서 주시는 선한 소욕에 순종하면 됩니다. 성령께서는 혹시 죄를 범했을 때 그 죄를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의지해서 그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때 우리 죄를 소멸시키시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성령의 풍성한 열매들을 맺게 하십니다.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 세례 즉 약속의 성령은 성도 개인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이 이룬 공동체, 즉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성령이 이끌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부어주십니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은사는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고침의 은사, 능력의 은사, 예언의 은사, 각종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은사를 내려주시는 목적은 성도 개인이 자랑하고, 자기 만족하게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4:11-12)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고전 12: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3)방언이 성령을 받은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내주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승천 직후 오순절 절기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성령이 내리실 때처럼 방언(또는 영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방언을 성령 받은 증거로 삼아야 할까요?

 

첫째, 믿는 것이 곧 성령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믿으면 곧 성령 받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내용들을 살펴 볼 때 믿는다고 곧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성령의 내주는 별개의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9장 2절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만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 질문을 받은 제자들은 대답하기를 아직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 후 안수하자 성령을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19:6-7)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둘째, 세례를 받은 것이 곧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에서 빌립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다시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서 성령받기 위해 안수 기도했습니다. 만약 예수를 믿었거나 세례를 받은 것으로 충분했다면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성령을 구하며 안수한 것은 너무도 이상한 행동이 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마리아의 제자들이 세례 받은 것으로 불충분하고 성령을 받게 하기 위해서 안수받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본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8: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셋째, 선행을 한다고 성령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이 그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실 만큼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령은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시고 그를 지시하셔서 베드로를 만난 후에야 비로소 그 가족들이 성령세례와 물세례를 받게 됩니다. 고넬료가 그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기억되는 신앙으로 구원받기에 충분했다면 굳이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 지시하시고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셔서 두 사람이 만나도록 주선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넬료 가정 방문한 일의 결말은 그 가정이 성령세례를 받고 이어서 물세례까지 받은 것으로 일단락되고 있습니다.

(10: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 가정의 전도는 오순절 사건 이후 대략 10년 정도 세월이 흐른 뒤에 나타난 사건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는 오순절 제자들에게만 임한 대표적 사건이거나 일시적 사건도 아닙니다. 나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여러 장로들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베드로는 고넬료 가정에 내린 성령세례가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라고 증거했습니다. 고넬료 가정도 오순절 제자들이 체험한 것과 똑같은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오순절과 똑같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사도 시대와 같은 현상은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넷째,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다고 성령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언젠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은 성령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고전 12:3). 그러나 베드로가 그 때 약속의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 절기에야 비로소 성령을 받았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성령 세례’로서의 성령이며 구원의 보증이 되는‘약속의 성령’입니다. 오순절 이전에 구약 시대부터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역사는 존재하듯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것은 감동의 역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것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다면 오순절에 다시 ‘성령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오순절과 같은 동일한 체험으로 받는 것입니다.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4)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을 때는 방언을 말했습니다.

위와 같은 내용을 살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물세례나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불완전한 단계의 신앙인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그런 신앙인들에 대해서 세례와 성령을 받게 한 사도들의 노력을 보면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선행하는 믿음으로 구원이 충분히 보장된다면 사도들은 굳이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베풀려고 사람을 만나고 안수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는 것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신약 성경에서 유일한 역사서로 분류되는 사도행전에만 성령 받는 순간 나타나는 구체적 현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오순절 날의 사도들의 체험에서(행 2:1-4), 둘째, 고넬료 가정에서의 체험에서(행 10:44-48), 셋째, 에베소 교인들의 체험에서(행 19:1-5) 그 현상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성령세례의 공통적 현상은 방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2:3-4)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10:45-46)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19:5-7)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빌립이 사마리아 선교한 사도행전 8장의 기사에는 성령이 내려오실 때 방언을 말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그 정황상 방언을 말했을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때로는 생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들은 사마리아를 선교할 때 백성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안수했습니다. 그런데 마술사 시몬이 사도들에게 돈을 드려 자신도 그런 능력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 물세례만 받고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신도들에게 마술사란 직업인이 탐낼만한 어떤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추론하게 합니다.

(8:18-20)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위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보아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임했던 성령 강림은 구약의 성령의 역사와는 뚜렷이 구별됩니다. 그리고 성령세례의 구체적인 증거는 방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을 때 방언을 말하는 현상은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 사도교회를 계승하는 본 교회 안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제1항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 승천하신 것을 믿으며 그분은 인류의 유일하신 구주시며 천지의 주재시고 홀로 하나이신 참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초월해서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의 감각으로 그분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자신 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피조물(조물주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로 만드셨습니다.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졌고 그로 인해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이는 다른 피조물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뿐만 아니라 만물에 대한 관리까지 맡기시고 에덴동산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금지하신 한 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명령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 자신이 창조주요,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이 땅에서 땀흘리며 수고하며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망의 굴레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해서 왜 사망에 이르는 무거운 징벌을 내리셨을까요? 이 일을 통해 아담과 하와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도록 맡기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마귀의 말을 더 신뢰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게다가 마귀가 스스로 교만해져서 하나님처럼 높아진 것처럼 아담과 하와도 피조물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은 결과로 빚어진 일입니다(참조. 사 14:12 롬5:12-14). 이처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결과로 주어진 결과는 인간이 사망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영향이 끼쳐졌습니다. 그 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피조물 사이에 분열과 파괴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조화와 질서 가운데 창조된 아름다운 만물은 모두 인간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 결과 만물에도 부조화와 무질서가 찾아왔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파괴되고 최후에는 결국 멸망이 예정된 것입니다. 만물 가운데 가장 존귀한 피조물로 만들어진 인간은 결국 죽음 이후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비록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사랑하셔서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일찍이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을 대신하여 죄의 대가를 치르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천 년 전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이셨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일 1:14)

