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파자 모친 간증)

저는 올해 79세인 이파자입니다. 제 고향은 남원군 사매면 서도리에요.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고, 저는 무서운 할머니 밑에서 커서 밖에 잘 나가지 못하고 집안 일만 하며 자랐어요. 20세가 되었을 때 동네에 4명의 동갑내기가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같이 사는 고모였어요. 옛날에는 아이를 많이 낳다 보니 할머니가 낳은 딸이 저랑 동갑이었습니다.

하루는 제가 고모에게 “고모, 교회에 한 번 가볼까?” 했어요. “무슨 교회를 가!” “교회에 가면 좋다고 하니 한 번 가보자.” 하고 동갑내기 4명이 같이 갔습니다. 처음에 간 교회는 장로교회였어요. 찬송을 부르는데, “수정같이 맑고 맑은 유리바다를~”라는 찬송이 듣기에 너무 좋아서 제가 “한 번 더 부를 수 없어요?”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다시 불러주시더라고요. 그래서 그 찬송을 따라서 부르다가 그날 그 찬송을 다 외워버렸어요. 4명중 저만 찬송을 다 외웠습니다.

“수정같이 맑고 맑은 유리 바다를 하나님 보좌 앞에 있고 싶어라. 유리 바다 건너편에 믿는 성도들 이것 또한 유리같이 맑고 맑도다.”

교회가 끝나고 집에 왔는데, 작은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대문 밖까지 들렸어요. “이놈의 계집애들! 오기만 오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야지! 그래야 이것들이 교회를 안가지.” 하고 막대기를 문 앞에 놓고 말씀하셨어요. ‘몰래 갔는데, 어떻게 아셨지? 다리 부러뜨리면 아무데도 못가고 이걸 어떡하면 좋아.’ 하고 가만가만 들어갔더니, 막대기만 있고 작은 아버지가 안보였어요. ‘옳다 되었다.’ 하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서 자는 척 했습니다.

당시 저는 잠업(누에를 치는 일)시험장을 다녔어요. 우리 교회 권정자 자매 계시지요? 그분의 언니인 권정숙 언니가 같이 잠업시험장에 다녔는데, 저를 참 예뻐했어요. 하루는 “파자야, 너 교회 한 번 가볼래?” “네, 언니! 언니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봐야지요.” 그런데 언니가 다니는 곳은 참예수교회라는 곳이었는데, 그때는 그 교회 평이 안 좋았어요. ‘참예수교회는…날라리 교회라고 그러던데, 팔짝팔짝 뛰면 어쩌지?’ 걱정이 좀 되었어요. 그런데 교회에 갔더니 교회가 조용했어요. 그 언니를 따라서 기도를 하고 나서 많은 시간이 흘렀어요. 저는 교회라는 그 두 글자를 항상 가슴에 품고 ‘언젠가는 나도 이 길을 가야겠다.’ 하고 다짐했어요.

25세에 시집을 갔어요. 도시 축에 드는 마을을 떠나, 시골 골짜기 삼계로……. 시집을 가서 생활하던 중에 머리가 너무나 아팠습니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통증이었어요. 머리에 수건을 묶고, 그래도 안 되면 벽에 머리를 꽉 대고 있었는데, 머리가 안 아프면 이젠 배가 아프고, 배가 안 아프면 허리가 아팠어요. 아픈 것이 그치질 않아서 고통을 겪는 와중에도 가정 살림과 농삿일을 해나가고 있었어요.

그러던 차에 남편이 세심이라는 마을로 민방위를 받으러 다녔어요. 남편은 제가 아픈 것을 안타깝게 보고 마음이 아팠던가 봐요. 제 남편은 교회라는 두 글자의 뜻도 모르고 지내다가 아내를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는지, 저에게 “교회를 한 번 나가보면 머리가 안 아프고 몸이 건강해진다 하더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또 몇 년이 흘러 자식 다섯을 낳은 후에, 어느 날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교회에 나가자고 했더니, 어느 교회를 가려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참예수교회에 가자고 했더니 이웃집 아주머니는 장로교회를 가자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따라가려고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남동생이 찾아왔어요. 아침 시간에 잘 안 오는데 일찍 왔더라고요. 동생은 당시에 참예수교회를 다니고 있었어요. 현재 전주교회 이정천 형제가 제 남동생이에요.

“누나 어디 가려고?” “자꾸 아프니까 자형이 교회 나가 보라고 해서 지금 가려고 한다.” 그랬더니 동생이 무릎을 딱 치면서 “어쩐지 누나 집엘 오고 싶더라니……. 참예수교회를 나가야지요.” 했어요. 남동생의 권유로 그날 장로교회를 가지 않고, 일주일을 기다려서 토요일에 참예수교회를 가게 되었어요. 그렇게 제 남동생이 저를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제 남편도 참 고마워요. 살다보면 서로 맘이 안 맞을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두통에 시달릴 때마다 나에게 교회 나가 보라고 말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남편이 너무 고맙고 감사하고…….

