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자 김옥분

1995년 3월 27일 경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하기 위해 화장실에 갔다가 갑자기 “아이고, 머리야”하는 비명과 함께 머리를 감싼 채 거실로 나왔습니다.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병도 잘 안 나고 설사 아프다고 해도 그렇게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급한 마음에 119 신고를 해 가까운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갑작스런 남편의 뇌출혈

그때가 아침 8시경이었는데 남편은 춥다고 했습니다. 병원에서 CT 촬영하는 것을 보고 집으로 잠깐 왔는데 시동생에게서 남편이 이상하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병원에 가 보니 “지금 빨리 다른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몸부림치는 남편을 구급차로 급히 옮겼는데, 도착한 병원 응급실에 즉시 입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병원이 생긴 이래 가장 환자가 많았다고 할 정도로 복도에도 환자가 꽉 차 있었고, 보증인이 없어서 아침 9시경에 갔지만 밤 1시경에야 입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아는 사람을 보고도 “자네 누구야?”하고 소리치고, 화장실에 계속 가야겠다고 하고, 회사 친구들이 와서 술 한잔해야겠다고 하는 등 좀 이상했습니다. 조금 자니까 저도 못 알아 볼 정도로 심해졌고 이런 상태가 계속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혈관이 터져 5분이면 죽는다는데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신기했는지 수술도 해주지 않고 내버려두었습니다. 남편은 링거 주사 5-6개를 맞고 있었는데 제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그것을 뽑아버려 온 방안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환자를 돌보았는데 정말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13일이 지나 병원에서도 수술을 하기로 하고 담당 의사가 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엑스레이 촬영 사진을 보여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런 중요한 결정을  하는 순간에 아주머니 혼자 들어도 될까 모르겠습니다. 아주 굵은 혈관이 터졌는데 살아도 목숨만 건지는 것이지 장애가 있어도 여러 가지가 올 테니까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수술을 빨리 하지 않은 것은 혈관이 응고되었다가 몸부림치면 다시 터지고 해서 그런 것입니다. 생사는 책임 못 지지만 아주머니가 원하시니 수술을 하겠습니다.”

남편은 수술 후에도 전과 같이 몸부림을 치면서 난리였습니다. CT 촬영을 해서 수술 결과가 어떤지도 봐야 하는데 가만히 못 있고, 머리에 붕대를 감아 놓으면 3분도 안되어 풀어버리는 바람에 물이 차서 얼음을 달고 다녀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절망감이 들었습니다. 남편 때문에 다른 환자들이 안정을 취할 수 없어서 아무도 같이 있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옮길 병실도 없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이제 치료할 것은 다 했으니까 퇴원하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병실 사람들에게 “몸조리 잘 하세요”하면서 친절히 인사를 했습니다. 이것을 보니 이제는 제 정신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 같아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택시를 타고 오는데 또 정신이 오락 가락하는 것입니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 무조건 서라고 우겼습니다. 기사 아저씨가 도저히 화가 나서 운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사정하고 달래서 겨우 집에 왔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을 보고는 “아이구 내 새끼 잘 있었냐?”며 끌어안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또 정신이 나갑니다. 이때는 완전히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과 같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와서 그 몸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향이나 집안 사람 중에서 죽은 사람들의 흉내를 냈습니다. 특히 시어머니의 행동을 할 때는 너무나 똑같았습니다. 식사할 때만은 할머니가 살아있는 것으로 생각되는지 아이들에게 “할머닌 식사하시라고 해라”고 하고, 아이들이 “할머니가 안 계시는데 아빠는 이상하다”고 하면 밥상을 엎어버리고 “버르장머리없다”고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계시던 방에서 할머니와 대화를 하면서 밥을 먹습니다. 그러나 그때뿐이고 수시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때는 모든 행동이 여자 같고, 어느 때는 행동이 갓난 아이 같고……

제가 “당신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누구누구다. 나는 군에서 죽었는데 여차여차 복수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그리고 병에 있는 것은 비누나 약품이나 무조건 먹었습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엄마가 춥다 하시니까 이불 덮어 드려야 한다고 하면서 이불을 가지고 가서 덮고 나옵니다.