이처럼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을 ‘성육신’(Incarnation 하나님이 태어났다는 표현은 부적절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표현합니다. 구약 성경은 이 성육신 에 대해서 무려 40여 차례나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차례 예언했다는 사실을 보면 성육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성육신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그가 구원받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가끔 호의를 베푸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을 위해서, 더욱이 내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고 희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귀에게 순종하여 반역의 길을 간 인간에게 최고의 호의를 베푸셨습니다. 그 호의란 사망의 그늘에 놓인 인간의 상황을 해결하시고자 ‘조물주’이신 그분이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기꺼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일은 인간이 비록 범죄했지만 여전히 그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둘째,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3:23) 모든 사람이 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사건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만약 인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자기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고 반드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으면 그 사람은 스스로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혹 아무리 수영을 잘한다고 해도 급류의 상황에서 헤엄쳐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외부로부터 구조대원이 구조 장비를 통해 도움을 주어야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어떤 노동자가 밖에서만 문을 열 수 있고 안에서는 문이 열리지 않는 냉동 창고에 갇혔다고 합시다. 냉동 창고 안에 들어갔다가 실수로 문이 닫히면 반드시 밖에서 열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망의 그늘에 놓인 인간이 그 굴레에서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성육신은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셋째, 하나님이 자기를 부인하는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일은 그분의 겸손과 사랑을 증거합니다. 2005년 일본의 아키히토(明仁) 일본왕의 장녀 노리노미야 공주는 평범한 공무원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본 왕족이 평민과 결혼하게 되면 왕족이라는 자기 신분을 잃고 평민이 되어야 하는 규율이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하게 되면 과거 왕실에서 누렸던 모든 혜택도 상실하는 상황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랑하는 한 남자 때문에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때로 자신의 특권을 기꺼이 내려놓게 만듭니다. 그리고 낮아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의 몸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높고 높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아지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인간을 사랑하시되 조건없이 베풀어주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1)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출애굽 시대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율법을 다 준수하겠노라고 굳게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때로는 율법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율법만 주시지 않고 혹 범죄할 경우 죄책을 면하도록 소, 양, 염소, 비둘기, 곡식가루를 제물로 삼아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성막의 제도까지 주셨습니다. 만약 어떤 자가 율법을 범하게 되면 흠이 없는 가축을 성막으로 끌고 와서 그 가축에게 안수하고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불살라 드리고 피를 제단 주변에 뿌리는 제사 의식을 행해야했습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범죄한 자는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고 사망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함이 없느니라

 

구약 시대 유대인들의 동물 제사 제도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의 그림자입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천년 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십자가 사건은 한 유대인 청년의 억울한 죽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바로 모든 인류의 죄값을 대신 치르신 일종의 제사였다고 말합니다. 또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셔서 인간이 처한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9:13-14) [13] 염소와 황소의 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벧전 1:18-19)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로 한 것이니라

 

(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언약의 피니라

 

2)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언대로 죽으실 뿐만 아니라 예언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구약 성경도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요나’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도망가다가 하나님의 섭리로 물고기 뱃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 후 그가 뉘우치고 회개하자 사흘 만에 물고기가 그를 토해내서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구약 시대의 이 사건을 인용하시면서 곧 자신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에 대한 예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시편 16편은 다윗이란 인물이 지은 노래입니다. 그 노래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10절에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내 영혼’이란 겉으로 보면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행 2:29-31)는 다윗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다윗은 이미 죽어서 그 무덤이 자신들의 곁에 있으니 다윗에게 적용될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2: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처럼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뿐만 아니라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많은 모순점들이 발생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다는 뜻이고, 우리의 부활이 없다면 신앙생활의 목적도 사라집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하는 복음도 거짓말이라는 뜻이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면 모든 것들을 부정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긍정하면 모든 것들을 긍정하게 됩니다.