옆집 아주머니와 참예수교회를 갔는데, 기도소리를 듣고 옆집 아줌마는 계속 키득키득 웃었고, 저도 웃음을 겨우 참고 있었는데, 그 아줌마는 웃음이 너무 나오니까 밖으로 나가버리더라고요. 저는 끝까지 설교 말씀을 듣고 앉아 있었어요. 삼계는 오전 예배만 드리고 오후에는 예배가 없었어요. 그 다음 주에는 이웃집 아주머니는 가지 않고 저 혼자만 갔어요. 동생도 볼 겸해서…… ‘남편이 교회를 그렇게나 권했는데, 내가 머리 아프다 죽으면 남편이 뭐가 되겠나.’ 하고 결심을 하고 다녔어요. 오전 예배를 마치고 집에 오면 왜 그렇게 할 일이 많은지, 농사짓고 누에 치고 담배 농사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교회를 가야겠다.’ 라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세 번째로 또 갔는데, 이번엔 남편하고 같이 갔어요. 기도할 때 안수 받을 사람 나오라고 해서 나갔습니다. 그날 저는 성령을 받았답니다. 진동이 오고 몸이 떨려서 움직인다는 것이 여기서 저기까지 갔어요. 그 때는 마룻바닥에 방석을 놓고 기도할 때였습니다. 그리고 어찌나 눈물이 많이 나오는지 주체할 수가 없었어요. 이 눈물이 기뻐서 나오는 건지, 슬퍼서 나오는 건지 몰라도 정말 펑펑 울었어요. 아! 살아나온 과정을 생각해볼 때 모든 뜻을 하나님 앞에 다 풀고 고백을 해야겠구나! 삼계교회가 떠나갈 정도로 그렇게 큰 소리로 기도하며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어요. 성령 받는 광경을 남편이 다 봤어요. 울고 싶은 대로 다 울었어요. 누군가 자제를 안 시켰으면 하루 종일 가겠더라고요. 어찌나 충만하게 성령을 받았던지……

종을 친 지는 오래 되었고, 기도하다 생각하니 너무 이렇게 해서는 문란하겠구나 해서 겨우 제가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더니,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기도 그만 하라고 해.” 그 소리가 귀에 들렸지만 아무 부끄러움이 없었어요. 일단 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전부 털어놓고 싶은 생각뿐이었고, 마음을 가다듬었는데 웬만한 사람은 부끄러울 텐데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어요. 그냥 담대하니 마음이 아주 편안하고 개운하고 부끄러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뒤로 지독히도 저를 괴롭혔던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성령을 받고 머리가 아프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아프면 눈이 떠지질 않고, 벽에 꽉 기대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는데, 성령을 받고 나서 오늘날까지도 그 때 느낀 그 두통은 전혀 없습니다. 가끔 신경 좀 쓰고 감기가 들면 머리가 조금 아프지만 그 때의 두통과는 완전 달라요. 믿음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하나님을 알고, 말씀의 뜻을 알고, 이제 교회 안다니고는 제가 도저히 두통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세상의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옛것은 다 버리고 하나님 말씀대로만 살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믿음의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은 저 혼자뿐이었는데, 아이 다섯을 키우면서 가방만 흔들거리고 교회만 간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럴 때마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어요.  ‘당신들은 그렇게 얘기하지만 나는 내 갈 길을 간다. 내 인생 남이 살아 주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매달리면 내 삶이 평탄한데! ’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동네에 안 좋은 소문이 날까봐 우리 아이들한테는 엄마만 살짝 다닐 테니 너희는 나오지 마라. 제가 아직 믿음이 없었을 때다 보니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자식 다섯 명이 전부 교회에 나와 있더라고요. 애들뿐만 아니라 집에서 키우는 개까지 교회차를 타고 다녔어요. 그 개도 교회 문 앞에 앉아 있다가 예배 끝나면 일어나서 같이 교회차 타고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크면서 작은 아들이 전주로 고등학교를 가다보니 교회를 안 나오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르렀네요. 큰 아들도 신앙에서 멀리 떠나 있어서 저는 현재 자식 전도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당시 또다른 시험거리로는 농사철에 안식일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어요. 보리 농사하던 시절에 교회를 가려고 애들 다 학교 보내고 아침 8시쯤, 안식일이었는데 농사 기계가 들어온대요. 그럴 때마다 속으로 나는 교회 가야 하는데……. 그냥 가버리면 남편과 싸우게 생겼더라고요. 일단 내 임무는 힘껏 마치고 난 후 교회를 가도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 남편이 믿지 않을 때였거든요.

