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제목] 고난(苦難)을 받았으니, 여기서 위로(慰勞)를 받고 (눅 16:19-31)

[설교자] 이엘리사 목자

[설교일] 2023년 7월 15일(토) 안식일오전예배

 

『 …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 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苦難)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慰勞)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 』(16:19-31)

사람에게 과연 영혼(靈魂)이 있는가?’

현세(現世) 이후에도 진짜 내세(來世)가 존재하는가?’

이는 수많은 사람이 오랜 세월 심각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논의해 온 주제 중 하나입니다.

그것에 대한 해답으로 주님은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생의 전형(典型)으로 한 부자를, 그리고 가장 불행한 사람의 한 전형(典型)으로 거지 나사로를 소개하면서 현세(現世)의 삶과 내세(來世)의 삶이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선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현세(現世)에서의 부자와 나사로

 

1.  한 부자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宴樂)하였다.’(눅 16:19)

그가 입은 자색 옷은 당시 왕이나 귀족들만이 입던 옷으로 특권층을 상징하고, 고운 베옷은 매우 값비싼 물품으로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임을 가리킵니다.

그 부자는 매일 호화롭게 잔치하며 생활했습니다. 그의 한평생은 오로지 육체적 향락과 쾌락을 즐기는 삶뿐이었습니다.

2. 거지 나사로

그에 비해 나사로는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거지였습니다. 거기에다 온몸이 병들어 자기 몸을 움직여 살아갈 능력이 없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도움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다만 개들이 와서 그 상처를 핥아줄 만큼 대단히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눅 19:20-21)

거지 나사로의 삶은 실로 지극히 고독하고 가련하고 비참한 인생입니다.

 

내세(來世)에서의 부자와 나사로

 

현세의 삶과 상관없이 ‘육체의 죽음’이 부자와 나사로 모두에게 공통으로 임했습니다. 그리고 죽음 후에 내세의 삶은 현세의 삶과는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부자는 음부(지옥)에 들어가 영원한 고통을 받고, 나사로는 낙원(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위로를 받습니다(눅 16:22-24).

 

왜, 부자는 음부(지옥)에 들어가고

나사로는 낙원(천국)에 들어갔을까?

 

오늘 비유의 말씀에서 부자의 이름이 없습니다. 반면, 거지의 이름은 있습니다. “나사로”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의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신앙, 그의 속사람, 그의 삶을 대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한 사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산 사람, 하나님 말씀에 담긴 약속을 따라 천국을 소망으로 삼고 산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 대다수는 높은 경제적 소득으로 풍요롭게 살고, 출세해 명예를 누리고, 육신의 쾌락을 누리는 삶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그런 삶에 동조하면서 살아가는 건 아닌가요? 혹여 그러다 보면 신앙에 무관심하고 소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 천국을 유업으로 얻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절대 그래선 안 됩니다. 하나님께 생명의 면류관과 상급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눅 10:17-20, 빌 4:3, 히 12:22-24, 계 3:1-6, 20:12)

 

1.  부자의 불의(不義), ()

부자에게도 믿는 자의 형식과 모양은 있었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불렀고 아브라함도 그를 아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눅 16:24,27,30).

그런데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에겐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신앙인다운 삶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들어있는 약속과 심판을 바라보며 순종해서 사는 삶이 없었습니다. 다만 날마다 호화롭게 육신의 향락만을 즐기는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그가 누린 권세와 명예, 풍부한 재물은 사실 하나님이 그에게 사명으로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본분을 자각하고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잠 3:27-28, 28:27, 마 25:41-46).

