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제목] 남겨두심과 지키심(요 17:15)
[설교자] 김용준 목자
[설교일] 2023년 4월 21일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위해 다른 것을 구하시지 않으셨다.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기도하셨다. 이 ‘보전함’은 주님께 중요한 문제였다.
(요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보전한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보호하다, 간수하다, 지키다’ 라는 의미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온전하게 잘 지키는 것이다. 변질되지 않도록, 상하지 않도록, 흠이 생기지 않도록 잘 지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이것을 기도하셨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그들을 지켜달라고 요청하셨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는 다르다. 세상에 속해있지 않다. 정신 구조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며, 사고방식이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미워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세상의 삶이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구하셨다. 어떤 악이 나타나더라도 우리가 거기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달라고 간구하시는가?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 남겨달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보전해달라는 간구와 모순된 것이 아닌가? 악한 자에게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하는 것보다 세상에서 저희를 데려가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어째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하늘에 들림받지 않는 것인가? 왜 완벽해지지 않는 것인가? 왜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받게 하시는 것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다.
*우리를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
1. 우리에게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도 데려가주시기를 간구한 사람들이 있었다. 모세, 엘리야, 요나 같은 사람이다. 세 사람 모두 하나님께 데려가주시기를 구했다.
(욘 4: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욘 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왕상 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민 11: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다. 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는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안전만을 생각한다면, 그들을 데려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데려가시지 않으신 이유는 그들이 이땅에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난다면 누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요 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으시다. 이땅에서 할 일이 있다. 제자들이 가버리면 누가 이 일을 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세상에서 어떤 메세지를 전해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예수님을 드러내야 함을 알려주신 것이다. 즉, 우리는 주님께서 이땅에 남겨주신 자들이다.
2. 삶은 우리가 완전해지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온전해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전해져야 한다. 우리에게 점진적 변화가 지속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세상에 남겨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실패와 고난으로 겸손하게 하신다.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언제든지 교만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느끼게 하신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인정했다.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연단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으로 만들고자 하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발전 과정 중 일부이다.
*교훈
1. 우리를 세상에서 떠나게 하는 모든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계획과 다르다. 자살은 정말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백성은 절대 이런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
(왕상 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는 큰 허무함 속에 사로잡혔다. 자기의 삶이 부정당하는 일을 만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들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래도 엘리야는 스스로 죽지 않았다. 하나님께 데려가주시기를 간구했다. 설령 자살 생각이 들 때에도, 스스로 생명을 거두어가는 선택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기뻐하시지 않으심을 기억해야 한다. 자살은 어떤 방식에서라도 잘못된 것이다. 차라리 엘리야처럼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이 좋다. 자살은 성도의 선택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자살뿐 아니라, 세상에서 떠나려는 모든 시도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자연인처럼 속세에서 떠나거나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주님의 기도와 의미적으로 반대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배운 진리를 회피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 삶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견디는 것이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자기를 지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은둔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 일을 하면서, 우리를 세상에 물들지 않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땅에 남겨두신 이유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이다. 우리가 세상 안에 있어도 우리는 세상에 물들지 않게 우리를 지킬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세상에 물들지 않게 지켜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떠나려 해서는 안 된다.
2.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절대 불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이지 않아도 시련 속에 목적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위해 우리에게 이것을 허락하셨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를 그 상황에 넣으셨음을 믿어야 한다. 제자들도 그것을 위해 남기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내가 만나는 환경, 상황에 대해 어린아이처럼 불평해서는 안 된다. 왜 이런 상황을 만나게 하셨냐고 불평한다면,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불평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상황 속에 나를 넣어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3.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남겨두시는 이유는,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만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상황 속에서 불평하거나 불만을 품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살다가 무너지더라도, 우리 삶은 실패한 삶은 아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만 한다. 감사하며 살아야만 한다.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이것을 세상에서 받은 가장 큰 특권처럼 기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예수님의 대변자로 삼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완수하라고 이 땅에 자신을 남겨주셨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이다.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확신하신다. 우리를 보존하여 지키시는 아버지의 능력에 대해 확신하시는 것이다. 우리도 주님께 우리를 부족함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시기를, 주님의 영광을 항상 드러내게 하시기를 기도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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