농사할 때 땅에 거름을 뿌리지요? 우리집 거름은 유달리 무거워요. 비를 자꾸 맞아서…… 안식일 이른 아침에 그 거름을 손으로 들어올렸는데, 그 무거운 거름이 하나도 무겁질 않는 거에요. 내 정신이 아니고 누군가 꼭 지켜주시는 것 같았고, 하나님이 거름을 같이 들어주신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 무거운 거름이 그렇게 뿌려도 무거운 느낌이 전혀 없었어요. 참 신기했습니다. 교회차가 마을을 다니면서 신도들을 실러 오는데, 교회 다니는 모친이 논에 있는 저를 보더니, “아이구 오늘 안식일인데 일해요?” 하시기에  “아니요. 빨리 해놓고 가려고 해요.” 교회차가 멀리 세심을 돌아서 그 모친을 싣고 가는게 보였어요.

‘아이고! 이 일을 어떡하면 좋아! 빨리 해놓고 교회 가야겠는데…….’

그런데 교회를 꼭 가려고 마음 먹으면 절대 안 될 것이 없었어요. 그 일을 다 해놓고 맨발로 집에까지 뛰어갔습니다. 세수를 대충 하고 신발 신고 2킬로미터 삼계까지 정신없이 내 정신이 없이 뛰어 갔더니 예배가 시작을 안했어요. 너무 감사하지요.  ‘아!  내가 꼭 교회를 가려고 마음을 먹고 나가야겠다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구나! 꼭 교회를 가야겠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겠다.’ 하면 그 힘이 나도 모르게 다시 치솟더라고요. 하나님께선 저같이 믿음이 부족한 사람에게도 힘을 주시는구나. 열심히 말씀을 듣고 그렇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김없이 다음 안식일이 다가오는데, 이번에는 벼를 훑어야 했습니다. 제가 남편에게, 밤에 훑으면 안 되요? 탈곡기가 있잖아요. 호롱기 아시지요? 호롱기로 벼를 훑은데, 밤에 그걸 다 훑었어요. 안식일에 할 일을 전날 저녁에 다 끝냈어요. 끝내고 나니 이웃사람들이 무엇이 바빠서 밤에 벼를 훑냐고 하더라구요. 바빠서가 아니라 교회 가려고 밤에 일을 했다고 말하고 넘어갔어요. 일을 꼭 해놓고 가야겠다 맘을 먹으면 밤에라도 그 일을 마치게 해주시더라구요. 안식일에 모를 심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안식일마다 꼭 시험거리가 닥쳐와요. 닥치면 그것을 이겨 나가려고 노력을 했어요. 모를 심는데, 그때는 교회에서 논이 가까웠어요. 남편과 같이 모를 심다가 “어머 어떡해. 나 교회 가야 하는데.” 남편은 “갔다 와. 나 혼자 심을 테니까.” “그래요? 그러면 쉬엄쉬엄해요. 나 바로 빨리 갔다 와서 심을게요.” 갔다 와서 바로 논으로 들어가서 심고 그랬어요.

남편도 교회를 나가라고는 했어도 농사일로 바쁠 때는 기분이 좋지 않더라구요. 교회를 괜히 나가라고 했다며 말도 했지만, 그때는 제가 말했어요. “머리가 안 아파서 건강해서 일을 잘하고 있잖아요. 당신이 교회 가라고 했잖아요. 당신이 가라고 해서 간 것이니 앞으로 당신도 교회에 다녀야 해요.” 그러면 남편은 “그래. 당신이 가는 길은 언젠가 나도 간다.” 저는 남편의 그 말 한마디를 믿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제 남편은 그 후로 20년이 더 지나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그때가 1997년 10월이었어요. 그 뒤로 13년이 지난 2010년에 성령을 받았어요. 요즘은 몸이 불편해서 교회를 잘 못 나오는데, 제가 그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약하니까 그런가 봐요. 열심히 하나님께 구하면 낫지 못하더라도 고통은 없을 텐데, 기도 열심히 해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하는지 아세요?”

신앙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열심히 믿어야 하나님도 그것을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이세요. 저는 이왕 교회에 몸담고 하나님을 믿기로 했으면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교회 갈 때 할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마치고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 뜻대로만 살다 보면 길을 열어주시더라고요. 천국 갈 때까지 우리 열심히 믿고 삽시다. 저도 앞으로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열심히 믿고 살겠습니다. 아멘!

교회에서 나들이 가서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 모친은 남편이 교회나오실 때가 가장 행복하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