중병(重病)으로 고통받으면서 자기 집 대문에 누워있는 거지, 자기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나사로를 그는 분명 날마다 보았을 것입니다.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16:20-21)

하지만 그는 나사로를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오로지 자기 육체의 안일(安逸)과 정욕만을 위해 허랑방탕하며 살았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16:19)

이는 욥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으로 타락한 부자의 전형(典型)입니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욥 31:16-18)

2. 나사로의 의(), ()

‘하나님은 나의 의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라는 뜻을 가진 <나사로>란 이름! 그의 신앙, 그의 속사람, 그의 삶을 요약한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세에서 육신을 갖고 사는 동안 어떤 삶의 모습을 가졌을까요? 자신의 비참한 삶에 대해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이나 어느 사람이든 원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천국을 소망으로 삼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았을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사실 그는 세상에서 무슨 선한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무슨 훌륭한 업적을 이룬 것도 없습니다. 그런 그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하나님께서 주목하셨습니다(삼상 16:7, 롬 2:11, 엡 6:9, 골 3:25). 나사로에겐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구하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 신앙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삶이 있었습니다(눅 22:25, 롬 2:6-10). 나사로의 신앙과 삶은 당시 그의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은 물론 후대 성도들에게도 크나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습니다(△고후 1:3-7).

 

이 비유에서 얻어야 할 교훈

 

1.  육체의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 영원한 내세

모든 사람은 필연적으로 육체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 뒤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영원(永遠)한 상벌(賞罰)이 주어지고, 완전히 두 갈래로 나뉘는 영원(永遠)한 내세(來世)의 삶으로 들어갑니다(히 9:27).

2.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세에서 겪는 고난이나 육체의 죽음이 아닙니다. 천지 만물과 사람을 지으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세상 끝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람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던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하거나, 혹은 구원하여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마 10:28-33, 막 9:43-49, 눅 12:4-9, 15-21).

3. 유한한 현세(現世)의 삶은 영원한 내세(來世)의 삶을 결정한다.

내세의 삶은 어떤 것일까요? 현세의 삶이 결정합니다. 사람마다 유한한 현세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순종이 어땠는가, 현세에서 어떠한 사람이 되었고 무엇을 추구하면서 어떻게 살았느냐입니다(롬 14:10, 고전 9:25, 고후 5:10, 히 1:1-3,6, 벧전 1:3-9, 벧후 3:8-18, 요일 2:15-17).

4. 내세(來世)의 삶은 영원히 확정적인 삶이다.

내세의 삶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절대 변경 불가(變更 不可)의 삶입니다. 완전히 확정된 것이고 영속적인 삶입니다(눅 16:26-29, 살전 4:13-18, 계 20:11-21:8).

그러므로 아직 현세(現世)에서 살아갈 때 회개해야 합니다. 잘못된 마음과 생각을 버리고 잘못된 삶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실하고 의롭고 착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사 55:6-7, 엡 4:22-24, 5:8-10, 빌 3:13-14, 골 3:1-4, 히 3:12-15).

5. 현세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일까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현세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신의 구원과 가족의 구원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눅 16:23-31, 살전 2:13, 히 13:17).

그러나 오늘 비유의 말씀에서 부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지옥의 불 가운데서 뒤늦게 후회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요청했습니다.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16:27-28)

아브라함이 그 부자에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 16:29)

여기서 “들을지니라”의 ‘듣다’는 헬라어로 ‘ἀκούω(아쿠오)’다. 단순히 귀로 듣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귀로 듣고 깨닫고 행하는 삶까지 의미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재차 요청했습니다.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16:30)

부자의 생각은, 현세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만약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사이적(奇事異蹟)을 본다면 틀림없이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 16:31)

이 말씀이 맞습니다. 성경을 보면 사실이 그렇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주 예수께서 살리셨을 때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주님을 죽이려고 획책했고(요 11:47-53) 주님이 살리신 나사로마저 죽이려고 했습니다(요 12:10-11).

6. 현세를 사는 성도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모습

나사로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최고의 귀감(龜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 재물, 명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걸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선한 일에 부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살전 5:16-18, 고후 7:10, 빌 4:3-7, 딤전 6:6-10,17-19, 벧전 2:5, 유 1:20-21).

 

맺는 말

 

나사로는 현세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외롭고 가장 슬프고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육체의 죽음 뒤에 천사들의 손에 받들려 낙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리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얼마 후면 지나갈 허무한 현세의 삶에 집착하며 모든 것을 누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죄악과 고난을 극복하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장차 천국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 8:11, 롬 8:18-25, 고후 4:17-18, 계 2:7,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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