그리고 남편은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 아파트가 아닌 농촌이라고 알고 이층에서 신을 밖에 던지고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툇마루에서 신을 놓고 내려가듯이 자연스레 내려가려고 하고, 떨어지면 죽는다고 해도 모릅니다. 제가 잠깐 눈만 감았다 하면 슬그머니 일어나 창을 열고 나가려고 해서 방범창을 하려고 했다가 병원비 때문에 취소한 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저는 남편을 지켜봐야 하니까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고, 무슨 일을 할지 몰라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시장 한번 가지 못했습니다. 창살만 없었지 감옥 생활이었습니다.

게다가 남편에게 갑자기 힘이 들어오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목소리가 아닌 괴상한 목소리가 나고 눈빛이 변하고 힘줄이 꿈틀거리는데 살 안에서 혹 같은 것이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실랑이를 하며 움직이고 나면 몸에서 땀과 이상한 진액이 나왔습니다. 집안 형제들은 이런 속사정도 모르고 수술을 받았으니까 당분간은 어수선하고 발작도 하고 정신이 오락가락 할 것이라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도 우리 남편 같은 환자는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한번은 남편이 링거 주사 바늘 5-6개를 뽑아버린 채 나가는데 제가 엘리베이터로 간신히 쫓아 들어가 말렸습니다. 그런데 자기하고 싶은 대로 못 하게 한다고 제 목을 졸랐습니다. 사람이 없을 때 사정없이 조르다가 사람들이 타면 풀어 주었고, 철사 옷걸이를 가지고 있다가 못 나가게 하면 그것으로 목을 조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다가도 ‘세월이 지나면 제 정신이 돌아오겠지. 내일은 다른 방법을 써 봐야지’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보니까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독하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나가려고 하기에 따라 가면서 ‘만약 달려오는 차에 뛰어 들어가면 그냥 놔둬야겠다’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같이 갔습니다. 그리고 “어디 가요?”라고 물으니까 “할머니가 산 오두막집에서 나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목적지가 있는가 보다 했는데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안방을 차지하고 드러누워버리는 것입니다. 그 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불쑥 들어와 이상한 행동을 하니까 사람들이 당황하고 저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남편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집집마다 이랬습니다.

시고모님이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셨는데, 시어머니가 무속을 하다가 죽었다고 하시면서 종교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남편이 온전해지기만 한다면 예수를 믿으라면 믿겠고, 굿을 하라면 하겠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데리고 나갈 수도 없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시고모님은 며느리가 정신 질환이 있었는데 이것을 믿고 나았다고 하면서 며느리를 데려 왔습니다.

남편은 외부 사람이 오면 발작을 하고 난리인데 귀신을 쫓으려고 온 것을 아는지 무서워했습니다. 그분은 “동서, 사실은 나도 그랬는데 지금은 괜찮아” 하면서 방에 들어가 벽에 팔만대장경에서 뽑아놓은 글귀를 붙여놓고 무릎을 꿇고 주문을 계속 외우면서 저에게도 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남묘호랑교였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남묘호랑교 사람들이 있는 동안에는 발작을 하지 않다가 가고 난 다음에는 오히려 그 발작의 강도가 심해져서 몇 갑절 더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후에 저는 그들을 불러 남편이 더 심해지니까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친정어머니는 교회에 데리고 가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던 차에 참예수교회의 송경희 자매가 이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이 자매는 1년 정도 같이 공장 다니면서 얼굴만 알았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접하게 되었고, 송 자매에게 “교회를 다니고 싶은데 우리가 가지는 못하니 교회에서 와주셨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송 자매는 그후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요일 어머니에게 “몇 가지 가져다 줄 테니까 마중 나오라”는 전화가 왔는데 저는 못 나간다고 말하고 이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5시 반쯤 남편이 발작을 하는데 큰애가 보다 못해 “아빠 모시고 바람 쐬고 올 테니까 엄마는 눈 좀 붙여요”라고 하면서 남편과 함께 나가려고 하기에 믿음직스럽지 못해 같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남편이 동네 시장으로 가는 골목을 기억하고 순순히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집 문 앞에 어머니가 앉아 계셨는데 우리가 못보고 지나치자 남편이 “어머니 여기 웬일이십니까?” 하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좀 돌아오나 싶었는데 육교를 지나자 발작이 시작되어 다시 집으로 끌고 왔습니다. 어머니는 오면서 꼭 교회에 데리고 가서 기도를 받으라고 강권하셨습니다. 제가 힘들어서 중간에 쉬고 있는데 한 할머니를 만나서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토요일 예배를 드리고 일요일 오전에 집으로 가시던 길이었는데 교회 일을 말씀하시다가 어머니가 “내 사위 같은 병도 나을 수 있느냐?”고 하니까 나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점차 온전해 짐

