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 71)
저는 9살 때부터 오빠를 따라 참예수교회 쌍치기도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후 부모님께서 생계를 위해 참예수교회 남원교회 근처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하시게 되면서 가족 모두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을 영은회 때 세례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령을 받아 방언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깨워 새벽기도에 데리고 다니시던 기억도 아직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께서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며 저를 의상실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여성복을 만드는 곳에서 의아하게도 남자 기술자 밑에서 일을 배우게 되었는데 당시 옷 만드는 일은 모두 수작업이었고, 맞춤옷 한 벌을 완성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밤샘 작업이 이어지는 날도 많았고, 한 달에 한두 번 쉬기도 어려웠고 토요일에 일하는 것이 다반사였던 상황이라 점점 교회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일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큰아이가 다섯 살, 둘째가 태어난 뒤에 생활고 속에서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직장을 자주 옮겨 다녔고 실직의 기간도 많았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친정의 도움을 많이 받으며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더 큰 도시로 가면 살아갈 길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에 남편을 먼저 서울로 보내고, 자리가 잡히면 올라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서울 생활은 역시 결코 녹록지 않았습니다. 월세방 한 칸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야 했고, 먹고살기 위해 어린 둘째를 업고 주인집 포장마차에서 홀서빙과 주방 심부름을 했습니다. 남편은 월급 대신 옷으로 가져오면 제가 그것을 팔아 생활비에 보태기도 했지만, 월세조차 제때 내지 못할 만큼 형편은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지인을 통해 한 패션회사를 소개받게 되었고, 안정된 직장이라는 말에 ‘1~2년만 맞벌이를 하며 자리를 잡아보자’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큰딸은 여덟 살, 아들은 네 살로 한창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나이였습니다.
종암동 집에서 압구정동 회사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고, 어린 두 아이를 집에 남겨둔 채 매일 출근해야 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은 점점 늦게 귀가하기 시작했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생활의 무게와 외로움 속에서 괴롭고 힘든 일상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삶의 돌파구가 안 보이고 깊은 절망감에 빠져 낙심해 있을 때 문득 남원교회 영은회에서 들었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깨어 있으라.” 이 말씀을 떠올리며 힘을 내보기도 했지만 제 인생은 꼬인 실타래처럼 점점 더 엉켜 갔고,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갇혀 아무런 소망없이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2007년 11월에 안양에 살고 있던 오빠가 안양교회로 나오라고 계속 연락을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알겠다며 대답했지만 교회를 나오라는 잦은 연락에 내 형편을 모르고 교회만 나오라고 하는 것 같아 야속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바쁘고 나중에 시간되면 가겠다고 미루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은 건강검진을 받자고 제안했고 이때 받은 건강검진에서 자궁경부암 초기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고, 안산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로 했습니다. 죽음 앞에 서게 된 저는 남편에게 교회를 나가야겠다고 말을 하였고 남편도 큰 반대가 없었기에 다시 하나님을 찾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잘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고 육신의 병까지 생기자 삶의 깊은 회의가 들었고 하나님께 돌아가고 간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안산 고려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 시흥 딸 집에서 요양하며 안양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평안과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아, 이곳이 내가 와야 할 곳이구나. 이곳이 나의 피난처구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은혜가 넘쳤고, 찬양이 너무 좋아 저도 모르게 계속 흥얼거리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지친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위로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딸집에서 2주를 지냈을 무렵 남편이 찾아와 서울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남편과의 불화가 여전했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남편이 너무 야속하고 원망스러워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집으로 가야했습니다.
