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항 세례에 대한 우리의 믿음

 

세례(침례)는 죄사함을 받는 중생의 성례이며 반드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흐르는 물에서 베풀며 세례를 받는 자는 머리를 숙이고 전신이 물에 잠기는 침례를 받아야 함을 믿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도록 보내신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명대로 물로 세례를 주는 자기 사명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름 앞에 항상 세례라는 단어가 붙어서 세례 요한, 즉 ‘세례자’(Baptist 세례주는 사람) 요한이라고 구별하여 호칭하게 됩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세례는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기원했고 그분의 명령을 받은 세례 요한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세례(침례)받으면 죄사함을 받고 중생(거듭남)합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아담의 범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이후에 태어나는 후손들이 모두 ‘원죄’(죄를 짓는 그릇된 성향)를 가지고 태어나 일생동안 죄를 짓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 사망에 이르는 저주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5:12-14)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인간이 이 사망의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생명으로 죄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범죄함 때문에 사망이 찾아왔으므로 범죄의 대가를 치르고 죄사함을 받을 때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인간을 대속(대신 값을 치름)하려면 인간의 몸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소, 양, 염소, 비둘기 등 세상의 어떤 동물이라도, 또 아무리 많은 수 동물이라도 한 인간의 생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인간의 생명만이 그 가치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흠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흠없이 창조하신 것처럼 아무 흠이 없는 존재가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새 차를 파손했으면 피해자에게 새 차로 교환해 주어야지 중고차로 대신 보상하겠다고 말한다면 피해자는 이 제안을 당연히 거절할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인간의 대속을 위해서 두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이 조건을 만족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그러나 여느 인간과는 달리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서 원죄도 없고 아무런 흠결이 없는 인간입니다.

(벧전 1:18-19)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없고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는 없으시니라

 

인간이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기 위해서 흠없는 생명을 대신 제물로 드려야 하는 상황은 마치 어떤 노인이 돈이 없어서 빵을 훔쳤는데 재판관이 벌금형을 선고받고 죄값을 치러야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벌금을 낼 수 있습니까? 그 돈이 있었다면 이미 빵을 훔치지 않고 사먹었겠지요. 그렇다면 절도죄로 체포되어 재판받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퇴양난의 상황, 딜레마에 빠진 것이 바로 인간의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빠진 인간들을 위해 대신 죄값을 치르신 분이 바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21:24-25)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흠없는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흠없는 인간의 몸으로 오셔야 제물로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입으려면 대속(대신 값을 치르고 구함)하신 분과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그 관계란 십자가의 죽음의 효력이 개인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이 개인에게 미치려면 먼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받으신 것과 같은 세례(침례. 물에 잠기는 성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 세례를 통해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다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면서 올바른 세례를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모순이요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2:41) 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믿음으로 순종하고 세례를 받은 그 사람은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세례 받는 행위가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이는 표현이며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을 의로운 분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로운 분으로 인정하는 자(세례 받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을 가리켜 ‘칭의’(의롭다고 선언해 줌)라고 합니다. 이는 마치 옷이 더럽혀진 사람이 새로운 ‘흰 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처럼, 야곱이 형 ‘에서’의 옷을 입고 대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받은 것처럼 세례를 받으면 자기 죄의 수치를 가릴 수 있고 하나님께 복받을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침례)는 물에 완전히 잠겼다가 올라와야 하는데 이것은 정확히 세례의 정의와 일치합니다. 우리가 물에 잠기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같이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우리가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과 같이 우리도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처럼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어 죽을 수 없지만 예수님이 대신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세례를 통해 그분과 연합하면 죽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성례입니다.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세례는 이미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 20:22-23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시면서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해지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22-23)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윽고 오순절날 성령을 받은 후에야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주님이 위임하신 죄사함의 권세를 행했습니다. 성령은 교회가 사죄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일종의 면허증입니다. 도로를 주행하는 운전자는 면허증을 취득한 사람이어야 하듯이 물로 세례를 베푸는 자는 바로 약속의 성령(성령의 내주)을 받은 자라야 자격이 주어집니다. 만약 ‘물세례’를 베풀되 전신이 잠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며, 고개를 숙이는 바른 형태로 시행한다 할지라도 만약 성령의 내주가 없는 사람이 베푼다면 그 세례는 사죄의 효력이 없습니다. 이는 먼허증이 없는데 운전을 한다면 그것은 불법을 행하는 자이듯이 성령세례로 거듭나지 않은 자가 세례를 베푼다면 그것은 불법입니다. 또 성령이 계신 교회의 파송을 받은 자가 베풀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내려주신 보혜사 성령이 있어야 하고 성령이 임재하시는 교회로부터 파송된 자가 베푼 세례에 사죄의 효력이 있습니다.

(22: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 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세례는 성경이 제시하는 방법대로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형식과 내용은 모두 중요합니다. 형식없이 내용이 보존될 수 없고 내용없는 형식은 공허할 뿐입니다. 올바른 형식에 올바른 내용이 보존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의 과정과 형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적 올바른 세례는

 

첫째,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야 합니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회는 세례의 방법과 대상에 대해 논쟁해 왔습니다. 대부분의 일반 개신교는 마 28:19에 근거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행전의 내용과 조화되지 않습니다. 즉 행 2:38, 8:16, 10:48, 19:5의 내용에는 모두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모순된 것일까요? 한쪽의 기록은 선택하고 다른 쪽의 기록은 버려야 할까요? 우리는 성경이 모순되지 않고 조화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마 28:19의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이란 사실 ‘예수’라는 하나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해야 옳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 곧 예수. 아들의 이름, 곧 예수. 성령의 이름, 곧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다른 사도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여러 곳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인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8: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10: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19: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둘째, 흐르는 물에서 전신이 물에 잠겨야 합니다.

본래 세례는 온몸이 물에 잠기는 침례였고, 세례의 문자적인 의미도 또한 ‘물에 잠기다’라는 헬라어 동사 ‘밥티조’에서 유래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이디오피아 내시가 세례 받을 때, ‘물에서 올라왔다’는 표현은 이런 침례가 시행된 사실을 반증합니다.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8:39)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세례의 정의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성례라는 사실을 근거로 볼 때 물에 잠겼다가 올라오는 침례의 형식은 롬 6:3~5에 기록하고 있는 세례의 정의와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죽음이고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부활입니다. 이와 같은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세례를 받은 이후 성도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의 모습과도 일치합니다. 바울 사도는 세례받은 자는 자신을 죽었다가 산 자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자로 여길지어다

 

세례받은 성도는 예배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배는 세례의 연장입니다. 예배란 죄 있는 성도가 주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사함받으며 그 결과로 주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소유한 모습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만약 예배의 은혜가 그렇다면 이는 죽고 다시 사는 세례의 정의와 일치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의미의 세례를 받은 자는 예배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삶을 지속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날마다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고백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세례의 정의와 의미로 볼 때 세례는 반드시 물에 완전히 잠기는 형태여야 합니다.

(3:10-11)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셋째,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세례는 뒤로 눕는 모양이 아니라 앞으로 고개를 숙이는 모양으로 받아야 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것은 죄인의 마땅한 태도이며 그분의 죽음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마지막 운명하시는 장면에서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요 19:30). 예수님의 마지막 죽음을 자세히 묘사한 것은 그 죽음과 연합한 세례의 구체적인 동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세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는 성례라면 마땅히 그분의 죽으심의 모양을 본받는 형태여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을 때 머리를 숙이고 받는 것입니다.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