(고전 15:17-19)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 병나음, 마음의 평안, 출세, 권세와 같은 모든 것들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표는 그런 것을 얻고 누리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에 힘쓰는 궁극적인 목적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최고의 복락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성도도 부활할 미래가 있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부활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때 나타날 현상과 부활의 과정에 대해서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세히 밝히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도 살리시리라

 

(살전 4:16-17)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3)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줄 수 있으려면 첫째,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고 둘째, 전 인류를 구원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이 있더라고 능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고 부활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능력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인류사에서 어떤 종교의 교주나 훌륭한 성현도 죽음을 경험했거나 죽음에서 부활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더욱이 그 죽음이 인류를 위한 것이고 부활이 또한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믿는 예수님만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증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은 기독교를 일컬어 독선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다른 길은 없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유일성에 대한 주장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은 언젠가 제자들에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 이 보다 독선적인 선언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은 다른 길은 모두 틀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배타성은 바로 이 선언에서 출발합니다. 이와 같은 유일성은 제자들도 분명히 깨닫고 고백한 내용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초대교회를 막 시작한 사도와 성도들은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이스라엘의 종교재판소) 앞에서 예수님의 유일성에 대해서 고백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은 큰 의문이 있습니다. ‘내가 만나보지도 않은 수천 년 전의 인물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왜 내가 죄인이 되어야하고 사망의 저주에 놓여야 하는가?’하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이 의문은 예수님을 믿으면 모두 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모든 문제를 예수 한 분으로 인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인류의 첫 번째 아담이 일으킨 문제를 인류의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책임지고 해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부당하게 처벌한 것도 아니고 아담의 불행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로 당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시려는 깊은 사랑과 관용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성경의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참예수교회는 왜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나요?

1)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세 위격,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계시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신관(神觀)에 관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표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신관과 충돌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니 (신6: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 (막12:29)

삼위일체 사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세 분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경은 아버지, 아들,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어떤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지 본질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유일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속사(救贖史) 안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의 형태로 구속의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시에 여러 모습으로 존재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구속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 아들, 성령의 형태로 계시다가 그 사역을 마치셨을 때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15:22-28)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2:35)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3:21)

 

즉,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말씀하고 있는 반면 삼위일체 사상은 하나님께서 항상 세 위격의 형태로 계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2)한 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19-20)

이 구절에서 “이름”은 헬라어 원어(원어 기호와 발음 추가)로 보면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한 분이심을 의미하고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세례를 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음을 보게 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행2:2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행10:48)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행19:5)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증거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일5:20)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이것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 즉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1:15) 성경에 그와 관련된 구절은 너무나 많아 일일이 기록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사9:6)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은들 그들 중에 누가 능히 이 일을 고하며 이전 일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로 증인을 세워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어 듣는 자들로 옳다 말하게 하라 (사43: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사43:10)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4:12)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요8:25-27)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4:9)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행22:14)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딤전3:16)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1:8)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계22:13)

3)삼위일체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요?

바로 니케아 공의회(주전325년)에 기원을 둡니다. 이 회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 본질이라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니케아 신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니케아 신조는 사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함께 오늘날 카톨릭의 주요 신조 중 하나입니다.) 삼위일체 사상은 바로 이 니케아 신조를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니케아 신조에 보면 “아버지는 창조주시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나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다,” 라는 부분이 나오게 되는데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로부터 나셨다는 이 부분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영원하다는 부분과 모순이 됩니다.

또한 삼위일체 사상을 가장 잘 정리한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26항을 보면 삼위가 함께 영원하며 동등하다고 되어 있는데 33항에서는 성자에 대해서 신성으로는 성부와 동등 되나 그의 인성으로는 성부보다 낮으신 분이라 말하는 모순된 이론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삼위일체는 모순된 신학 사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4)삼위일체는 인간의 사상에서 나온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마지막 항에는 이 신앙이 참되며, 이 신앙을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개신교에서는 이 부분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삼위일체는 성경적인 교리가 아닌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사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본회는 삼위일체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을 가집니다.

 

교회 이름이 왜 참예수교회인가요?

1) ‘참’은 참이신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번 ‘하나님은 참되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요3:33)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요7:28)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요8:26)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전1:9)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렘10:10)

그러므로 교회의 명칭에서 ‘참’자를 제일 먼저 놓은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며 또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도시대에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전1: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고전10:32), 이것은 또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고전11:3)’라는 성구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2) ‘
이라는 단어와 예수님과의 관계

‘참’이라는 글자가 예수의 앞에 있는 것은 ‘참된 예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도하실 때 자신을 ‘나는 진리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참 포도나무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15: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참 빛’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에 비춰 볼 때 예수에 대해서 ‘참’이라는 표현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시대에 이미 다른 예수를 전파한 일이 있어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후11:4) ‘참’을 예수 앞에 놓아서 ‘거짓 예수’와 구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3) ‘
이라는 단어와 교회와의 관계

‘참’이 앞에 있는 것은 또 ‘참된 교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시대에도 이미 ‘다른 예수’를 전파한 자가 있었고 말세인 이 시대에도 예언의 말씀대로 ‘거짓 그리스도’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마24:5)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24:23-26)가 끊임없이 나타나서 사람을 미혹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시대의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된 교회와 구별하기 위해서 ‘참된 교회’라는 명시가 필요합니다.


4) 참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

간단히 말해서 사도시대의 교회와 같은 복음을 전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 성령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기적이사가 따라야 합니다.

셋째, 전하는 진리가 성경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수많은 교회가 존재하지만 이 세 가지 조건을 구비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참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