서울 집에서 안양교회까지는 두 시간 가까이 시간이 걸렸지만 저는 안식일 오전 예배만이라도 드리기 위해 교회를 오갔습니다. 예배를 마치면 믿지 않는 남편이 있는 집으로 다시 서둘러 돌아가야 했지만,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만큼은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형제자매님들은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 사람들처럼 저를 따뜻하게 반겨주셨고, 예배 시간에 들리는 말씀은 꼭 제게만 주시는 말씀처럼 마음 깊이 다가왔습니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마음은 계속 교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머릿속에는 찬양과 말씀이 가득했고, 하나님께서 제 마음을 붙들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오가던 어느 날, 2008년 설명절 무렵이었습니다. 저는 집에서 간단히 명절 음식을 준비하며 찬양을 흥얼거리고 있었고, 쇼파에 앉아 있던 남편이 갑자기 조상 제사를 지내자고 말을 꺼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교회에 다니게 되었으니 앞으로 제사는 지내지 않겠어요.” 평소의 저라면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때는 두렵기보다 이상할 만큼 담대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고백은 제 힘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 마음에 용기와 믿음을 주셨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결국 저는 아들과 함께 빈몸으로 집을 나와 안양으로 오게 되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남편과의 불화는 계속되었고 큰 다툼을 겪으며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던 아들은 더 이상 집에 들어가지 말자고 하여 결국 안양의 오빠 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역시 현실은 쉽게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황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수술 후 몸이 채 회복되기도 전에 다시 일을 해야 했지만, 안양에는 제가 할 수 있는 패션 관련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약 6개월 정도 교복집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안식일 예배를 지켜야 했기에 늘 시간에 쫓기며 생활했습니다. 교복철이 지나 일이 끊기면 구직 자리를 안내하는 신문을 들고 하루하루 일자리를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안식일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직장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용직 가사도우미, 식당 아르바이트, 입주청소 회사 등 여러 일을 전전하면서도 어떻게든 안식일만은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이후 공공근로에 참여하며 주 5일 근무를 하게 되었고, 국비지원으로 한식조리사 자격증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농협 구내식당 조리사로 일하며 조금씩 삶의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교회 송년행사인 작은 불꽃 선물을 사기 위해 기독교 백화점에 가게 되었습니다. 물건을 둘러보던 중 작은 액자 하나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액자에는 시편 119편 105절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 말씀 앞에서 저는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제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움이 밀려와 한참을 서서 눈물을 삼켰습니다. 결국 그 액자를 집으로 가져와 매일같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마음이 평안해졌고, 세상에서 겪던 고통과 문제들을 멀리서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말씀은 제 인생의 등이 되어 주었습니다. 캄캄했던 길을 비추며 다시 앞으로 걸어갈 힘을 주셨고, 저는 말씀 안에서 위로와 소망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지 더 알고 싶다는 마음도 점점 커져 갔습니다. 그래서 예배와 안식일 행사, 성경공부와 기도회에도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안산 고려대병원으로 정기검진을 다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혼자 병원에 가는 처량한 상황에 우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이 말씀이 떠오름과 동시에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저를 꼭 안아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놀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고 계시는구나.’
너무 감사하고 기뻐서 한참을 혼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예배 시간마다 선포되는 말씀을 경청하며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저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이 되어 아무도 없는 빈 방에 홀로 앉아 목놓아 울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나를 변화시키셨습니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미움과 상처도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무렵 전도된 딸도 어려운 고난이 있었지만 가족 모두 세례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고 딸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2013년 11월쯤이었습니다. 깊이 잠들어 있던 새벽, 갑자기 오른쪽 귀에 마이크를 댄 것처럼 아주 크고 또렷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너무도 생생한 음성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귀를 만져보았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캄캄한 새벽이었고, 저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무지하고 연약한 저에게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찾아와 주셨고, 그 순간 저는 주님의 임재를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제 안의 무너진 마음과 연약한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셨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면, 이제는 ‘내 힘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럴수록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암도 2012년 2월 완치 판정을 받게 되었고, 2014년에는 교회 가까운 곳에 작은 집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녀들의 구원을 위해 늘 마음 졸이며 기도하던 소망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습니다. 지금은 딸네 가족 네 식구 모두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으며, 한때 “엄마는 교회에 미쳤어”라고 말하며 신앙에서 멀어졌던 아들도 최근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절망 속에 있던 제게 소망을 주신 분, 슬픔 가운데 있던 제게 기쁨을 허락하신 분, 상처투성이였던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신 분은 오직 주님이셨습니다. 쓰러져 있던 제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셨고, 메마른 광야 같은 제 삶의 길을 치료하시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소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길지 않은 남은 삶이지만 늘 깨어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돌아보며,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또한 저의 삶이 누군가에게 작은 빛이 되어, 어둠 가운데 있는 영혼들에게 하나님을 비추는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금까지 저를 인도해 주신 분은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