알고 봤더니 송 자매가 다니는 참예수교회 신도였습니다. 송 자매는 당시 집안 일로 바빴고, 제가 불교를 좀 더 믿어보고 온다고 하니까 조심스러워 쉽게 전화를 못했지만 이 장로님과 같이 기도는 계속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화를 했더니 송 자매와 이 장로님, 목자님이 오셔서 예수를 믿자고 권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그렇지 않아도 나도 예수 믿으려고 했다”고 하면서 기도할 때 이전에 다쳐 불편한 무릎을 꿇으려고 애썼습니다.

찬송을 부르는데 너무나 우리 사정과 맞는 내용이어서 저도 아이들도 모두 울었습니다. 그리고 간단히 예배를 보면서 방언 기도와 안수를 한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안수는 이해가 가는데 방언 기도는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큰 주문이라도 다 받아들여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충만하게 방언 기도를 하고 안수를 하는데 남편은 굉장히 순종을 잘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하는 것은 강요해도 안하는 사람이었는데 비오듯이 땀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몇 차례 오시고 화요일 저녁 예배드리는 날 차를 가지고 우리를 데리러 오셨는데 남편은 순순히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번은 윤 형제님이 “모셔다 드리겠다”고 하는데 남편은 자기가 집을 찾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우리가 끌고 갔는데, 중간에 술과 담배를 사러 가야겠다고 해서 다시 억지로 끌었습니다. 남편은 자기를 놓으면 찾아가겠다고 하면서 아파트 주소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집을 모르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 자기가 누구고, 이것은 자기 집이고, 집에 오는 길은 어떻고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9월 17일 가족 모두 세례를 받았고, 남편은 그후 더 나아졌습니다. 그후 남편은 성령도 충만하게 받았고, 발작 증세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전보다 줄어들었습니다.

눈이 나음

그리고 기억이 돌아올 즈음에 눈이 안 보인다고 했습니다. 눈이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데 검은 보자기 같은 것이 눈에 가렸다 없어졌다 한다는 것입니다. 안경을 써도 소용없었습니다. 안과에 가서 검사를 하는데 진료 차트를 보시던 박사님이 놀라면서 “정말로 이 수술을 받았습니까? 이 수술을 받고도 이렇게 멀쩡합니까?”하며 놀라는 것입니다. 이 혈관이 터지면 미국에서도 두세 명 생명을 건질까 말까 하고 이렇게 정신이 온전하게 된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눈만 조금 안보이고 팔 다리 못 쓰는데는 없냐고 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또 한번 놀랐습니다. 혈관이 터질 당시 흘러나온 피를 약을 통해 몸 밖으로 계속 배출을 시키는데 이렇게 했어도 배출되지 못한 피가 좀 남아서 구름이 태양을 가리면 그늘이 생기듯이 이 피가 흘러가면서 시신경에 영향을 줘, 눈이 보였다 안보였다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4개월  더 약물 치료를 하다가 호전되지 않으면 수술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수술을 반대하고 교회에서 안수 받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온 가족이 다 함께 구원의 진리를 알게 되어 세례 받고 성령 받아 중생하게 되었고, 수많은 육신의 시련과 마음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셨고, 남편의 병도 치료해 주셨으니 이보다 더 기쁘고 감사한 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